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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한사람 Oct 18. 2019

712

괜시리 숫자를 탓해본다.




712라는 숫자를 다 지워내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지워나가야 할 지 모르겠다.


고등학생때 없는 돈에 고모부 눈치를 보며 880712.com라는 도메인주소를 휴대폰 소액결제로 구매 후, 매일 밤낮 인터넷 속을 헤매며 혼자 연습한 서투른 솜씨로 개인 홈페이지를 디자인하고 코딩을 했었다. 어른들이 가득한 커뮤니티에 설레는 마음으로 공유하고 칭찬해주는 댓글에 행복했다.


어두웠던 내 밤하늘을 빛내줄 별을 쫓아

어른이 된 나를 기대해도 된다는 가능성을 허락받은 것 같았다.

살아가다보면 행복해질거라고.


반딧불이가 가득한 극장 애니메이션을 보았었다. 전쟁통에 부모를 잃고 서서히 세상으로부터 참혹하게 버림받아 죽어가는 어린 남매의 이야기였는데도 너무 예쁘고 아파서 인상적이었다.

아프기만 하지 않고, 예쁠 수도 있구나-하고.


사람들은,

어른들은,

아이들은,

늘 행복하지 않았다.


그야 늘 그럴 수는 없는 게 맞는데, 어쩐지 힘이 빠져나갔다. 늘 불행한 시간들을 견뎠던 만큼 작은 행복을 촘촘히 채워가다보면, 조금 긴 행복이 내 안에 머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현실이 어떤지도 춥고 배고프고 부끄러울 정도로 사무치게 알았지만, 그래도 애는 애였나보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게 되서도 싫어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생일이 다가오면 그렇게 알 수 없이 힘들어서 페이스북을 7월이 다가오면 비활성화하곤 했다. 크고 작은 호의와 예의로 내 생일을 축하하는 글이 적히는 것도 무서웠고, 그 분들의 호의가 감사해서 애써 기뻐하는 글자를 밑에 달아두고나면 눈물이 났다.

왜 사람은 태어난 것이 축하받을 일일까.

난 축하받을 만큼 온전한 어른이고, 살아있어도 되는 사람인걸까.


아무것도 나눌 것이나 함께할 것이 없는 결혼을 식없이도 좋다며 24살에 했었다.

아무것도 없던 내게 사람이 생겼고, 일과 직장이 생겼고 동료와 선배들이 생겼다.


그래서 우려하던 목소리에도 나는 꿈을 꿨다. 어떤 결혼인지 내 자신이 제일 잘 알고있고, 우린 잘 해낼 것이라고 믿었기에 불안은 커녕 벅차올랐다. 다 가진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했고, 이러려고 내가 살아남았구나-싶었다.


동갑내기 새신랑은 결혼식이나 예물은 커녕 내 생일 선물도 챙겨줄 수 없다며 고개를 떨궜고, 그런 그에게 확신과 사랑을 주고 싶어서 내 생일날 구청에 혼인신고를 하는 것 자체가 내 일생의 선물이라며 새신부는 행복해했다. 그 때의 그 어리석은 내 자신에게 돌아가 그러지 말라고 했어야했는데. 너무 일찍 서로가 감당하기 힘든 것을 내가 부추겼는지 모르겠다.


지난 10년 남짓을 탓하기엔 너무 긴 시간과 그 안에 지금 슬픔과 상실에 갇힌 사람 둘이 생겼다. 부부인 기간의 잘잘못을 굳이 따져 묻는 일도 모두 의미없다고 느끼게 되었다. 왜냐면, 상대를 질책하고 원망하고 울어도 점점 더 그 자리에 있던 사랑만 흩어질 뿐, 누구하나 더 마음이 편하지 않았거든.


처음부터 그렇게 단언하며 자신했던 그 때의 내 어리석음만이 그저 크게 후회되어 내 자신을 책망하기를 반복하게 되었다.


나는 하루에도 여러번 의미없이 내 손바닥을 펼쳐 내려다 보곤 한다.

무언가 분명 한웅큼 잡혔던 것 같았는데, 온데간데없이 어디 갔을까.

신기루였을까,

도깨비 불이었을까,

반딧불이는 제 명에 죽은걸까,

내가 이상해진걸까.


나는 내가 좀 더 멋지고 쓰러지지 않는 어른이 될 줄 알았지.
일을 하고 나이가 들고 연인이, 내 가족이 생기면 세상을 다 얻을 수 있을 줄 알았어.


결국 나의 어리석음이 간신히 버텨내왔던 컵에 마지막 한방울을 채우고 넘치게 한 거야. 누굴 탓할 수 있겠어. 여기서도 내가 일어나서 다시 평범하기 위해 당장 코앞의 생계를 최우선으로 하던 시절로 돌아가 살면 될 일인데, 그러지 못 하는 건 나 자신인걸.


그러니까,
나는 이 숫자를 지우고 싶어.




Photo by Curtis MacNewto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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