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흔한사람 Nov 12. 2021

11월 11일은 하루가 아니다

본드맛 나던 빼빼로를 잊지 못 할 어른이 둘


이제는 각자의 집에서 문을 열고 나와

휴일을 맞추고 데이트하는게 익숙해진 30대 초중반이 된 나와 여동생.


지난 데이트에 백화점부터 편의점까지 빼빼로와 초콜릿들이 잔뜩 꾸미고 나와있는 것을 보다가 내가 먼저 흘렸다.


난 빼빼로 하면 본드맛 나는 빼빼로밖에 기억 안 나. 우리 어릴 때 우리 ㅇㅇ가 받아 온 빼빼로.


내가 흘린 말에 잠깐의 뜸을 들인 동생이

씁쓸한 미소를 띈 채 말을 이어갔다.


..언니, 나는 사실 본드맛 나는 빼빼로 생각하면 맘이 좀 그래. 언니한텐 아빠가 무서웠던 날이지만 나한텐 다정했던 날이었거든..


그 빼빼로는 내가 고1, 동생이 중3때 학교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인기가 대놓고 많았던 여동생이 남학생으로부터 받은 빼빼로였다. 동생에겐 그게 너무 커서 아빠가 학교까지 와서 같이 가지고 집에 와줬던 다정한 날이라고.


더 어릴 때 수년간 왕따를 당해 본 나는 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그게 사소하든 버거운 일이든 친구들이 우선일때가 대다수였다. 친구가 좋아하던 오빠에게 빼빼로 전달하러 갈 때 용기가 안 난다하여 늦은 밤 동행을 했었고, 얇은 교복에 집업 하나 걸치고 낯선 동네에서 친구가 돌아오지 않아 거의 서너시간을 혼자 기다렸었다. 마침내 웃는 얼굴로 돌아온 친구를 보고서야 안심하고, 새벽 2시가 넘어서야 다시 걱정을 안고 현관문을 열었던 날.


통금이나 외박에 무심한 집이었지만, 한창 아빠랑 병원을 갔던 일이라던가 맘 놓고 안도하며 지낼 날이 드물었다. 불꺼진 거실에 이부자리 펴놓고 앉아있던 아빠의 안경이 TV빛에 반사되어 아빠의 눈이 보였다. 나도 아빠도 한 마디 하지 않았기에 그간의 아빠처럼 화났을 거라 생각하고 무서워서 방으로 들어갔었다.


빼빼로는 나와 여동생에게 아빠와의 마지막 기억 매개체다. 그리고 항상 나보다 좀 더 담백하게 표현하던 동생이 말하길, 원래라면 아무리 본드로 붙였어도 그렇게 모든 빼빼로에서 본드맛이 나지 않을 거라고.


아빠 장례식에 이어 사건 수사를 하고 엄마가 구금되고 우리끼리 살 작은 전세집으로 주택공사에 도움을 받아 이사하기까지 꽤 긴 기간 방치되었었다.


그런 빼빼로를 우리는 어른이 없는 집에 살게 되며 먹을 것이 여의치 않으니까 본드맛이 그렇게 심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먹었기 때문에 이렇게 기억에 오래 남는거라고.


기억이 완전히 같진 않아도 공명하거나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때로 나같은 언니가 있어 너무 잔인한게 아닐까 미안하기도 하다. 지금 이렇게 내가 글로 우리가 함께 있었던, 내가 느꼈던 일들을 남기는 것을 찾아보게 되면 분명 어렵사리 덮어두고 견디던 기억과 감정들까지 강제로 재방송 될텐데.


나이가 들수록 너무나 소중한 내 동생들, 특히 연년생의 둘째에게는 여러모로 그래서 더 미안하다. 어떤 말과 상황, 무엇들을 조심하면 좋겠냐고 가끔 물어보는데 늘 또 괜찮다고 한다. 언니가 나보다 더 많은 일이 있었고 몸도 아프지 않냐고. 나는 너의 아픔을 면밀히 모를텐데, 매개체들을 대뜸 연결시키곤 할텐데.


근래 더 잔잔하고 건강한 마음을 갖기위해 고민하는 이유는 9할 이상 내 동생에게 건강한 존재이고 싶어서이다. 사랑하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어쩌면 모른다는 이유로, 크고 작은 감정폭력들을 휘두르고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관계라는 것들이 주고받는 시간과 말과 마음에서 종종 불협화음과 어긋남을 가지는 것임을 알고야 있지만, 동생들의 삶에서 조금이라도 더 크고 예쁜 나무가 되고 싶다. 이미 둘째는 내 마르고 삭막한 길을 환히 비추고 지켜주는 아름답고 큰 플라타너스 나무이다.


모든 것들이 순탄하거나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알지만, 그래도 한 숨, 한 뼘, 한 톨, 한 발자국이라도 더 너를 위한 세상들이 주변과 오늘과 내일에 열려있으면-하고 간절히 바란다.


벼랑끝에서 언제나 나를 격려하고 지켜줘서 고맙단 말을 하기엔, 어쩌면 듣는 이에겐 숨이 막히고 무거운 일일 것이다. 데칼코마니의 삶을 살아온 미지의 동생이기에 산뜻하고 잔잔하게 말하고 생각하고 싶다.


사랑한단 말은 너무 쉽고 하찮고 성의가 부족하다고 느껴. 우리 동생 매일에 먹을 것 입을 것 웃을 것 평온할 것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이 차고 넘쳤으면 좋겠어. 갖고싶어하는 물건들의 가격표가 전부 깜찍해질만큼 너의 통장에 숫자가 가득했으면 좋겠어.


충분히 차고 넘치게 너무 잘 살아주고 해내는 너의 마음이 지칠대로 지쳐서야 무기력하게 쉴 일 없게. 서로를 위한 수많은 배려로 중요한 것들을 참게 하거나 놓치지 않게 더 좋은 가족이고 싶어.




어느새 내 인생에서 아빠가 있던 시간은 절반이 되었어. 아빠 판박이 큰 딸 서른넷이야. 여전히 괜찮은진 잘 모르겠는데 그래도 하나는 확실하더라. 보고싶고 이제는 좀 아빤 잘 지내는지 종종 궁금해. 내 또래엔 드물게 형제가 둘이나 있어서 감사하더라. 잘 지낼게, 시간이 닿아지면 그 때 만나! 아빠를 위한 편지로 닿을 순 없지만, 날 위해 남겨볼게. 아프지말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