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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존재 Apr 21. 2016

가모장제로 살아가기

노는 남편과 일하는 아내가 잘 먹고 잘 사는 법

함께 휴가를 내고 불가리아 여행을 다녀온 다음 날 남편이 덜컥 퇴사 면담을 했다고 카톡을 보냈다. 

남편은 하고 싶은 것도 없고 꿈이 뭔지도 잘 몰라서 장장 5년 동안 하는 수 없이 열심히 직장 생활을 한 '오대수(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사는 사람)'과였다. 


그는  매사에 굉장히 걱정이 많고 다양한 경우의 수를 꼼꼼히 따지고 돈의 지출에 굉장히 민감한 성향의 소유자인데, 야망 따윈 키우지 않는 아이러니한 마음씨. 집안에서 칭찬만 먹고 자라 성실하고 착한데다가 공부 머리는 있어 남들이 가고 싶은 대학, 남들이 다니고 싶은 직장에 단 순간의 쉼도 없이 이어졌던 터라 명문대와 대기업의 소중함을 잘 모르는 가진자의 여유가 있는 자.


연애 때나 결혼 후에나 남편은 사흘이 멀다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싶고, 힘들다는 소리는 자주 했지만 매우 성실하게 다녔다. 좋은 고과와 성과급을 받아 통장에 숫자 올라가는 재미에 신나했고, 업무가 있으면 주말근무, 평일 야근, 새벽 출근도 잘 해와서 혹시 이렇게 평생 징징거리다 징징이 임원이 되는 건 아닌가... 부질없는 상상을 하기도 했었다.


그랬던 그가 당분간 놀겠다며 회사를 그만뒀다. 


아무 생각 없이 한번 놀아보고 싶어.  


회사에 퇴사를 통보한 날 남편은 내게 말했다. 친동생 같았으면 정신차리라고 꿀밤이라도 날라갔겠지만 아오.. 남편이라 그럴 수도 없고, 치밀어오르는 당혹스러움을 억누르고 꿈이 있냐, 하고 싶은 건 있냐고 물었다.


물론 나도 수차례 이직 경험이 있는 사람인지라 퇴사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앞으로의 계획은 있었는데...


꿈.. 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남편은 전형적으로 부모님이 점지해 주는 숱한 학원을 성실히 다니며 시키는대로 열심히 산 강남 남자였다. 

장래희망으로 뭘 썼냐고 물으니 초등학교 때는 기억 안나고 중학교 때부터 적어낸 직업은 회사원. 


하아.. 이미 이 사람, 꿈은 이뤘는데 별 볼 일 없어 괴롭구나 ㅠㅠ 


컬쳐쇼크였다. 학창시절 난 내가 회사원이 될 거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매년 참신했다. 초등학교 때에는 인디아나존스 영화에 큰 감동을 받아 고고학자, 지질학자를 거쳐, 고학년 때는 아버지의 강권에 과학자로 갔다가, 중학교 때는 재활용처리 사업가로 시작해, 사찰 인근 양궁장에 놀러 갔다가 10점 과녁을 몇 번 맞추면서 양궁선수로 전향했다가, 엄마의 세뇌에 선생님으로 전직했다가, 고등학교 때는 카피라이터, 작가로 흘러갔다가, 대학 때는 드리마PD를 거쳐... 어쩌다 보니 회사원이 되었다.  


단 한번도 학교, 학원, 회사로 쉰 적이 없어.  그냥 좀 놀고 싶어.

남편은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2호선 순환열차를 타며 부모님이 짜 놓은 역의 순서가 뒤바뀐적 없는 인생을 살았다. 성적에 맞춰 부모님과 선생님이 원하는 대학교에 입학, 졸업 직전 부모님과 교수님이 원해서 대학원 진학,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유명 해외 학술지에 논문이 등재되면서 선배들의 추천에 지원해 본 대기업 입사. 원한 건 아니었지만 하다 보니 그렇게 된, 요즘같은 구직난에 열혈 구직자들 들으면 빡 돌 스토리다.


그에 반해 나는 1~9호선을 왔다갔다하며 완행을 탔다 급행을 탔다, 가끔 지하철을 거꾸로 타거나 놓쳐서 걷기도 하면서, 다음에는 지하철을 탈지 버스를 탈 지 걸을 지도 당췌 감이 안 잡히는 인생을 살았다. 서울의 좋은 대학에 가면서 집을 떠나고 싶었으나, 내신 성적은 뒤에서 3~4등을 놓치지 않아 아버지는 내 성적표가 나오는 날이면, 성적표에 양과 가가 많아서 양가집 규수라며 놀렸다.  


그래도 신은 한 인간을 버리지 않았다. 지방에서 글 좀 쓴다는 소리 들어 글과 관련된 상을 좀 받고 내신은 버리고 수능에만 집중한 결과 예체능계열로 구사일생되었고 원하던 대학에 겨우 턱걸이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신이 나에게 베풀던 가호는 길지 않았다. 천재들 사이에서 치이던 중에 가세는 급격히 기울어 살리에르의 마음으로 하루에 레쓰비 5캔씩 까며 악착같음으로 버티며 장학금은 받았으나 매년 학자금 대출로 생활비와 남은 학비를 보조 받으며 겨우 대학을 졸업했더니, 예술대 학생들은 평범한 월급쟁이가 도무지 될 수 없었다. 왜? 취업 준비를 안 했으니까. 대학 졸업장을 받을 때까지 공채가 공무원 시험인 줄 알았으니까. 찰나의 인맥까지 동원해 계약직부터 시작, 중소기업을 몇 번 이직하며 아직도 버티고 있는, 내 전공 계열에서는 부르조아, 일반적 내 또래 커리어에서는 아주 평범한 이력의 소유자다. 밥벌이의 소중함은 매우 잘 알고,  휴가와 복지, 칼퇴에 일희일비하는 미생이기도 하다.


남편은 당분간 거하게 놀겠다며 그만둬 놓고, 양가 부모님이 알까봐 두려워하는 이중적 모습은 살짝 짜증 났지만, 대책없이 놀아보겠다는 패기 하나는 높게 사서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마냥 놀아 본 적이 없어 대책 없이 노는 것에 대한 공포심을 갖고 있던 난, 얼마나 잘 노나 옆에서 구경해 보고싶기도 해서 어디 한번 신명 나게 놀아보라고 했다.


어디한번 놀아봐~! 매우 쿨하고 말은 쉬웠으나 가끔 울컥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럴 땐 육아서적을 펼치고 필사에 들어간다.


진짜 잘 놀다보면 진짜 좋아하는 일을 찾게 되고 그로써 진짜 자기 앞가림은 하고 살 수 있을 거라는 일말의 밑도 끝도 없는 희망을 주는, 자녀 교육 서적의 가르침 대로 말이다.


결혼 전에는 자기계발서 중독자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다독 했건만. 결혼 후에는 시어머니의 존재감에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불경을 외우더니, 요즘은 남자, 남편이라는 한 인간을 이해하고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 불경도 자기계발서로도 심리학 서적으로도 도저히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하던 중, 우연히 읽어 본 육아서적에서 교훈과 깨달음을 얻기 시작해 베스트셀러 육아 서적들을 구매해 탐닉 중이다. 


최근에 읽고 있는 책은 자녀를 둔 학부모 사이에서 필사가 필수라는 박혜란 작가의 <엄마공부>.


지금도 옆 방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RPG게임을 하는 

남편의 마우스, 키보드 소리에 

끓어 오르는 마음을 달래며 몇 구절 반복해서 필사해 본다. 


좋은 엄마(와이프로 바꾸면 빙고)가 되기 위한 결심


1. 엄마는 너의 존재 자체가 고맙다.

2.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게. 

3.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끝까지 믿을게. 

4. 네가 하는 말에 항상 귀 기울일게.

5. 너의 생각을 항상 존중할게.

6. 많이 어루만지고 껴안아줄게. 

7. 시간을 내서 신나게 놀아줄게. 


자정 임박, 

게임인으로써 날 밤 새우는 열정을 드러내는 남편에게 다가가 

뭉친 어깨와 목 좀 빡세게 두드려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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