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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

미워하는 마음만으로는 살 수 없다

by 루파고

인생을 살면서 가족에 버금갈 만큼 중요한 것이 벗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 호정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호정은 스물여섯 살에 결혼을 했다. 부모형제 이후로는 새로 생긴 가족이다. 호정은 연애결혼으로 맺어진 인연이지만, 부모형제처럼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아내는 친구들과 동급이라고 생각했다. 호정은 친구들 일이라면 만사를 제쳐두고서라도 뛰어나갔다. 누구의 말에도 호정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호정의 아내는 그런 그가 항상 못마땅했다. 그랬던 호정이 정신을 차리게 된 데는 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호정이 친구들을 우선시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호정의 절친이었던 채수가 해주었던 이야기 때문이다. 누구나 흔히 알고 있는 고전적인 우화다. 채수가 호정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호정아. 너는 친구가 뭔지 아니?”


“글쎄! 그냥 우리 같은 게 친구 아닌가?”


“그래! 맞아! 그런데, 진짜 친구는 바로 이런 거야~”


호정은 채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도 아버지께 들은 얘긴데 말이지…… 정말 감동했어! 옛날에 친구들과 노는 데만 집중하고 학업도 소홀히 하던 청년 있었대. 아무리 다그쳐도 그 청년은 달라질 줄 몰랐고, 청년은 거의 매일 밤늦게까지 술 마시고 들어와서는 친구들과 세상 일을 함께 걱정하고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다 보니 술이 과했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어. 보다 못한 아버지는 청년을 앉혀 두고는 물어봤대. <너에게 진정한 친구가 몇이나 있냐?> 아버지는 매일같이 친구들과 세상 일을 함께 고민하고 고민을 들어주는 사이니까 그들이 진정한 친구라고 말하는 청년의 말에 내기를 하기로 했어. 내기의 조건은 지게에 사람 크기 정도의 자루를 짊어지고 친구네 집에 가서 도와달라고 청하는 거였어. 실수로 사람을 죽이게 되었으니 하루만 숨겨 달라고 하자는 것이야. 그래~ 맞아! 청년은 자기 친구들은 당연히 자기 숨겼을 거라고 생겼어. 하지만 청년의 친구들은 <실수로 사람을 죽게 했으니 하루만 숨겨주게~>라는 청년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매몰차게 그를 쫓아내버렸어. 문전박대라는 게 바로 그런 것이었겠지. 첫 번째 친구 집에서 문전박대를 당한 청년은 <이런~ 몹쓸 놈!>이라고 외치고, 아직 친구들이 많이 있으니 걱정 말라고 아버지에게 말했어. 청년의 아버지는 예상했다는 듯이 웃으며 아들의 뒤를 따라갔어. 하지만, 두 번째 친구의 집에서도 세 번째 친구의 집에서도 마찬가지였어. 특히, 세 번째 친구의 아내는 재수 없다면서 소금까지 뿌렸는데, 그것조차도 친구가 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 청년은 자신의 영혼을 맡길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친구들이 자신의 무죄를 믿어주지 않는다는 것에 인생의 회의를 느끼고 좌절감을 느꼈어. 아버지는 청년의 어깨를 천천히 토닥여 주었어. 집을 나올 땐 그렇게 힘이 가득 차 있던 청년의 어깨에는 이제 힘없이 늘어져 있었어. 아버지는 청년의 어깨에 메고 있던 지게를 받아 메고 어디론가를 향했어. 그저 <따라오너라!>라고 한마디 남기고 어디론가 나서는 아버지는 왠지 자신감이 넘쳐 보였어. 청년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뭔가 보여주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 청년의 아버지는 허름한 초가집 앞에 섰어. 대충 봐도 빈궁하기 그지없는 초가집이었지. 청년은 돌담 뒤에 숨어서 아버지가 초가집 앞에 선 것을 지켜보기로 했어. <이보게~ 호정이 있는가?> 아버지는 초가집 앞에서 호정이라는 사람을 불렀어. 그러자 초가집 안에서 버선발로 뛰어나오는 중년의 남자가 있었지. <아니~ 이게 몇 년 만인가? 이렇게 연락도 없이 늦은 시간에…… 그런데, 자네 등 뒤에 그건 뭔가?> 호정이라는 친구는 아버지의 등에 진 지게의 모양새를 보더니 금세 표정이 굳어졌어. 청년의 눈에는 아버지의 친구 역시 자신의 친구들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어. <내가, 실수로 사람을 죽게 했네…… 미안하네. 이런 부담을 주게 돼서.> 청년의 아버지는 구체적인 설명 조차 하지 않았어. 그런데, 호정이라는 사람이 그런 거야. <무슨 소린가? 자네가 사람을 죽이다니…… 절대로 그럴 리가 없네. 자네에게 무슨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을 거야. 어서 들어오게나!> 호정은 아버지를 억지로 집안으로 이끌었어. <지게는 광에다 놓고 들어가지!> 호정이 말했어. 그러자 아버지는 <자네 아내는 어쩌나? 내가 자네 집안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네. 나는 그냥 광에 있으면 되네.>라고 했지. 그러자 호정이 다시 말했어. <내 아내도 자네라면 나만큼이나 믿고 있으니 염려 말게. 하루 아니라 며칠 쉬다 가도 괜찮네.> 그러자 청년의 아버지는 돌담 뒤에 숨어 있던 청년을 쳐다보지도 않고 호정의 손에 끌려 집 안으로 들어갔어. 청년은 돌담에 기대서 아버지가 나오기만을 기다렸어. 네 시간 정도가 지나서야 집에서 나온 아버지는 청년의 힘 빠진 어깨를 두드리며 집으로 가자고 했어. 아버지는 청년에게 한마디 했지. <세상에 그저 아는 친구가 많이 있는 것보다 나를 알아주는 친구 한 명 있는 게 좋은 거다. 나도 호정이 저 친구를 몇 년 만에 찾은 건지 모르겠다. 진정한 친구라면 수십 년 만에 만나더라도 한결같아야겠지. 그게~ 친구란다.> 그러자 청년이 물었어. <아버지! 그런데, 지게가 그렇게 무거웠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청년은 아무리 가짜 지게였지만 너무 무거운 것이 이해되지 않아있어. 그러자 아버지는 빙긋 웃으며 말했어 <너에게 진정한 친구라면 이 애비가 정말 선물을 주고 싶었단다. 그래서 이것저것 값나가는 것들을 모아서 자루에 다 넣었지. 결국, 그것들이 호정이 저 친구 것이 되어 버렸구나.> 어때? 이 이야기 정말 멋지지 않아?"


호정은 채수의 이야기를 듣고 깊은 생각을 했고, 호정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채수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친구처럼 느껴졌다. 호정은 채수가 해준 이야기 속의 호정 같은 친구가 되고 싶었다. 친구들 일이라면 만사를 제치고 도와줄 수 있는 친구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짐을 한 것이다. 물론, 호정은 친구들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그 이야길 해준 채수라면 자기 이상으로 친구인 자신을 생각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



채수는 대학 졸업 후 이 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취직을 하지 못한 취업 삼수생이었다. 채수는 백수 생활이 길어질수록 스트레스가 심해졌다. 친구들은 채수를 응원하고 다독이며 술자리가 있을 때는 채수의 하소연을 새벽까지 들어주어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채수가 면접 최종 결정을 통보받은 날, 취업을 축하하는 술자리에서 폭력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사고라는 것은 정말 어이없게 벌어지는 것이다. 일차에 이어 이차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도 역시 채수의 취업을 축하하는 건 당연한 것이었고 여느 때보다 더 기분 좋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폭력 사건의 발단은 옆 테이블과 시비가 붙으면서였다. 시비가 붙은 이유는 어이없게도 취직이 된 채수가 부럽다는 것이었다. 옆 테이블과 언성이 높아지게 된 것이 기껏 그런 문제였다는 것이 한심하지만 채수는 자신이 취업 삼수생을 간신히 극복하고 취업을 한 것이 무엇이 문제냐며 주먹을 휘둘렀다. 상대방 만년 백수는 코가 깨지며 쓰러졌다. 싸움이랄 것도 없었다. 게다가 고성이 시작되고 주먹이 오간 것까지는 삽시간에 이뤄졌다. 경찰이 온다는 말에 호정의 친구들은 채수와 호정만 남겨두고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호정은 채수의 옆을 지켜주었다. 채수는 호정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호정아. 부탁이 있는데~ 나, 이제 간신히 취업했는데~ 폭력 사건으로 경찰서 들락거리고 하면…… 잘릴지도 몰라. 네가 때린 걸로 해주면 안 될까?”


채수는 혀가 꼬여 있는 상태였지만, 용케도 현실 파악이 되는 것이 신기했다. 상대방 남자들은 모두 눈이 풀려 있었다. 누가 때린 것인지 분간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호정은 채수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진정한 친구가 할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채수의 이야기에 따르면 친구를 위해 살인죄를 숨겨주는 범죄까지도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친구일진대, 기껏 이런 사사로운 폭력사건 하나 정도 감싸주지 못하는 것은 친구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채수는 이년 만에 취업에 성공해서 이제 사회에 첫발을 디딜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래 마누라 몰래 처리하면 될 거야’ 호정은 채수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친구의 도리로서 역시 예상했던 대로 취객끼리 싸운 문제인 데다, 코뼈가 부러진 것은 아니어서 합의금 오십만 원에 폭력사건이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호정은 벌금 백만 원을 내라는 용지를 받아보게 되었다. 다행히도 아내가 모르는 상황이 되었지만, 백만 원이라는 벌금이 있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합의금 오십만 원마저도 백수였던 채수가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호정의 비상금으로 먼저 해결을 했다. 게다가 채수는 첫 월급을 타고서도 아직 돌려주지 않은 상황이었다. 호정은 왠지 친구 사이에 돈 문제를 자꾸 언급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채수는 두 번째 월급을 타고서도 오십만 원을 돌려주지 않았다. 벌금은 납부기간이 벌써 지나버린 지 오래였다. 물론, 호정은 백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곧 태어날 아이 때문에 필요한 꼭 필요한 돈이었다. 박봉의 사회초년생인 데다 아내까지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인지라 호정으로서는 빠듯하게 생활하며 간신히 만든 돈이었다. 아이 출산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돈이기 때문에 절대로 채수를 위해 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벌금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는 것은 채수 조차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호정의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협박에 가까운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벌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집으로 잡으러 오겠다는 내용이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호정은 혹시나 싶어서 백만 원짜리 수표로 찾아 지갑에도 끼워두었다. 수표는 혹시 모를 분실을 생각해서 번호까지 기록해둔 것이다. 물론 카드사 현금서비스를 이용하거나 해서 당장 큰 불을 끌 수 있겠지만, 앞으로의 생활은 보나 마나 뻔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호정은 카드사 현금서비스를 이용하지는 않았다. 아내도 그런 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호정은 애가 탔지만 일단은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다독였다. 누구에게 손을 벌리고 싶지도 않았다. 호정의 마음속에서는 친구와 우정에 대한 개념에 생채기가 생겨나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채수에 대한 우정은 이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곧 채수의 세 번째 급여일이다. 채수는 이번에는 꼭 갚아 주겠다고 철썩 같이 약속했다. 출산 예정일도 보름 정도를 앞두고 있었다.

채수의 세 번째 급여일을 하루 앞두고 호정에게 우려해 왔던 일이 벌어졌다. 회사에서 거래처 출장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대낮부터 음주단속 불심검문이었다. 물론, 호정은 술을 마시거나 한 것이 아니었지만 경차를 보는 순간 겁이 덜컥 난 것이다. 경찰의 음주단속을 무사히 마치고 십여 미터쯤 진행을 했는데 경찰이 뛰어나와 차의 진행을 막아섰다. 음주운전 측정 결과는 문제가 있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안심했던 호정은 심장이 쿵하고 떨어지는 느낌을 얼굴에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윈도를 열고 <왜 그러시죠?>라고 물어보는 호정의 표정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호정은 그 자리에서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벌금 백만 원을 내지 않아 수배가 내려진 상황이라고 했다. 평생을 선량하게 살아왔던 자신이 경찰에 수배되고 강제 연행된 호정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호정은 수중에 백만 원을 쥐고 있었지만 당장 백만 원을 낼 수 조차 없었다. 어지러운 상황을 어쩌지도 못하던 호정은 미처 어떠한 생각할 여유도 없이 곧장 구치소로 연행이 되었다.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전화도 할 수 없었다. 호정은 생전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나 봤던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호정은 난생처음 머리가 열렸다. 미쳐버린 것이다. 16명이나 되는 구치소에서 갇혀 있을 수는 없었다. 백만 원을 낼 때까지 하루에 오만 원씩 제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십 일을 구치소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곧 아기가 태어나기 때문이었다. 호정은 미친 듯이 소리쳤다. 시끄러운 호정을 진정시키고자 나타난 간수는 호정의 사연에는 관심이 없었다. 단지, 백만 원을 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호정은 내일 채수에게 오십만 원을 돌려받을 것을 생각했다. 오십만 원을 먼저 내고 나중에 오십만 원을 내는 것은 안 되겠냐는 질문에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에 호정은 어쩔 수 없이 백만 원을 내고서야 구치소에서 풀려 나왔다. 사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구치소 구경 가지 않습니다. 호정은 어이가 없었다. 호정은 경찰서에 주차된 차를 회사에 반납하고서야 퇴근했다.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강제 종료된 전화에는 아내와 회사에서 열 두통이 전화와 몇 개의 문자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호정은 아내에게 출장 다녀오는 길에 전화가 꺼져 있었다고 둘러 댔지만, 당장 백만 원이 문제였다. 아니! 당장, 내일 채수에게 오십만 원을 돌려받으면 오십만 원을 더 구해서 출산에 미리 계획했던 문제에서 벗어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채수는 또다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설마 했던 결과가 눈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호정은 화가 나서 채수에게 말을 하고야 말았다. 전날 구치소까지 들락거린 것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채수의 안하무인 한 반응에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야 말았다. 처음에는 미안했지만, 속이 다 후련해졌다. 채수의 잘못을 자신이 뒤집어쓴 것도 부족해서 합의금과 벌금까지 책임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화를 돋우었다. 호정은 감정이 폭발했다. 채수는 벌금을 내지 못해 구치소에 간 것은 호정의 책임이라며, 호정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다. 진작 이야기하지 그랬냐는 것이다. 호정은 화가 났다. 정작 본인은 오십만 원도 돌려주지 못하는 채수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아서 꾹꾹 참고 버티며 스트레스를 부담하고 있었는데, 기껏 한다는 말이 그런 것이라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채수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당장 오십만 원조차 돌려주지 않았다. 세 번째도 약속을 어긴 것이다. 호정은 하는 수 없이 아내 몰래 현금 서비스를 받아 출산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했고, 부모님의 축하금 덕분에 현금서비스받은 돈을 해결할 수는 있었다. 호정은 채수의 사건으로 친구와 우정에 대한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호정은 아버지의 친구 이야기를 해주었던 채수의 행동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작 자신에게 그런 친구가 되자고 했던 그가 오히려 자신을 이용만 했다는 것에 회의를 느꼈다. 아버지, 아들…… 그 청년의 힘 빠진 어깨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호정은 거울 앞에서 섰다. 자신의 축 처진 어깨를 보았다. 누군가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려 힘을 북돋아주길 바랬지만, 그에게는 누구에게도 그런 부탁을 하기가 두려웠었다.




호정은 채수의 사건 이후로 가정에 충실했다. 아내는 호정의 변화가 새로 태어난 아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호정은 세상에 자신 외에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가족은 예외였다. 그렇다고 호정이 친구들과 완전히 결별한 것은 아니었다. 채수에게서 총 백오십만 원을 돌려받는 데는 사고 이후로 거의 일 년이 걸렸다. 그것도 호정이 지속적으로 채수를 괴롭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 채수는 오십만 원조차도 돌려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입이 무거운 호정이었지만, 다른 친구에게 자기 고민을 토로했다. 금세 친구들 사이에 호정과 채수의 사건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채수는 오십만 원, 십만 원씩 나눠서 돌려주었다. 호정은 채수에게 원한 것은 돈보다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이었다. 하지만 끝까지 호정의 바람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 이후로 호정은 그 누구와도 돈거래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보다 호정은 누구의 일에도 끼어들거나 간섭하지 않기로 했다. 털끝만큼의 호의도 베풀지 않았다. 친구들은 처음엔 호정의 입장을 이해하고 편을 들었다. 호정은 세월이 흐르면서 친구들의 사소한 부탁에도 전혀 동요하거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호정에게서 차츰 멀어져 갔다. 그들은 그저 친구라는 단어의 울타리에 속해 있을 뿐, 그들 사이에서 그저 겉돌기만 했다. 그러나 호정은 그들에게 적어도 전혀 소외감을 느끼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친구들을 배척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그런 모습은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불과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아 호정은 현대판 스크루지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호정은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었다. 그는 이미 누구의 도움 없이도 살 수 있을 정도로 스스로를 단련시켰다. 특히, 돈의 문제는 걱정이 없었다. 십 년간 허리를 졸라매고 모은 덕분에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집을 현찰로 대출 없이 구입했다. 물론, 부모님의 도움이 조금 있었다. 비록 직장 생활에서 현대판 스크루지 란 평을 받고 있었지만, 직장 생활도 순탄하고 고속 승진했다. 호정은 누구나 부러워 마지않는 중산층에 속해 있었다




뜨거운 여름이 막바지 발악을 하려는지 온 대지를 뜨거운 열기로 덮여버리고 있었다. 가을의 새로운 기운은 여름을 밀어버렸는지, 시원한 바람이 불어댔다. 일요일 오후, 호정의 아내는 동창들 모임이 있다면서 일찌감치 집을 나섰고, 남자 셋이 집을 지키고 있어야만 했다. 이미 점심 식사도 인근 중국집에서 배달된 자장면과 탕수육으로 때운 뒤, 비닐봉지 안에 그것을 대충 둘러 현관문 밖에 던져 놓다시피 했다. 호정은 시원한 여름의 바람이 아파트를 관통시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앞뒤 창문을 모두 열어 버렸다. 아직 온기가 묻어 있는 바람이지만 호정의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았다. 미지근한 바람은 습한 기운을 죄다 핥아버릴 생각인지 집안 구석구석 숨어 있는 곰팡이들에게서 습기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호정의 두 아들은 자장면의 느끼한 때문인지 베스킨라빈스 CF 노래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했다. 큰 놈의 선창에 작은놈의 제창이 이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호정 자신 역시 깔끔한 맛이 그립던 차였던 터라 호정은 두 아들만 집에 남겨두고 아파트 상가로 나섰다. 아직 어리긴 해도 큰아들은 벌써 여섯 살이어서 동생을 잘 보살피는 편이었다. 호정은 둘만 남겨둔다고 해서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호정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주문받아 현관문을 나섰다. 아이들의 입맛은 호정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분야였다. 여름이라 그런지 배스킨라빈스에서는 손님이 긴 줄을 서고 있었다. 호정 역시 줄을 서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대기 시간만 십 분은 될 것 같았다. 호정은 제일 큰 사이즈로 주문해서 들고 나와 편의점에서 캔맥주를 하나 사서 떴다. 시원한 맥주가 뜨끈한 식도를 타고 꿀꺽꿀꺽 넘어갔다. 식도가 비명을 질러댔다. 맥주를 단숨에 마셔버린 호정은 다시 집으로 향했다. 멀리 열댓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호정이 전화가 벨소리를 울려 됐다. 아내였다.


“어~ 왜?”


호정은 귀찮다는 듯이 전화를 받았다.


“빨리 집으로 가봐! 애들이 베란다에 매달려 있대! 빨리!”


아내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그때서야 호정은 열댓 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집 아래쪽에 모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호정은 왼손에 들린 봉투를 던져 버리고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정신이 혼미했다.

칠층 자신의 집 베란다에는 두 아들이 난간에 매달려 있었다. 큰아들이 위쪽에 작은 아들이 큰 아들의 다리를 붙들고 있었다. 호정은 칠층 난간에 동생이 붙들고 있는 상태로 매달려 있는 모습이 클로즈업된 것처럼 또렷이 보였다. 큰 아들의 오른팔은 팔꿈치부터 난간 위에 걸쳐져 있었다. 동생을 매달고도 버티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얼마나 버틸 것인지는 예측할 수가 없었다. 호정과 한 무리의 사람들 간의 거리가 오십 미터가 채 되지 않았을 때 작은 아들은 안고 있던 팔에 힘이 빠졌는지, 등 뒤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팔을 허우적거리며 ‘아빠! 살려줘!’를 외치는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그러나 아빠 호정은 작은 아들을 살려줄 방법이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해 뛰던 호정의 다리에 힘이 빠지며 그는 앞으로 슬라이딩하듯 미끄러졌다. 뜨거운 아스팔트의 손바닥과 무릎이 모두 데어버렸다. 하지만 호정은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제, 인파와의 거리는 삼십 미터 정도 남았다. 그때였다. 칠 층에서 아빠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호정은 큰 아들을 지켜보며 무작정 뛰었다. 큰아들이라도 살려내야만 했다. 호정의 눈에 큰아들이 난간에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작은 아들은 이미 죽었다 하더라도 큰 아들이라고 살려야만 했다. 아직 오른팔은 난간에 걸쳐 있었다. 이십여 미터는 남은 것 같았다. 큰아들 역시 이제 더 이상은 버티지 못했다. 큰아들이 난간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팔이 허우적거리는 것이 보였다. 호정의 눈에는 눈물이 뿌렸다. 아들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호정은 아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떨어지는 순간까지 큰아들은 호정의 눈을 마주 보았다. 인파 속으로 아들의 모습이 사라지는 순간 호정은 두 다리에 힘이 빠져버렸다. 그의 발은 이제 아스팔트 끝에 있었고, 아들의 추락 지점에서 불과 십 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호정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있는 자신이 없었다.

그는 그 자리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두 아들을 동시에 잃은 것이다. 호정의 기억 속에서 두 아들과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흘렀다. 세상에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호정은 살아오면서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준 적이 없었고, 베풀며 살지는 못했어도 착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대체 신이 있다면 자신에게 이런 고통을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동시에 두 아들을 잃게 만드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호정은 혹시라도 두 아들이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신에게 빌었다. <제 두 아들이 불구가 되더라도 좋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평생을 착하게 살겠습니다. 아니 제 생명을 가져가셔도 좋습니다. 호정은 굳게 마음을 먹고 일어서려는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둘째 아들의 울음소리였다 분명했다. 호정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비비며 앞을 가로막은 사람들을 제치고 나섰다. 사람들이 전보다 많이 모여들고 있었다. 호정은 둘째 아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했다.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비켜주세요! 제 아들이에요!> 호정은 크게 소리쳤다! 사람들이 호정을 위해 길을 터주었다. 그 자리에는 둘째 아들이 백발이 무성한 할아버지 옆에 이웃집 아주머니의 품에 안긴 채로 울고 있었다. 눈조차 뜨지 못했지만 전혀 다친 곳이 없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의식을 잃은 채로 쓰러져 있었고, 두 팔이 부러진 듯했다. 완전히 꺾여버린 것을 알 수 있었다. 호정은 할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받아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빠!”


호정은 뒤에서 큰아들이 그의 두 다리를 안으며 자신을 부르는 것을 듣게 되었다. 큰아들 역시 살아 있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친 곳 없이 무사한 것을 알 수 있었다. 호정은 다시 두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의 두 눈에는 그만이 알 수 있는 의미가 담긴 눈물이 그칠 줄 모른 채 흘러내렸다.


사고의 내용은 이러했다. 호정의 두 아들은 그가 베스킨라빈스로 나간 직후 베란다에서 그들의 아빠가 길을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이들이 왜 그랬는지는 미스터리였지만, 작은 아들은 난간 위까지 올라갔다. 여차저차 해서 큰 아들과 함께 매달린 형국이 되었다고 했다. 호정 역시, 아이들의 설명을 수 차례 들었지만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튼 작은 아들이 떨어지는 것을 이웃들 중 호정이 보았던 백발의 노인이 사람들을 제치고 뛰어나가 추락하는 아이를 두 팔로 받아낸 것이었다. 노인은 그 충격에 두 팔이 부러져 버렸다고 했다. 노인은 자신의 두 팔과 호정의 작은 아들의 목숨을 바꾼 것이었다. 호정의 큰아들이 추락하기 전에는 호정의 작은 아들이 떨어지던 사이, 일층에 사는 주민 한 명이 집으로 뛰어들어 밍크 이불 한 장을 들고 뛰어나왔고 그 이후로도 한 명이 더 가지고 나왔다고 했다. 호정의 큰아들은 이웃이 가져온 밍크 이불을 여러 사람이 펼쳐 받아낸 것이었다. 큰아들은 잠시 정신을 잃기는 했지만 자신의 동생이 우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작은 아들은 정신적인 충격이 심해 한참을 울어댔지만 잠시 눈을 떴을 때 자신을 안고 있는 사람이 엄마인 줄 착각하고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호정은 이웃들 덕분에 사랑하는 두 아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



호정은 신에게 기도 했던 대로 맹세를 지키기로 했다. 그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결국 자신에게 피해가 되어 돌아온다는 생각에 젖어 살았었다. 하지만 그의 이웃들은 자신과 잘 알지도 못하는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역량을 다해 발 벗고 나서 도와주는 것을 알고 마음을 돌이킨 것이다. 특히, 백발의 할아버지는 무려 팔십이 세나 되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몸을 날렸다. 평소 힘없이 걸어 다녔다던 분에게서 어떻게 슈퍼맨 같은 괴력이 난 것이냐며 뉴스에까지 방송됐다. 그 이후로 할아버지는 클라크라는 별명이 생겼다. 동네 아이들은 물론 주민들 모두 클락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할아버지는 호정의 바로 앞 동에 사는 독거노인이었다. 자식들은 모두 해외로 이민 가서 혼자 살게 됐다고 했다. 호정에게는 아버지가 한 명 더 생겼고, 호정의 두 아들에게는 할아버지가 한 명 더 생겼다. 호정은 배려하는 삶이 무엇인지 이제야 다시 알게 되었다. 배려는 사랑이었다. 관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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