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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놂작가 Mar 06. 2021

지나고 나면 선명한 곰국시

기운 센 을지로입구 식탐러의 워크&푸드 로그

  내가 D를 만난 건 20여년 전 대학교 신입생 때였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 한 데 모여 짜여진 프로그램에 맞춰 무언가를 해야 하는 작위적인 상황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새터에 참석하지 않았고, 첫 학기 첫 수업 강의실에 들어서자 낯선 사람들 투성이였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의 그 학과는 과반수가 남학생으로 구성돼 있었다. 전체 400명의 학생 중 여학생의 수가 80명 뿐이었으니 비율로 따지면 나는 20%에 속하는 소수였고, 이 20%는 남자밭 속 소수 여성 집단이 누릴 수 있는 프리빌리지를 한껏 누리며 관심과 인기를 탐식해 나갔다. 물론 나를 제외하고 말이다.


  당최 그 집단에 끼어들 도리가 없었다.

차라리 화장품 얘기를 하면 모를까 여자들끼리 모여서 고작 스무살짜리가 나름 경영학도랍시고 주식이며 선물 시장 얘기를 하는 것도 이상했고 그렇다고 학과의 남자들 얘기를 하며 품평회 도마에 그네들을 올리는 것도 질색이었다. 그러는 중 은근히 서로의 차림새를 곁눈질 한다든지 부모님의 재력이며 집안 얘기를 슬쩍 흘린다거나 중간고사니 기말고사 시즌에는 글로 쓰기에도 오글거리는 공부 안한 척을 실컷 해놓고 정작 성적에 집착하니, 나로서는 도저히 이 집단에 적응하고 붙어 있을 의지도 자신도 없었다.




  그 때 D가 나에게 다가왔다. 아니 나를 발견했다 혹은 선택했다, 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려나.

이전까지 친분 관계가 전혀 없고 말 한 번 섞어 보지 않았던 사이인데 자신의 생일 파티를 모월 모일 압구정 모처에서 하니 꼭 오라는 초대가 우리의 첫 대화였고, 낯선 자리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어쩐 일인지 내가 초대에 응했던 것이 D와 나의 시작이었다. 그 생일 파티 자체는 대부분의 어색한 자리가 그렇듯 재미도 없었고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확실한 건 내가 나타나자 D가 굉장히 기뻐했고 나는 굳이 왜 라는 의문을 갖지 않은 채 자연스레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생일 파티 이후 D는 대놓고 나의 베스트 프렌드 자리를 꿰찼다.

수업을 함께 듣는 것은 물론 멀리서 내가 보이면 뛰어와 헤드락을 걸었고 틈만 나면 캠퍼스 안 카페에서 빵을 사달라고 졸랐다. 공강 시간에는 지하 광장 PC방에서 함께 스타를 했고 주말에도 시시콜콜한 문자를 주고 받거나 통화를 하며 시덥잖은 얘기들로 시간을 채웠다. D는 어쩐지 무례한 구석이 있어 사람들에게 자주 말실수를 했고 그러다 나한테까지 실수를 하면 나는 가차 없이 심한 욕설을 내뱉거나 뺨을 때리기도 했다. 그렇게 욕을 듣거나 맞고도 D는 한 번도 내게 화를 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D를 그저 대학교 시절을 함께 보내는 과 동기 정도로만 생각했다.


  D와의 인연은 내 생각보다 질겼다.

D는 군대를 다녀온 뒤 학교를 자퇴하고 수능을 다시 치러 지방의 치대에 입학했다. 나는 그 사이 졸업을 하고 취직을 했고 D는 꾸준히 나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서울에서 매일같이 술 마시고 놀던 날라리가 촌구석에 틀어박혀 공부하려니 죽을 맛이겠거니 싶어 짬이 나는 대로 전화를 받아 주었고 늘 그렇듯 우리의 통화는 80% 이상이 내가 퍼붓는 욕설이었다. 재밌는 건 그렇게 통화를 하고도 나는 D가 서울에 올라올 때 부러 시간을 내어 그를 만나주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회사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 내가 거의 매일같이 술을 마시는 걸 아는 D는 자정 즈음이 되면 전화를 했다. 내가 있는 곳의 위치를 확인한 뒤 차를 끌고 근처에서 술자리가 파하길 기다리다 나를 집에 데려다 주는 것이 방학을 맞은 D의 역할이었고 집에 가는 차 안에서 나누는 몇 마디 대화가 교류의 전부였다. 가끔은 내 지인들의 술자리 막판에 D도 잠시 앉는 경우가 있었으나 운전을 해야 하기에 술잔 대신 담배를 쥐었고, 심지어 은근히 낯을 가리는 탓에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만 있다가 일어나곤 했다. 그러다 차에 타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D로 돌아와 온갖 가정사며 자신이 만나는 여자 이야기, 학교 이야기 등 각종 신변잡기를 신나게 떠들어댔고 나는 나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는 D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경청했다.




  나는 D와 내가 철저한 계산을 바탕으로 한 계약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사이는 기브앤테이크가 명확했다. 법관인 아버지와 형에 강남에서 대형 입시학원과 결혼정보회사를 운영하는 어머니, 치과 의사인 자신까지 유복한 환경에 부족함 없이 자랐지만 D에게는 늘 어딘가 결핍이 있었다. 천하에 이런 망나니가 없을 것처럼 놀다가도, 온갖 예쁜 여자들과 상상도 하지 못할 기상천외한 연애 관계를 가지다가도 D는 쉽게 공허해 했고 허무에 빠졌다. 그럴 때마다 D는 나를 찾았고 나는 충실히 그의 필요를 채워 주었다. 나로서도 밤길에 취한 채로 위험한 택시를 타는 것보다야 허우대 좋은 놈이 에스코트 해주는 편안하고 안락한 귀갓길이 좋았고 회사 일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D와 통화하면서 속시원히 욕을 내뱉는 카타르시스 역시 놓치기 아쉬운 재미였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서로 주고 받고 누구 하나 손해보는 것 없이 완벽히 깔끔한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D에게 절교 선언을 당한 순간까지도 무엇이 잘못됐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를 알고 지낸 10여년 동안 내가 단 한번도 D에게 먼저 연락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도, 어떤 절박한 순간에 걸려온 D의 전화들과 여러 번의 문자를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내가 무시했었다는 사실도, 계산이 아닌 마음을 주려 했던 D의 수많은 시도들을 너무나 차갑고 냉정하게 잘라 내고 나 편할 대로 우리의 관계를 정의해 왔다는 사실도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모든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셀 수 없을 만큼의 상처와 실망을 D에게 안겨준 뒤 10년 만에 처음으로 내가 먼저 보낸 문자는 '야 나 결혼함ㅋㅋㅋ' 이었다. 그리고 그 후 D는 자신의 삶에서 나를 끊어냈다.




  지나고 나면 너무도 확실하고 선연했던 감정들이 있다.

당시에는 몰랐으나 이제서야 알게 된 마음들이, 나도 모르는 새 스며든 무언가가 오늘의 나를 슬프게 한다. 이미 늦었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용기내어 D에게 먼저 연락해 내가 자주 가는 시청역 곰국시집에서 함께 점심을 먹고 싶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데 서투른 나는 아마도 돌려서 얘기하겠지. 이 곰국시는 간이 슴슴하고 김치 맛도 덜 자극적이어서 먹을 때는 그냥 그런데 꼭 지나고 나면 그 분위기며 맛이며 자꾸 생각이 난다고. 오래도록 생각만 하고 먹으러 오질 못했는데 이렇게 너와 함께 와서 먹으니 좋다고.


  아마도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내가 용기를 낼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그 마음이 이번엔 거꾸로 D에게 제대로 가 닿을 수 있을 때까지. 그 날이 오면 꼭 함께 곰국시집엘 가서 뜨끈한 냄비를 앞에 두고 해묵은 감정들을 털어 내야겠다. 그리고 이번엔 정말 처음부터 제대로, 스무 살의 D를 마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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