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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이 주인공인 드라마

내가 좋아하는 작은 것들 36

by 노루

주말 저녁 잠자기 아쉬울 때, 낮에 시간이 빌 때 거실에 앉아 뒹굴거리다 보면 꼭 채널을 돌리게 되는데, 꼭 멈춰서 보게 되는 채널이 있다. 우리 집 232번, 고독한 미식가.


요즘 텔레비전 채널은 내가 어렸을 때 보던 케이블 채널이랑은 달라서 인터넷을 어디서 어떻게 설치했는지, 티비를 어디서 샀는지 뭐 이런 것에 따라 다른 채널이 딸려오는 것 같다. 지금 우리 집엔 채널마다 하나의 프로그램을 주야장천 돌려가며 보여주는 메뉴가 있는데, 거기 232번에 고로 아저씨의 고독한 미식가가 하루 24시간 방영된다. 광고가 자주 나와도 자꾸 거기 멈춘다. 고로 아저씨의 난감하고 우스운 직장생활 중 배가 고파질 때 만나는 식당. 참 단순한 이야기인데 나한텐 세상에서 제일 아늑하고 무해한 프로그램이다.


이야기 자체에는 별다른 참신하거나 당기는 맛이 없지만 음식이 주인공이 되어 에피소드를 이끄는 드라마들이 있다. 사실 나는 드라마를 잘 보는 편은 아닌데, 열몇 부작을 잘 쫓아갈 지구력이 잘 없기도 하고 드라마 속 어떤 현실도 판타지도 아닌 애매한 구간에서 몰입이 깨져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근데 음식이 주인공이라면 좀 말이 달라진다. 회차마다 다른 메뉴가 나온다는 점에서 충분히 다음화를 봐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되고, 먹는 장면이 큰 비중을 차지하다 보니 인물의 마음을 그렇게 깊이 헤아릴 필요는 없다. 모든 면에 몰입하고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음식 드라마의 주인공은 음식이다. 적은 양이라도 성의 있게 손질하고, 정갈하게 담아 깨끗하게 먹는다. 나는 그게 너무 좋다. 그 드라마 속에서 사람들은 음식을 맛보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 현실에서 식사를 하며 온전히 음식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가 잘 없다. 점심엔 내내 듣던 일 얘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다시 들으며 밥을 먹고, 저녁엔 아직 남은 업무의 여운과 눈앞에 재생되는 어떤 영상에 정신이 팔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먹는다. 그러니까 음식 드라마의 판타지는 정말 완전히 음식을 만끽하고 즐기는 그 자체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작고 꽉 찬 식사를 드라마에서는 매일의 일상 속에서 만난다. 그 덕에 나도 소담한 남의 한 상을 보며 맛을 상상하고 따뜻함을 상상한다.


지금도 고로 아저씨를 보며 쓴다. 방금 고로 아저씨는 쥐치 한 마리로 조림과 회, 된장국까지 알차게 먹고 파스타도 드셨다. 나도 또 마음으로 같이 먹었다. 참 맛있게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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