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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파고 Jan 11. 2021

30년 맛집, 10탄-원주엔 없는 논현동 원주추어탕

추어탕의 기존 공식을 깼다

논현동 뒷골목을 낮에 다닐 일은 없었다. 밝은 시간대에 갈 일이 있었다 해도 기껏 업무차 지나갔거나 하는 정도였고 밤이 새도록 술자리를 하고 해장을 하려 헤매고 다녔던 게 전부다. 선배님의 빗맞아도 삼십 년 시리즈를 탐방하던 중 내게도 익숙한 식당을 방문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바로 신논현역 뒷골목에 위치한 원주추어탕이다. 사실 해장을 목적으로 방문했던 곳이라 맨 정신으로 문을 들어서 본 적이 없는 곳이다. 24시간 영업하기 때문에 나 같은 주정뱅이에겐 알코올 범벅이 된 내장에 해장을 위한 영양분을 공급하기에 이보다 좋은 아이템은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땅값 비싼 논현동에 이 층 건물과 전용 주차장까지 보유한 원주추어탕은 그 자리에서만 벌써 사십 년을 넘나드는 세월 동안 영업을 해온 집이다. 이 식당의 장점이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딱 떠오르는 특징 몇 가지 정도 열거해 본다.



우선 웰컴 드링크 격인 보리차에서 이색적인 느낌이다. 겨울엔 따뜻한 보리차, 여름엔 냉보리차를 주는데 정문에 들어서면 커다란 스테인리스 보온보냉 통이 손님을 맞이한다.


계보를 잇는 가족 전승 요리(가끔 할머니가 직접 식당으로 나와 직접 일을 하기도 하심), 주인만큼이나 오랜 기간 일하고 계신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들이 단골손님을 다 알아봐 주는 센스 있는 영업력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원주추어탕의 향토스러움은 바로 사시사철 얼음 동동 뜬 시원한 동치미에서부터 시작된다. 여름엔 여름대로, 겨울엔 겨울대로 아주 입에 착착 달라붙는 깊음이 있다. 홀에는 이처럼 고추튀김과 미꾸라지 튀김이 있는데 사실 난 아직 맛보지 못했다. 이것까지 먹어치울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딱 세 가지 밑반찬에서 묻어 나오는 더도 덜도 아닌 만족감. 직접 담근 파김치와 배추김치 그리고 멸치볶음인데 무제한 퍼 먹을 수 있다.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달인의 솜씨가 아닐 수 없다. 원주추어탕은 단연 추어탕 전문점이지만 파김치는 딱 떨어지는 궁합으로 절묘한 어울림을 보여준다. 한동안 파김치에 꽂혀서 배추김치는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얼마 전 배추김치 맛을 보고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음식점을 가늠하는 척도를 김치라 하였는데 명실공히 맛집임을 공표하고 있었다.



원주추어탕에서 추어탕을 제대로 맛보려면 몇 가지 공식이 있다. 일단, 기본찬으로 주는 파김치를 왕창 퍼서 가져오는 게 좋다. 수제비를 추가로 주문해 같이 끓이면 환상적인 궁합을 맛볼 수 있다.



테이블 구석에 설치된 가스기기에 올려진 오래된 냄비 안에는 적지도 많지도 않은 추어탕이 담겨 있다. 선배님과 나는 항상 갈추(갈아 만든 추어탕)에 수제비 2개를 주문해서 먹는데 이젠 아주머니들도 거의 자동이다. 어쩌다 운이 좋으면 아주머니가 옆에서 밀가루를 떼어 넣어주기도 한다. (사실 깜빡 놓쳐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추어탕엔 절대 빠질 수 없는 산초와 후춧가루가 테이블 위에 있으니 잘 보고 넣어야 한다. 세월 묵은 맥코믹 스테인리스 후추통이 두 개 있는데 잘 보면 '산'이라고 쓰인 것이 산초 통이다. 다른 하나는 당연히 후추다. 적정량의 산초와 후추를 넣고 끓이면 역시 추어탕의 진수를 볼 수 있다.



선배님의 추천으로 추어탕, 밥, 파김치, 산초를 넣어 잘 비벼 세 번 정도 먹으면 뚝딱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처럼 냄비 밑바닥에 깔린 미꾸라지 잔해들을 마구 긁어먹는 게 핵심 중에 핵심이다. 어쨌든 추어탕은 몸보신에 최고니까. 파김치를 가져올 때 놓치면 안 될 것이 있다. 통 안에 잘 보면 고추가 보이는데 인원수만큼은 골라 가져오면 좋다. 새콤한 맛이 식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 글을 쓰는 중에도 그 맛이 떠올라 침이 고일 정도니까.


가끔 자연산 미꾸라지가 입고되곤 하는데 그땐 직원들이 적극 추천한다. 절대 놓치지 말고 주문하면 후회 없다. 맛이야 모르겠지만 믿고 먹을 수 있는 그런 믿음의 테이스팅이 있으니...



서울 강남 한복판, 그것도 강남대로 바로 이면도로에 이런 맛집이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점심시간에 맞춰 가면 번호표 받고 길게 줄을 서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으니 남들보다 빨리 움직이는 게 좋다. 우린 줄 서는 걸 싫어해서 11시 20분 정도엔 가는 편인데 안타깝게도 요즘 같은 시절엔 줄을 안 서도 되는 마음은 불편하지만 몸뚱이는 좋은 점도 있다.





사실 이 글을 쓴 건 일주일이나 지났다. 하지만 스마트폰 용량이 부족해 지워버린 사진들 중에 원주추어탕 사진이 거의 사라지고 없다는 걸 알게 됐고, 부산 출장 후 다시 들러 사진을 찍어 왔다. 이번에는 오기가 생겨 아주 공을 들여 촬영했다. 일부러 11시 조금 넘은 시간에 갔더니 역시 손님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사진 촬영하기엔 아주 적합한 환경이었다는 사실! 난 워낙 단골이라 요즘엔 사진을 찍지 않았는데 안 하던 짓을 하는 날 보며 묘한 미소를 띠는 아주머니... 눈치챈 걸까? 빗맞아도 30년 10탄에 올릴 계획이라는 사실을.


추어탕을 먹는 내내 사방에 질그릇 긁는 소리가 끊임없다. 말없이 그릇을 긁는 사람들. 이유를 물어 무엇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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