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흔한사람 Jul 06. 2016

끝나지 않는 겨울의 일기 _미완

첫째인 내가 동생들에게 안기기까지.



이해.


삼남매 각자의 입장이 있겠지만, 일단 나는 조용히 혼자 일기 쓰듯 쓰고 있기 때문에 이 곳의 글 속엔 다소 내 입장뿐이겠다. 모든 사람 관계에서 이해란 것은 결국 내 눈으로 보고 내 가슴으로 느끼고 내 머리 안에 갇힌 상상이다. 내 것과 네 것이 같지 않아도, 감히 이해하지 않아도, 드라마 같은 대사를 하지 않아도, 그냥 그랬구나- 끄덕끄덕, 눈을 맞추고 제대로 들어주는 것만 한 위로와 평화가 없다고 나는 동생들로부터 절감했다.






20대 초반까지는 동생들과 아등바등 살면서 똘똘 뭉치고 서로 의지하며 힘을 나눠도 모자랐을 텐데, 우리들 사이는 굉장히 소원했고 싸늘했으며 한 방에서 자는 우리들 마음의 거리는 남북 분단보다도 멀 지경이었다. 심지어 연년생인 둘째와 난 성향도 성격도 표출하는 방법도 너무 달랐다. 나는 상처받을수록 도망치거나 혼자가 되는 것을 선택했고 일에만 몰두했고 말을 삼켰다. 둘째는 상처받을수록 사람들과 어울려 놀고 여럿에 섞이는 쪽이었으며 하고 싶은 말은 뱉어야 했다. 우리에겐 세상에서 오직 서로들 뿐인데도, 어렸던 서로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거니 받거니 했던 것 같다.


나와 둘째는 연년생 자매이고 막내는 나와 6살 터울이다.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우리 자매의 성향이나 성격이 거의 흡사했다. 혹시 달랐더라도 취향이나 의견 일치가 그럭저럭 되었기 때문에 나름 평범하게 지냈던 것 같다. 같이 왕방울 눈의 세일러문 전사들 그림을 그리고, 학교 합창단에 섞여 노래도 하고, 깊은 신앙과 믿음처럼 두루뭉술하고 어려운 것보단 매주 주는 간식과 팬시용품에 끌려 그 또래의 흔한 이유로 교회도 함께 열심히 다녔었고, 해가 지도록 놀이터에서 동네 친구들과 함께 얼음땡, 술래잡기 등의 놀이를 했었다. 놀이터에 흐린 날 빼고 항상 단내를 솔솔 피워주시던 뽑기 할머니네 단골이었다.


그랬던 사이가 점점 소원해지기 시작하더니,

같은 집 같은 방에 자면서도 우리는 거의 대화를 하지 않거나 서로의 학교생활에 관심이 없어지며 특별히 스칠 때마다 으르렁 거리진 않았지만, 동거인보다 못 한 밋밋하고 건조한 사이가 되었다.






왕따 언니.


둘째는 연년생이지만 이사를 많이 다녔던 환경 때문에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나와 학교가 계속 달랐다. 굳이 너네 언니가 이런 왕따라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1학년까지, 합 3년을 같은 반 동성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하며 묵묵히 따가운 말들과 차가운 시선을 견뎌내고 있었고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말하기보다 혼자 일기를 쓰는 것으로 스스로 위로하고 있었다.


혼자 급식 먹는 모습을 보면 더 신나서 들렸을 말들을 피해 아까운 무상급식 대신 운동장이나 복도에서 과자로 점심을 대신했었다. 합창단을 하며 친구들의 목소리에 내 목소리가 섞이는 그 화음에서 오는 짜릿함에 반해 노래하는 게 무엇보다 즐거웠다. 따돌림이 심해진 때에는 선생님이 합창단 소속인 내게 교단 앞에서 노래를 시키면, 여자아이들은 내가 한 마디 한 마디 부를 때마다 도돌이표 노래처럼 메아리로 마디마디 따라 하고는 큭큭 거렸다. 나는 그 뒤로 멍석 깔린 자리에서는 도저히 노래할 수가 없으며 엄청난 음치가 되었다. (그런 트라우마로 생긴 흑역사가 사회생활하며 두어 번 정도 있다. 꿈이었으면 하고 아직도 자려고 누웠다가 벌떡 일어난다.) 좋아하던 노래를 혼자 부르고 혼자 듣게 되었다.


과자를 들고 다니던 내가 반에서 겉돌던 두세 명으로 이뤄진 그룹 아이들과 과자를 나눠먹을 때면,


"과자로 친구를 사귀네. 어울린다ㅋㅋㅋ"


라고 하거나,

초등학교 놀이터 시절부터 친했던 남자아이들이 말을 걸어줘서 기쁜 맘에 대답하면,


"쟤봐, 이젠 남자한테 웃음 판다"


같은 말도 서슴없이 내 뒤통수에 꽂았다.

여자아이들 특유의 대놓고 폭력적이진 않지만, 나 같은 한 명쯤은 반에서 쉽게 죽여버릴 수 있는 말들이었다. 덕분에 성별 상관없이 놀이터 땡볕에 어울려 노느라 주근깨순이가 되고, 학교 합창단도 부족해서 학교 합창단 지휘 선생님께 감사히 제안받아 국내외 한국 민요 공연을 하던 색동 합창단 활동도 할 정도로 외향적인 것들에서 즐거움을 느꼈던 나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특별히 노래를 잘 하진 않았고, 그렇게 멋진 화음의 일부를 내가 채울 수 있다는 것이 좋아서 내 파트와 다른 파트를 잘 구분하는데 집중했었다. 아직 어린 초등학생들이었다보니 중간에서 짜부되어 헷갈리기 쉬운 중간음 파트를 주로 잘 지켜서 칭찬해주셨고 꼬박꼬박 잘 나오고 좋아하는 것 같아서 이것도 더 해볼래 하는 맘으로 권유해 보신 것 같다.) 그저 호칭일 뿐인 "오빠"라는 말조차도 눈치 보느라 하지 못 하게 되었다. 사촌에게까지도 말이다. 어릴 때는 깐죽대고 싶어서 이름을 불렀던 건데, 나는 어느새 사촌에게도 설에는 반말을 하고 추석에는 존댓말을 하거나 말을 걸어야 할 땐 "저기.."로 시작하게 됐다. 다행히 지금은 "형"이라는 호칭을 대신 사용하며 입에 오히려 잘 붙고 마음이 편해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친한 친구 몇에게 당시 유행하던 MRK라는 편지지 잡지 같은 걸 달마다 사서 특이한 편지지에 편지를 써서 주거나 유행 지난 카세트테이프에 내 목소리로 편지를 담아 주곤 했는데, 엄마가 그 친구의 전화를 차갑게 끊어버린 뒤로 나는 제일 친한 친구에게도 따돌림을 당했다. 엄마는 특별히 내 성적이나 통금에 관심이 없었는데 동네 또래에게는 일명 잘 나가고 예쁜 그 친구를 싫어했었다.


비록 반 아이들에게는 나는 왕따였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제일 친했고 옆반이었던 그 친구에게 엄마 때문에 상처받게 해서 미안하고 너란 친구를 정말 좋아한다는 편지를 또 정성스레 쓰고 전하고는 미안한 게 전해질까 받아줄까.. 기대반 걱정반으로 기다렸었다. 상냥하게 웃는 얼굴로 따라오란 말에 '받아줬구나!'라는 기쁜 발걸음으로 화장실로 따라갔었다. 하지만, 내 우스운 바람과 달리 내가 처음 보는 아이들과 함께 날 에워싸고 내가 쓴 편지를 내 눈앞에 들이밀며 이 딴 것 좀 쓰지 말라며 찢어버렸고, 처음 보는 아이들은 날 동정 혹은 괄시하는 표정을 주고는 우르르 나가버렸다. 쉬는 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리고 화장실엔 고개를 떨군 나와 찢어진 편지지만 초라하게 떨궈져 있었다.


그 뒤로 한동안 나는 반에서 뿐만 아니라, 학교 안팎 어딜 가도 보이고 눈에 띄던 친구 A와 학교 제일 무리들에게 무서운 눈총과 놀림을 받았다. 나중에 화해하고 전처럼 반에서 당하던 왕따와는 별개로 친구 A와는 잘 지냈다. 학교에서 나름 절대적인 권력 같은 게 있던 친구 A에게 특별히 내가 처한 상황을 토로하진 않았다. (지난번 글의 그 친구 A가 맞다.) 이런저런 일들로 나는 점점 더 말을 아끼고 남이 욕하거나 날 싫어할 재료가 될만한 행동과 말을 삼가게 되었다. 말과 행동을 한 뒤엔 늦어도 그날 밤 꼭 몇 번씩 되짚어보며 실수한 것은 없을까 걱정하며 잠못이루었다.





그런 나와 둘째는 너무도 달랐을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둘째는 그 친구처럼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중심에 서있고 인기가 많은 학생이었다. 답답하도록 소극적인 나와 둘째는 그 나이 때 여자아이들 답지 않게 거칠게 싸우기도 했으며, 부모님 사건 이후에는 더 심각해졌었다. 나약해빠진 나는 세상에 우리뿐임에도 그런 관계에 질려 동생들 보기 부끄럽게 멍청한 생각이나 한심한 짓거리도 했었다. 23살에 가출도 했고 말이다. 동생도 나도 서로에게 질세라 예외 없이 무서운 행동을 했다. 자세히 쓰기가 망설여질 정도로. (당시엔 굉장히 무서운 기억이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렸던 우리가 매일 보고 자란 극단적인 모습들처럼 자신과 상대를 몰아가서는 양날의 검을 쥔 듯이 함께 상처받는 그런 것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었던 것 같다..)


첫 번째 취업 후 나는 직장에서 내 역할이 있고, 급여라는 보상이 있는 사회생활에 너무나 감격하고 행복해하며 집착했던 때로, 그 행복과 기회에 엄청난 집착을 부렸다. 그래서 일하느라 사무실에서 밤새거나 자는 것도 꺼려하지 않았었고 처음으로 내 건강상태를 무시한 채 매달렸는데, 결국 얼마 못 가서 나는 지각도 결근도 회사에서 제일 많이 하는 제일 어린 한심한 사원이 되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막내는 특별히 폭력적이거나, 성인 흉내를 내는 건 아니었으나 나로서는 더욱 상대하기 어렵게도 계속해서 학교에 가는 대신 가계부 공책에 끼워진 우리 삼남매 한 달 생활비나 내 지갑 등에서 돈을 훔쳐 PC방에만 갔었다. 게임하는 것 외에는 말수도 표정도 없는 인형 같았다. 제일 어렸던 막내에게 우리들이 겪은 일이 어떤 식으로 영향을 줬고 나타냈는지 나는 짐작은 하면서도 납득을 해주지 못 했고, 공감해주지 못했다.


나는 며칠씩 아파서 쉬게 된 날이나, 멀쩡히 출근했어야 할 날, 대충 둘러대고 막내를 찾으러 이 동네 옆 동네 PC방이란 PC방은 다 뒤지러 뛰어다니곤 했었다. 양천구 신정동에는 왜 그렇게 PC방이 많은 건지, 불만이 많았고 속이 타들어갔다. 막내의 담임선생님으로부터 계속 이러면 정학은 물론이고 자퇴를 권유받았기 때문에 이제 막 스무 살이었던 나는 내가 어떻게든 막내를 제대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강남 역삼역 근방에 위치했던 회사에 출근해 있다가, 부랴부랴 강서에 위치한 막내네 학교 교무실로 쫓아가서는 온갖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을 꺼내어 사정사정도 했다.


겨우 찾아 집에 데려와서 추궁을 해보아도 입을 절대 열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막내에게 답답함 위에 남들처럼 당연히 해내야 할 근태에서 한없이 뒤떨어짐에 좌절하던 것까지 그대로 보태어, 막내에게 대체 왜 나를 괴롭히는 거냐며 뺨도 때려보았고, 앉혀놓고 허벅지를 한대 때리고선 "하루하루 배로 매의 횟수를 늘릴 테다" 학교 선생님의 훈육을 흉내 내며 으름장을 놓아도 보고, 결국 어린 남동생의 허벅지를 수십 번 내리치게 되는 지금의 후회 중 하나를 남겼다. 맞는 건 동생인데 때리려다 말거나 내가 때리고선 제풀에 악을 쓰고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이때는 둘째와도 가장 심각했던 상태로.. 굳이 표현하고 싶진 않다. 몇 달간 그런 식으로 지속되다, 충분히 불성실해 보였을 스무 살짜리 사회초년생은 첫 직장으로부터 더 이상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문자를 받았다. 그 문자를 받았던 날은 엄마 면회를 위해 청주에 가던 길이었다.


몇 달에 한 번 청주에 있는 교도소로 면회를 갈 때마다 엄마의 얼굴엔 주름이 눈에 띄게 깊어지고 죗값이 내려앉은 초라함과 후회, 우리들을 향한 미안함과 그리움이 짙어졌다. 세상으로부터 외면받아 마땅한 그런 엄마라도 하나뿐인 그리운 엄마였기에 우리끼리라도 잘 지낸다며 안심시키는 말을 목메임을 진정시키며 15분의 짧은 면회시간에 쫓기며 이어갔다. 그러다 유리벽 너머 엄마로부터 대견스러움과 걱정을 담은 "회사는 잘 다니고 있고?"라는 말을 듣고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이 서러워 울 수밖에 없었다. 회사나 직장 선배들로부터 서러웠던 것은 아니다. 단지 내 자신의 상태와 우리 가족의 모습이 서러웠다.






이후로도 감정의 골이 헤아릴 수 없이 깊어져 어떻게 해야 할지 걷잡을 수 없어졌던 둘째와 내 사이는 결국 한 번의 큰 내 발악으로 수중에 현금 10만 원 달랑 들고 23살이란 가출하기엔 늦은 나이에 최고조에 달했다. 우리마저도 엄마 아빠처럼 끝을 향해 떨어져 가는 것 같아 무서우면서도 입밖으로 '하.하.'하고 비약하며 웃어버렸다. 박스 몇 개와 현금 10만 원으로 갈 곳도 없이 일단 택시부터 잡아 친구네 가게 창고에 박스 몇 개를 잠시 맡아달라 부탁한 뒤, 가출 첫날은 찜질방에서 밤새 비치된 컴퓨터로 서울 안에서 무조건 싼 자취할 곳을 찾았다.


막 부랴부랴 짐을 싸서 현관문을 벗어나는 동안 둘째는 라면을 끓여 후후 불어 배를 채웠고, 내 쪽은 봐주지 않았다. 기세 좋게 가출하면서도 그런 둘째를 눈에 담는 것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쓰라렸고 쓸쓸했다. 택시를 무작정 잡을 때 지랄 맞은 누나들이 싸우던 울던 똥을 싸던 무관심해 보이던 고등학생 막내가 초라한 큰누나의 가출 상자 몇 개를 집어 들고 따라나와 물었다. "갈 곳은 있는 거야?"라고. 그 높낮이 없는 막내 특유의 한마디가 그때만큼은 큰누나에겐 엄청난 밀물로 훅- 들어왔다. 물어봐줘서, 따라나와 줘서, 고맙고 미안했다. 내가 아는 한 우리 막내는 이만큼 한 거면 예상치 못 하게 정말 많이 표현해 준거였다.


그렇게 그 주는 당시 다니던 회사에서 일부러 밤새 일하거나 휴게실에서 잠을 자고 머그컵에 물을 담아 회사 화장실 세면대에서 머리를 감으며 버티고, 회사를 안 가는 주말엔 지하철을 일부러 반복해서 종착역까지 타며 잠자는 시간을 메꿨다. 첫 자취방은 고시촌 녹두거리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보증금 100만 원에 공과금 포함 월세 44만 원인 집이었다. 우발적인 자취시작이었고 여력이 없었던 나는 덜컥 필수 가전집기가 풀옵션인 그 얇은 벽의 원룸이라 부르는 고시원에 들어갔다. 일반 빌라 개조로 방마다 철제문이 달려있었지만, 신발놓을 공간도 없는 장판깔린 1인 너비의 복도에 대롱대롱 달린 방이었다. 당시 급여가 140여만 원이었던데다가 보증금 100만 원도 없었기에, 별수 없이 회사에서 가장 마음으로 존경하던 분께 사정을 말하고 급여를 가불 받았던가.. 빌렸던가 하는 민폐를 바탕으로 마이너스지만 자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차라리 시원했다. 뭔가 걱정들과 동생들 얼굴이 머릿속에 밀려 올라올 것 같으면 혼자서 고개를 휘휘 저으며 떨쳐내고 스스로 '이걸로 된 거야, 충분해.'라며 최면을 걸었다.






우발적인 자취는 당연히 쉽지 않았다.


계약한 집은 병원 침대에 딸린 보조침대 같은 것 하나가 있었고, 한두 사람 누우면 숨이 막힐 만큼 작았다. 그런 공간에 기특하게도 싱크대와 화장실이 있고 고시촌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창문 하나 있는 게 기뻤다. 허락된 "내 것" 같았다. 가져온 옷들로 베개와 이불로 삼고 추위에 웅크려 잠들었고, 헤어드라이기 같은 것이 없어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긴 머리로 귀신처럼 출근을 하고, 얼마 없는 전재산이 든 지갑을 둘째 날 잃어버리는가 하면, 이제 막 이사와 괴한에게 쫓기느라 지리도 모르는 고불고불한 좁은 골목길이 가득한 고시촌을 홀로 헤매기도 하고, 밤사이 내린 눈으로 출근길 200m에 육박하는 내리막길에 엉덩이를 실컷 내어주었더니, 퇴근할 때는 더욱 미끈해져서 10미터도 못 오르고 힘없이 미끄러지다가 신발을 벗고 맨발과 두 손으로 네발을 사용해 발악도 하고 몇 시간째 이 악물고 반복하다 지쳐서는 새벽 두 시에 둘째에게 전화해 펑펑 울었다.


그렇게 살풍경하게 헤어지고 일주일 만에 보는 거였나.

이때 둘째는 당장 필요한 현금을 가지고 회사 앞까지 찾아와선 처음으로 내게 "미안해"라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나에게 더 많은 표현으로 "여기 언니 편 있어"하고 표현해주고 있지만, 당시 우리 사이에 동생이 꺼낸 그 한마디는 굉장히 어렵게 꺼낸 말로, 잠시 멍 때릴 만큼 내 두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나는 밤새 날 괴롭히고 울게 했던 눈길이 하루 사이 말끔히 길이 되어준 것처럼, 무언가 가슴 안에 날 먹먹하게 하던 응어리가 녹아내림을 느꼈다. 그렇게나 외로움과 서운함을 느껴 가출까지 하게 한 동생의 한마디에 무교로 굳혀졌던 나는 '구원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하고 고마웠다.






변화.


항상 혼자 터벅터벅 이번엔 무슨 소릴 들을까 넘치는 긴장과 이번엔 또 얼마가 깨질까 두려움으로 얼룩지고, 꺼진 지 오래인 희망의 매캐함을 품고 가던 병원이었다. 그건 여전하다. 더 이상 충격받진 않지만, 쉽게 기대를 걸어보거나 적극적이지 않게 되었다. 얼마나 더 나빠진 걸까- 확인하는 정도로만 받아들이면 더 이상 실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던 몇 년 전 대뜸 둘째가 따라가고 싶다고 말을 꺼내어 둘이서 가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병원 갈 때마다 보호자나 연인, 친구와 기다리는 다른 환자들을 눈으로 좇아보며 쓸쓸해하곤 했기에 그런 제안에 '지루할 텐데.. 매번 거의 똑같은 얘기랑 패턴인데 무리해서 안 챙겨줘도 돼. 정 같이 가주고 싶으면 근처 카페에서 기다려줘도 충분해'라고 애써 사양하면서도 괜찮다고 밀어붙이는 둘째의 넉살에 못 이기는 척 숨길 수 없이 기뻤다.


항상 그렇듯 환복하고 혼자 병원을 바삐 돌아다니는 내 모습을, 둘째는 대기 의자에 앉아 빠짐없이 지켜봐 주며 내게 예쁜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내주었다. 그런 병원 풍경이 낯설면서도 기쁘고 뭉클함에 힘을 얻어 이리저리 끌려다니듯 다니던 발걸음에 기운이 찼다. 그러다 잠깐 시간이 비어 의자에 나란히 앉아서는 처음으로 제대로 귀 기울여주고 있다는 설렘으로 하나씩 입을 열었다.


사건 전후로 중심이 되는 지병들은 대충 동생도 알고 있었지만, 그 후유증으로 인해 면역력마저 바닥을 친다거나 일상이나 내 성격에 변화를 일으킨 여러 가지 이상이 생겼는데 그중 하나로 잇몸이 녹아내리는 정도가 심해져서 검진받을게 늘었다-라고 말을 했다. 둘째는 내게 보여달라고 했다. 원래도 표정이 없다는 편을 듣는 편이었던 나를 더욱더 표정과 대화에 소극적으로 만들었던 잇몸을 살짝 아랫입술을 내려 동생에게 보여줬다. 그런 내 상태를 처음 확인하고는 둘째가 바로 그 순간부터 아까운 눈물을 펑펑 쏟아 흘리며 나더러 '이렇게 될 때까지 놔두면 어떡하냐 멍청한 언니야'라며 동생다운 말투에 괜한 미안함을 담아 울었다. 그 모습에 되려 나도 놀라고 어쩔 줄 모르면서도, 동생의 눈물에 너무 고맙고 위로를 받았으며, 둘째가 날 대신해 울어주는 천사처럼 보였다.







여전히 커다란 가슴 구멍에 빈 바람소리가 울릴 때마다 나약하게 흔들거리는 작은 우리들이지만, 어느덧 우리는 서로에게 미안하고 고맙고 해주고 싶고 나누고 싶은 것이 많은 평범한 가족으로 자라 있었다. 우리는 남매이면서 같은 부모 아래 같은 환경 아래 자랐음에도 "각자의 아픔이 다를 수 있음"을 이해했다. 각자의 가슴에 새겨진 상처와 흔적들의 빛깔과 깊이를 공감할 순 없어도 막내는 막내대로, 둘째는 둘째여서, 첫째는 첫째여서 가지고 있는 생각과 아픔이 있음 그 자체를 이해하려 노력하게 됐다.


그런 감격들이 종종 쉽사리 가라앉고 마는 내 가슴을 데워주고 가볍게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이 만들어 준다.


문득 내키어 글을 올릴 때마다 막힘없이 한 번에 적어 내리고 대충 훑어보고 보이는 한에서 몇 글자씩 고치곤 했는데, 내가 쓴 글들을 되짚어 읽어볼수록 너무 울적하거나 징징대고 지금의 자신을 변명하는 글뿐인 것 같아서 써보는 글이다. 공황장애, 대인기피, 우울증, 만성 스트레스와 불면증 등의 계기는 있을 수 있지만 그걸 점점 깊게 만들거나 헤어 나오지 못 하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조금씩 더디게 받아들이고 있다. 아직 나에게 디자인을 할 기회가 있을 때 늦지 않도록, 보다 나은 내가 되고 싶다-


사실 친척분과의 횡령사건 경위(http://naver.me/FOPJCquP)와 그로 인해 더해졌던 사람을 향한 불신과 고통, 횡령이고 뭐고 조용히 혼자 지방 어딘가에 아무와도 접촉하지 않고 살다 죽어버릴까-라는 생각이 절실하던 걸 국선변호사 분들의 격려와 동생들에게 한푼이라도 보탬이 되길 바라며 시작했던 소송에서 받았던 위협과 협박.. 당연히 쉽게 승소하거나 횡령금의 상당부분 돌려받을 수 있을거라는 전문가들의 말들과 달리 2년여 끝 막판에 1/10만큼을 돌려받고 합의할 수 밖에 없었던 원통하고 허무하고 무력했던 일.. 소극적이고 서툴렀던 사회생활에서의 따돌림이라던가, 기댈 곳 없는 내 처지에 묵묵히 견뎌야 했던 사내 스토킹, 몇 가지 더 우울한 사건사고를 기록하려 했는데, 자칫하면 누군가들을 여전히 원망하고 저주하는 안 건강한 기록이 될 것 같아서 이대로 쓰다만듯이 그만두기로 했다. 간단히 기록해도 머리가 아프고 호흡이 답답해 진다..

(게다가.. 쓰고 보니 이 글도 변명 같은 것들이 많아 보인다.)


누구나의 인생이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언젠가 괜찮은 희극으로 담담히 내 기억들을 받아들여 끌어안고 싶다.

모두가 그 자리에서 안녕하기를,

그리고 그 모두에 나도 포함되기를 소원해본다.


잘 지내요 모두.

매거진의 이전글 쌔크라멘토는 지금 부페 식당 전쟁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