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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놂작가 Mar 10. 2021

조금 특별했던 소녀의 소세지 계란부침

기운 센 을지로입구 식탐러의 워크&푸드 로그

  요즘에야 특수학교 수도 많이 늘었고 일반학교에도 특수학급이 생겨서 사회가 특수장애아동들의 학습과 적응을 시스템적으로 지원하고 있다지만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이런 사회적 제도가 잘 되어 있지 않았다. 그만큼 이들에 대한 인식이나 시선도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나는 그 아이를 초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 동급생으로 만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아이의 어머니가 매일같이 잘 다림질해 옷을 입히고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 단정히 묶어 학교에 보내신 덕분이었겠지만 얼핏 멀쩡해 보이는 여자애였다. 또래보다 키가 조금 크고 마른 편이었고 피부가 유난히 희고 퍼석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들으면 쉴새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거나 사람을 마주할 때 제대로 눈을 맞추지 못하고 자꾸만 힐끔거리며 불안한 시선으로 눈동자를 쉴새없이 움직였다. 그보다 충격적이었던 건 틈만 나면 교과서 책장 사이에 가래침을 뱉고 책을 탁 덮는 통에 그 아이의 책이란 책은 모조리 책장이 마른 가래로 두껍게 울어 있었다는 사실이었고 고작 열 살 남짓 우리들에게 그런 '이상한' 아이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도 불편하고 멀었다.


  나 역시 또래와 다르지 않은 열 살 짜리 여자애였다.

심지어 약간의 결벽증마저 있었던 터라 그 아이의 책상 위에 놓인 울퉁불퉁한 교과서만 보아도 헛구역질이 나기까지 했다. 계속해서 머리를 흔들며 혼잣말을 하는 바람에 아침에 어머니가 예쁘게 묶어주셨을 머리는 등교 후 한두 시간만 지나면 잔뜩 헝클어지기 일쑤였다. 나는 그 애가 싫었고 굳이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 그 때는 그것이 자폐라는 병의 증상인 것도, 그래도 혼자서 등하교와 생활이 가능한 딸을 멀리 있는 특수학교에 보내고 싶지 않았던 그 아이 어머니의 마음도 전혀 이해 못할 나이였고 환경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학부모님들의 참관 수업이 있던 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니 엄마가 나를 불러다 앉혔다. 엄마는 나에게 내일부터 그 아이와 함께 앉아 점심을 먹고 하루에 두 번 등교할 때와 하교할 때 그 아이를 안아 주며 이름을 불러 주고 사랑한다고 인사하라고 했다. 청천벽력이었다. 소매며 옷깃에 교과서에처럼 가래침이 묻었을 지도 모르고 도시락은 뭘 싸오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나와 같이 점심을 먹는 친구들이 싫어할 것이 뻔했다. 엄마 말씀을 잘 듣는 아이였던 내가 드물게 싫다고 항변했지만 엄마의 표정은 단호했고 나는 그럴 때의 엄마가 얼마나 엄격한지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무슨 수를 써도 마음을 바꾸지 않으실 터였다.


  다음 날부터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엄마의 지시를 수행했다.

아침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어기적대며 다가가 포옹하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 아이는 처음에는 조금 놀라고 경계하는듯 했지만 자신보다 한 뼘 정도 작은 내가 까치발을 들고 목을 껴안아 주는 것이 내심 싫지 않은 눈치였고 나중에는 하교할 때 신발장 옆에서 일부러 나를 기다리기도 했다. 나는 숨을 참으며 속으로는 진저리를 치며 그 아이를 안고 그래도 충실하게 누구야 사랑해, 빼먹지 않고 꼬박꼬박 얘기했다. 엄마한테 거짓말을 했어도 됐을 텐데 열 살의 나는 참 순진하고 투명했다.


  사실 포옹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점심 시간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나와 같이 점심을 먹는 친구들의 극렬한 저항에 부딪혀야 했다. 처음 우리의 도시락 테이블로 그 아이를 초대했던 날 같이 먹던 친구들의 반 이상이 자신들은 밥을 따로 먹겠다고 했다. 그 순간 왜인지 모르게 굉장히 화가 났다. 나는 앙칼진 목소리로 그럼 나랑 얘랑 둘이 먹을 테니 너희들 전부 빠져, 외치고 새침하게 그 아이의 손을 잡고 내 책상에서 도시락을 열었고 기세에 눌린 친구들이 쭈볏쭈볏 다가와 앉는 것으로 우리의 특별한 점심 모임이 시작됐다.


  내 기억에 그 아이의 도시락 반찬은 거의 늘 소세지 계란부침에 잘게 자른 김치였다.

작은 반찬통 하나에 계란옷을 입혀 얇게 부친 소세지가 촘촘히 줄세워 한가득 들어 있었다. 당연한 얘기였지만 아이들은 그 애의 반찬엔 손을 잘 대지 않았다. 솔직히 나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러면 안되는데 자꾸만 소세지 위로 그 애의 가래 먹은 교과서가 오버랩됐다. 그래도, 안 먹을 수는 없었다. 그 소세지 계란부침은 초등학교 3학년짜리 아이 혼자 먹기엔 꽤 많은 양이었는데 아마도 딸이 친구들과 점심을 같이 먹게 됐다는 얘기를 듣고 어머니께서 나눠 먹으라고 넉넉히 담아 주신 것이었을 테다. 그러니 안 먹을 수는 없었다. 반찬통에 그대로 남긴 소세지를 그 애의 어머니가 보시게 해서는 안되는 거였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두어 개씩 소세지를 집어 먹었다. 맛있다며 호들갑을 떠는 것도 잊지 않았다. 처음 같이 점심을 먹은 날 하교길에 여느 때와 같이 포옹 후 사랑한다고 말하자 그 애가 처음으로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나도, 나도 사랑해' 라고 대답했던 것이 왜인지 잘 잊혀지지 않는다. 그 때 내가 느낀 감정은 고마움도 기쁨도 아닌, 90%의 감동과 10%의 왠지 모를 미안함, 그리고 부끄러움이었다.




  우리는 함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중학교에 진학했다.

그 아이의 부모님은 놀랍게도 중학교 역시 특수학교 대신 일반 여중을 선택하셨다. 나는 1학년 1반, 그 아이는 1학년 6반이었는데 한 가지 에피소드라면 입학식 이후 소위 일진이라는 무리들이 우리 반을 찾아와 교탁 앞에서 큰 소리로 떠들었던 일이다. "야 여기 1학년 6반 고아무개 친구가 있다던데 진짜 걔 친구 있냐? 누구냐?"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는 꼴에 열이 뻗쳐서 벌떡 일어나 "내가 걔 친군데, 왜?" 라며 쏘아 붙이자 일진들은 장애인 친구라며 나를 비웃고 조롱했다. 하나도 부끄럽거나 창피하지 않았다. 그저 짓궂은 노는 아이들이 너같은 애도 친구가 있냐며 시비를 걸 때 당당하게 내 이름을 대며 친구라 말했을 그 아이가 떠올라 귀엽고 뿌듯한 마음에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래, 우리는 친구였다 그것도 초등학교 3학년부터 친했던.


  나는 결코 착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상당히 이기적이고 극단적인, 소위 지랄맞은 성격에 가깝다. 자기 비하 따위가 아니라 자타공인 그러하다. 타고난 인성이 개차반인 내가 그나마 조금은 똑바로 된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건 엄마의 훈육 덕분이다. 어릴 적부터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엄마의 때로는 엄한 가르침 아래 성장하면서 양보와 인내, 포용과 사랑이라는 가치를 주입식으로 교육받았던 덕에 나는 초등학교 시절 만난 그 아이를 억지로라도 안아줄 수 있었고 소세지 계란부침에 용감하게 젓가락을 갖다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 덕분에 어쩌면 내가 평생 모르고 지나쳤을 특수학교 아이들과 그 가족들에 대해 한 번 더 관심을 갖고 살필 수 있게 되었다.


  2021년인 지금도 어떤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다니는 학교에 자폐아나 경계성 지능장애를 가진 아동들이 입학하는 것을 반대하고 꺼리며 나아가 배척하기까지 한다.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보다야 사정이 나아졌다지만 아직도 우리 나라엔 특수학교와 특수학급, 그리고 특수교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아이를 특수학교에 보내기 위해선 치열한 경쟁의 추첨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마저도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태반이라 길게는 왕복 3시간씩 등하교를 해야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일반학교에 아이를 보내면 다른 학부모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히거나 아이가 따돌림을 당하는 등 현실을 더 아프게 마주해야 한다. 어떤 장애아동의 엄마는 더 중증의 아이들이 특수학교에 갈 수 있게 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거동이 가능하고 장애 정도가 경미한 아이들을 일반학교에 보내며 이기적인 부모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현실을 토로하기도 했다. 가슴 아픈 일이다.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아이들 학교에 장애아동이 입학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들도 모두 사랑이 부족하다. 우리는 사랑이 부족한 세상에 살고 있다.




  소세지 계란부침을 싸오던 내 친구는 점점 상태가 나아져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더이상 책에 가래를 뱉지 않았고 멀리서 내가 보이면 재빨리 손을 올렸다 내리며 입술을 달싹여 '안녕' 이라고 인사도 해 주었다. 중학교 역시 무사히 졸업하고 우연찮게도 내가 진학한 외국어고등학교와 같은 재단에서 운영하는 여상에 입학해 고등학교 시절에도 오며 가며 자주 마주치고 인사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변화는 전적으로 그 아이 부모님의 헌신과 그 아이의 노력에 의한 것이지 결코 비자발적으로 시작했던 나의 사랑해 포옹과 함께 했던 점심 시간 덕분은 아니겠지만, 그 아이가 학교와 나아가 사회에 적응하는 데 나 역시 아주 작은 부분 기여한 바가 없진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 아이를 통해 내가 얻은 것이 훨씬 더 많다. 잘못하면 소시오패스가 되었을 지도 모를 냉정하고 이기적인 외곬수가 그 아이와 초중고 학창 시절을 함께 하면서 나와 다른 사람, 나보다 약한 사람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배웠으니 이보다 값진 선물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 내게 그 아이는 자폐아나 장애아동이 아니라 그저 조금 특별했던 소녀로 기억된다.


  최근 친정 동네에 들렀다가 여전히 그 동네에 살고 있는 그 애를 보았다.

길거리에서 마주쳐 반갑게 인사하며 근황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는데 작지만 탄탄한 회사에 취업해 일하고 있으며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다고, 고수 머리를 깔끔히 빗어 하나로 묶고 여전히 피부가 흰 그 아이가 말갛게 웃는다. 여느 동창들과 그렇듯 서로 살기 바빠 그 날은 그렇게 헤어졌지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같이 밥 한 끼 하고 싶은 마음이다. 아예 너희 어머니가 해주시던 소세지 계란부침을 싸오라고 해서 우리가 다니던 초등학교 운동장에 앉아 함께 도시락을 까먹는 것도 재미있겠다. 띄엄띄엄 한 마디를 겨우 하던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제법 전보다 커진 목소리로 전보다 길게 대화를 이어 나가는 조금 특별한 내 친구와 나눌 이야기가 아주 많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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