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릉에 살 때 자주 가던 두 곳, 선릉양조장족발과 달빛보쌈이다. 난 족발집이면 족발을, 보쌈집이면 보쌈을 잘하는 집이 좋다. 두 가지 메뉴를 다 하는 건 왠지 전문성의 결여라는 편견이 있어서다. 물론 사이드 메뉴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주종목을 타이틀로 내 걸었다는 건 그만큼 자신 있다는 걸 증명하려는 의지일 테니까 말이다. 요즘엔 그런 일이 없겠지만 난 이십 대 초반 처음 술을 접할 무렵, 선배들에게 술 안 마신다며 매 맞으며 버티다 못해 생활신조였던 금주를 깨고 말았다. 고등학생 때도 마시지 않았던 술을 드디어 입에 댄 것이다. 그러다 한 번은 따듯한 봄이었던 어느 날 학교 잔디밭 위에서 선배들이 주는 막걸리의 새콤 달짝한 맛에 반해 한 잔, 두 잔 마시다 기절해 버렸다. 당연히 보기 흉한 구토를 하고 말았는데 그러고 거의 오 년 가까이 막걸리 냄새도 맡지 못하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첫 경험이 아주 강력한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술도 음식이거늘, 이놈의 식도락 병은 다시 막걸리를 소환하기 시작했고 이젠 전국 각지의 막걸리 양조장을 찾아다닐 지경이 되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 이후 아예 술을 끊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
집에서 걸어서 5분이면 도착하는 선릉양조장족발. 이 곳에서 내가 즐겨먹는 메뉴는 바로 불족발이다. 메뉴판에는 그런 게 없지만 최대한 맵게 해달라고 부탁하면 신경 써서 맵게 조리해 준다. 불족발은 매워야 제 맛 아닌가? 역시 간판답게 양조장에서 길어온 막걸리를 먹어야 궁합이 맞다. 여긴 주로 지평막걸리를 취급한다. 지평막걸리 양조장은 양평군 지평면에 위치하고 있는데 자전거 타고 돌아다니다 우연히 양조장을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난 항상 퇴근시간 전에 움직이는 편이라 이 날도 한산했다. 사람 없을 때 가면 이렇게 인테리어 사진도 촬영할 수 있는데 친구들과 시간을 맞추다 보면 이렇게 한산한 시간대에 방문하기도 어렵다. 선정릉역 바로 앞이라 퇴근 시간이 지나면 바로 바글바글해진다.
사진첩을 뒤지다 보니 두 명 상이 차려져 있다. 이건 대체 누구랑 가서 먹었던 걸까? 이 날 역시 불족발을 두고 지평막걸리를 마신 거다. 아무튼 집 근처에서 당기는 술안주 중에 매운 불족발만 한 것은 거의 없다.
왼쪽은 일반 족발이고 오른쪽은 불족발이다. 사진이 영 맘에 들지 않게 나왔지만 그래도 이게 가장 최근 사진인 것 같다. 5인 이상 금지령 내리기 전이라 일행이 좀 있었다. 난 역시 불족발을 좋아하기에 일반 족발엔 거의 손도 대지 않았는데 맛을 본 사람들은 모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으니 다행이다. 죽을 정도로 맵게 해 달라고 부탁했었는데 죽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맛있는 매운맛에 뜨거운 입김을 후후 불며 열심히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어지간하면 수직 샷을 촬영하지 않는데 사진첩을 보니 이렇게 수직으로 놓고 촬영한 게 다 있었다. 남기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식당 가서 나도 몰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 걸 인지하고 놀랄 때가 있다. 이젠 먹스타그램 때문인지 음식의 출현엔 찍사 모드 자동 반사니까.
역시 매운 불족발은 달달한 지평막걸리가 딱이다.
선정릉역 1번 출구 뒷골목에 위치한 달빛보쌈. 여긴 정말 평소 가본 적도 없던 골목에서 우연히 발견한 보쌈 전문점이다. 이 식당의 장점은 다양한 막걸리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인데 사실 가격이 좀 사악한 편이다. 그렇게까지 비싸게 팔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절반 정도의 가격이면 충분한데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위에도 거론했지만 한 때 막걸리에 꽂혀 전국 양조장을 섭렵하고 다녔으니 막걸리 가격에 대한 심리적 반응은 남들과는 좀 다를 거다. 단양막걸리 양조장은 새벽에도 할머니를 깨워 말통씩 받아다 먹곤 했을 정도였으니 더는 표현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아무튼 막걸리 소믈리에가 생겼을 정도로 한동안 막걸리 광풍이 불어닥쳤지만 순풍으로 바뀐 후 막걸리 소비는 현저하게 줄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도 막걸리 애호가들은 여전히 막걸리를 사랑하고 있고 전국의 막걸리 양조장들은 나름의 개선으로 다양하게 변모하고 있다.
달빛보쌈 입구는 여느 보쌈집들에서 보이는 예스러움을 볼 수 없다. 다만 달빛은 아니지만 달빛이라고 우기면 그런 것 같다고 반응해도 무색할 정도로 정갈하고 은은한 빛을 뿜는 하얀 간판이 소박하게 눈에 띈다. 이왕이면 달처럼 둥근 간판이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바람이... ^^
예전엔 달빛보쌈에 가서 보쌈정식을 먹은 적도 있었다. 직장인들을 위해 내놓은 메뉴였을 거다. 이번에 갔을 땐 메뉴판에서 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제는 운영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혼자 가서 먹기엔 딱 좋은 메뉴였을 거다. 하지만 난 여기 처음 갔을 때도 혼자였고 보쌈에 막걸리를 몇 병 마시고 나왔다. 그게 나와의 첫 만남이었다.
보쌈은 역시 김치와 잘 어울려야 한다. 얼마 전 먹스타그램이나 다름없는 내 인스타그램 계정에 여기 대표님이 팔로잉을 신청했고 맞팔을 하고 말았다. 어지간해서는 상업적인 상대와는 맞팔하지 않는데 나도 모르게 수락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잊었던 이 곳을 다시 찾게 됐고, 몇 년 안 된 추억을 되돌리며 맛을 음미했다. 완전 푹 삶아진 보쌈들과는 달리 이 집의 보쌈을 비계 부분이 꼬들꼬들하여 좀 다른 식감을 준다. 살은 촉촉하고 비계는 꼬들 거려 두 가지 식감이 입 안에서 맴돈다. 역시 삼겹살 부위만이 가진, 그것도 아니라면 돼지만이 가진 식감이 아닌가? 겉절이라고 해야 할까? 김치라 해야 할까? 적절하게 익은 양념을 아끼지 않은 배추김치와 무 무침은 보쌈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게다가 쌈을 싸서 먹으면 절로 막걸리를 부른다.
사실 달빛보쌈을 다시 찾게 만든 건 바로 이 녀석이다. 달빛막걸리. 여기선 막걸리를 직접 주조한다고 한다. 물론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게 됐다. 바로 전날 늦은 시간에 술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됐고 술이 다 떨어졌다는 소식은 듣지 못한 채로 방문했다가 운이 좋아 마지막 한 병을 입수할 수 있었다. 지인을 기다리느라 안주 없이 이 녀석 한 병을 다 마셨는데 톡톡 쏘는 청량감이 풍부한 술이다. 다만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침전물이 무거워 자주 흔들어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재료엔 충실하나 주조기술 노하우는 부족한 걸 말하는 것일 게다. 어쨌거나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여 만들어진 막걸리들보다 정성이 많이 들어간 술이라는 데 가산점을 주며 한정판이라는 데 마음이 동했던 것도 사실이다.
질그릇으로 만들어진 앞접시와 막걸리잔이 딱 맘에 들어서 사진 하나 남겨 봤다. 역시 막걸리는 이런 느낌이 있어야 제 맛인 거다.
지인이 도착한 후에 주문한 막걸리는 메뉴판에 적힌 수십 가지에 달하는 막걸리 중 여기 대표님이 추천하는 걸로 주문했다. 번거로운 일이지만 신경 써서 주문을 도와준 게 너무 고마워서 나중에 산청막걸리를 한 병 더 주문해 마셨다. 둘이서 막걸리 5병이면 적지 않게 마신 것이지만 9시가 되어 스프링처럼 의자에서 몸을 띄운 내게 이건 앉은뱅이 술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했다. 역시 좋은 술은 몸에 좋다. 소주 같은 화학주에 길들여진 내 몸이 좋은 막걸리에 중화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통과정 때문에 카바이드로 과속을 유도하는 일부 양조장들의 숙성 과정을 겪은 막걸리보다 시골 한구석 이름도 없는 양조장에서 만들어진 막걸리가 더 당기는 하루였다. 오래전 충청도 농가들 즐비한 구석에 자리 잡고 막걸리를 만들던 양조장이 기억났다. 이젠 어딘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그때의 기억이 새삼 떠오른 걸 보면 역시 음식은 추억이란 걸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