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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놂작가 Jun 27. 2019

첫사랑과 함께 사라진 베니건스

기운 센 을지로입구 식탐러의 워크&푸드 로그

  나의 첫사랑은 열 다섯, 그 무섭다는 중2 때였다.

나는 당시 유니텔이라는 PC통신에 흠뻑 빠져 있었다. 심한 중2병을 앓고 있던 나는 내 병을 창작 활동으로 승화 시키는 데 전념했다. 그렇다. 나는 인터넷 판타지 소설 작가였다.


  나름 1999년 당시 최초의 판타지 러브 소설을 구상하여 100편까지 연재하면서 유니텔 판타지 소설 게시판에서 나는 꽤 이름 있는 작가로 등극했다. 거의 매일 밤마다 열리는 단체 채팅방에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닉네임을 사용해 대화하면서 가까워졌고 어느 정도 친분이 생긴 후에는 서로의 스티커 사진을 스캔해서 교환하며 친목을 다지다가 결국 정모를 하기에 이르렀다. 첫사랑과 내가 처음 만난 것은 바로 이 정모에서였다.


  그 아이는 강원도 강릉 출신의 멀대 같이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열 다섯 동갑내기 소년이었다.

당시 나는 따로 남자 친구가 있었고(첫사랑과 첫 연애는 엄연히 다르다) 사이버 세계에서도 이 아이에 대해 특별히 깊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 날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굉장히 희미하다. 그러나 광화문 교보문고 안 멜로디스 앞에서 처음 마주쳤던 그 순간만큼은 이상하게도 지금까지 또렷한 느낌으로 남아 있다.




  첫 만남 이후에도 우리는 유니텔을 통해 꾸준히 인연을 이어 갔다. 나는 더 이상 판타지 소설을 쓰지는 않았지만 잊을만 하면 문자나 쪽지를 보내 오는 이 아이와 계속해서 연락을 이어 나갔고,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을 맞아 서울에 놀러왔다는 얘기를 듣고 잠시 만나기도 했다. 그 때까지도 나에게 이 아이는 여전히 유니텔에서 만난 동갑내기 남자아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2003년 겨울, 수능을 마친 홀가분했던 그 겨울의 어느 날 면접을 보러 갔던 대학교 교내에서 나는 첫사랑과 조우했다. 그 날은 눈이 내렸고 사방이 온통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1년만에 만난 그 아이가 안경을 벗은 탓인지 체격이 좋아진 탓인지 아니면 눈처럼 하얀 파카를 입고 와서였는지 괜히 눈부시고 어쩐지 낯설었던 기억이 난다. 나를 보고 환하게 웃던 그 아이, 열 다섯 수줍은 소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나를 좋아해 왔노라고, 같은 곳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하고 싶어 열심히 공부했다고 고백하던 그 아이와 한겨울의 캠퍼스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잔상으로 머릿 속에 남아 있다.




  우리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백퍼센트의 여자아이와 소년처럼 사랑했다.

그 아이에게 나는 첫사랑이었고 나 역시 이제와 돌이켜 보면 그가 나의 첫사랑이었다. 그리고 모든 첫사랑이 그렇듯 우리의 꿈결 같던 연애는 흔적만을 남긴 채 어느 순간 끝나 있었다. 마치 우리가 자주 가던 대학로의 베니건스처럼 말이다.


  베니건스에서 무조건 주문하던 메뉴는 몬테크리스토다. 고전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자 소설 자체의 이름이기도 한 몬테크리스토는 이름에서 풍기는 클래식한 뉘앙스와는 달리 튀긴 샌드위치라는 굉장히 서민적인 메뉴다. 한 마디로 크로크무슈를 튀긴 듯한 요리인데, 베니건스의 몬테크리스토에는 햄과 딸기잼 대신 터키브레스트와 라즈베리잼이 들어가 풍미를 더한다. 상당히 느끼하기 때문에 두 조각 이상 먹기는 힘들었지만 베니건스의 시그니처 메뉴와도 같아서 늘 빼놓지 않고 주문했었다.


  몬테크리스토와 곁들이는 디쉬로는 역시 텍스맥스 시푸드 라이스를 빼놓을 수 없다. 스페인 식으로 해산물을 잔뜩 넣어 칠리와 함께 살짝 매콤한 소스에 볶아 철판 그대로 내오는 이 메뉴는 몬테크리스토의 느끼함을 훌륭하게 잡아 주면서 감칠맛을 돌게 해 사실상 나의 최애 메뉴였다.


  둘이서 먹기에 메뉴 두 가지는 부족해서 마지막으로 항상 주문하던 메뉴는 컨츄리 치킨 샐러드. 이름에서부터 인심 좋은 텍사스 남부 시골 아주머니가 나무 그릇에 정원에서 갓 딴 싱싱한 채소를 듬뿍 담아 줄 것만 같은 이 샐러드는 딱 알맞게 간을 해 바삭하게 튀긴 닭튀김을 함께 제공하는데, 나는 이제껏 베니건스의 컨츄리 치킨 샐러드보다 맛있는 치킨 샐러드는 먹어본 적이 없다. 가늘게 슬라이스한 체다 치즈와 베이컨도 완벽한 비율로 뿌려져 있고 허니 머스타드 드레싱의 당도도 절묘하게 적당했다.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나의 첫 사랑처럼 베니건스도 2016년 2월 14일 베니건스 롯데강남점의 영업을 종료하면서 한국에서 철수했다. 내게 처음으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었던 첫사랑의 기억이 날카롭진 않아도 아직까지 잔잔하게 마음에 남아 있듯이 최애 패밀리 레스토랑이었던 베니건스도 아직까지 가끔씩 생각나곤 한다.


  그러나 어쩌다 우연히 첫사랑을 마주치더라도 다시 사랑할 수 없는 이유는 내가 사랑했던 것이 그 아이였는지 아니면 그 아이를 사랑했던 그 때의 시간과 나 자신이었는지 이제는 영영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베니건스의 몬테크리스토가 그토록 맛있었던 것도 스무 살 어린 나이에 처음 접한 패밀리 레스토랑 음식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지금 그 아이를 만나도 이제 더이상 그는 그 시절 내 첫사랑이 아닌 것처럼 이제 와 베니건스를 다시 방문하게 되어도 그 때만큼 맛있게 몬테크리스토며 텍스맥스 시푸드 라이스를 즐길 수 없을 거라는 건 정말이지 씁쓸하고도 슬픈 일이다.


  그래서 첫사랑은 그저 추억으로 남길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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