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빠가 변했다

돌이킬 수 없는 아빠의 판타지

by 루파고

“사장님! 사장님~”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의 중역 책상에 엎드려 잠들어 있는 영진은 꿈결에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영진은 귀찮다 못해 짜증이 났다. ‘오랜만에 낮잠 한숨 자려는데 누가 이렇게 시끄러워!’ 영진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눈은 뜨지 않았다.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사장님! 일어나세요! 급한 일이라니까요!”


젊은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영진의 귀를 괴롭혔다. 급기야는 누군가가 영진의 어깨를 흔들기 시작했다. 영진은 실눈을 뜨고 자신을 흔들고 있는 남자를 확인했다. 남자는 자신을 사장님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영진은 귀찮았지만 억지로 눈을 뜨고 일어났다. 책상 위 보고서에는 분명히 자신이 흘렸을 듯한 침이 흥건했다. 보고서 용지들은 이미 물에 적신 듯 완전히 젖어 있었다. ‘이건 또 뭐야? 내가 왜 여기서 엎드린 채 자고 있는 거야? 쪽 팔리게!’ 영진은 고개를 세우지 못한 채 보고서 용지들을 주변의 종이로 잽싸게 덮어 가렸다. 그리곤 자신의 어깨를 흔들어대던 남자의 인기척을 다시 확인했다. 왼쪽이다.


“누구세요?”


영진은 상체를 굽힌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젊은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 무슨 말씀이세요?"


젊은 남자는 얼빠진 표정을 하며 영진을 보았다. 젊은 남자는 영진이, 아니 자기 사장이 전에 없던 어울리지도 않는 장난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영진은 젊은 남자의 생각과는 달리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 영진은 처음 보는 남자에게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그것보다 주변의 환경과 책상 위 서류들이 어색했다. 죄다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젊은 남자 역시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런데 그 젊은 남자는 분명히 자기에게 사장님이라고 불렀었다.


“사장님! 꿈 꾸셨어요?”


젊은 남자는 다시 말을 걸어왔다.


“어~”


영진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꿈을 꾸었냐는 젊은 남자의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의미 없는 신음 소리를 낸 것이었다.


“사장님! 미국 지사에서 사장님과 빨리 통화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젊은 남자는 영진을 다쳤다. 영진의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했다. 분명히 지금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젊은 남자는 분명히 자신을 사장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지금 있는 곳은 사장실이다. 그러나 사실 영진 자신이 사장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꿈이다!’ 영진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꿈이 아니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영진이 깨어나기 전까지 기억하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은 거실의 소파에 누워서 인터넷TV 리모컨을 조작하는 것이다. 어떤 프로그램이 마지막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여자가 숲 속을 뛰어가던 모습 정도까지는 어렴풋이 떠올랐다. 어쨌든 자신의 기억은 분명히 거실의 소파 위에 널부러져 있는 모습이었다. ‘꿈이 확실해!’ 영진은 지금 이것이 꿈이라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그는 꿈에서 헤어나오기보다 꿈을 더 꾸어 보자는데 생각을 굳혔다. 어차피 꿈을 깬다고 해서 딱히 할 것도 없었다. 영진은 그저 사장 놀이나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어~ 그래! 전화 돌려봐!”


영진은 목소리를 깔고 제법 무게를 잡았다. ‘이 정도면 사장으로 보이겠지?’ 영진은 테이블 위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키폰 위에 램프가 점멸 중인 버튼이 보였다. 영진이 고민을 하는 사이 젊은 남자가 버튼을 눌러주었다. 영진은 그가 비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이면 예쁜 여자 비서면 좋잖아! 이왕 꿈인데 이건 너무하네!’ 영진은 속으로 툴툴거렸다.


“Good afternoon, president. It's important business issue.”


수화기 너머에서는 생소한 목소리의 영어가 들려왔다. 뭐야? 이놈의 개꿈은! 아무튼 꿈이 아주 고급지네 그려~ 영진은 사장 꿈에다가 어디서 주워들은 영어 문장을 꿈속에서 해대는 것인지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현실 세계에서는 영어 한 문장도 제대로 작문을 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영어로 된 꿈을 꾸게 되어 놀랍기까지 했다.


“What?”


영진은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그리곤 젊은 남자에게 수화기를 넘겨주며 말했다.


“알아서 하라고 그래!”


젊은 남자는 영진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뭐?”


영진은 수화기를 쭉 밀며 젊은 남자에게 알아서 하라는 제스처를 했다.


“사장님! 이건, 제가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걸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젊은 남자는 재차 물었지만 영진은 일어서서 창 밖을 보며 말했다.


“그냥, 그대로 해! 그리고 나 지금 퇴근할 거야!”


젊은 남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듯하더니 이내 수화기를 대고 유창하게 통화를 하기 시작했다. ‘내 꿈에서도 영어는 안 들리는구나.’ 영진은 생각했다. 영진은 젊은 남자를 방에 홀로 남겨두고 나와 버렸다. 비서로 보이는 예쁜 아가씨가 벌떡 일어섰다.


“사장님! 뭐 시키실 일이라도?”


영진은 잠시 여비서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여비서의 얼굴이 벌개지자 그는 그저 손사래를 치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 젊은 남자가 후다닥 소리를 내며 뛰어 나왔다. 수행 비서인 듯했다.


“집으로!”


영진은 돈 많은 사장님의 집이 궁금했다.


“사장님! 이따가 거래처 사장님과 약속된 식사는 어쩌시려고요?”


“그냥 취소해! 좀 쉬어야겠어!”


영진은 대충 둘러대고 퇴근을 종용했다. ‘BMW다! 와우! 게다가 리무진이다!’ 영진의 차였다. 영진은 소리쳤다. 물론 속으로 소리친 것이다. 비록 꿈이지만 그런 품위 없는 행동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영진은 널찍한 뒷자리에 앉아 차량 내부의 이것저것을 만지작거렸다. 암레스트의 수많은 버튼이 신기하기만 했다. 영진은 이윽고 냉장고도 하나 찾아냈다. 햇볕을 차양하는 창도 있었다. 시트는 안마도 된다. 종아리를 들어주는 장치도 있고, 시트도 시원하다. 시트에서 찬바람이 나온다. 영진이 차량 안의 버튼들을 거의 다 배워 갈 무렵이 되어서야 차는 멋진 단독주택 앞에 이르렀다. 그가 꿈에도 그리던 집이다. 넓은 정원이 보였다. 차는 주택 안쪽까지 들어갔다. ‘완전히~ 이건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집인데, 내가 이걸 대체 어느 드라마에서 본 걸까?’ 영진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드라마가 없었다. ‘영화에서 본 건가?’ 영진이 기억을 더듬는 사이 기사는 뒷문을 열어주었다. 영진은 기분이 상쾌했다. 최고의 대우를 받는 사장님이 된 것이다.



*



“여보, 오셨어요?”


“아빠~”


처음 보는 여자와 한 아이가 퇴근하는 영진에게 인사했다. 시간은 여섯 시가 조금 미치지 못한 상태다. ‘내 마누라보다 예쁘네. 역시, 돈 많은 사장님은 마누라도 예쁘구만. 돈으로 고친 걸까? 아니면 원래 미인일까?’ 영진은 여자와 아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이는 대충 훑어만 봐도 귀티가 철철 흘러 넘쳤다. 아들 명수와 비슷한 또래지만, 뭔가 달라 보인다.


“무슨 일 있어요?”


영진은 새로운 아내가 걱정하는 눈치로 물었지만 영진은 딱히 뭐라고 답할 게 없었다. 꿈이지만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아니! 그냥 쉬고 싶어!”


영진은 기껏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눈에 훤히 보이는 거실 외에는 집 안 구조를 아는 바가 없어서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꿈이지만 이들에게 자신의 정체가 발각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새로운 아내는 어디 아픈 데가 있는 것은 아니냐며 재차 물었지만 영진은 소파에 눕 다시피 앉아버렸다.

“동창회 다녀올거에요!”, “학원 다녀오겠습니다” 라는 말을 남긴 아내와 아들은 영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도우미 아줌마는 향이 진한 커피 한 잔을 테이블 위에 남겨두고 퇴근했다. 영진은 이제 대궐처럼 큰 집 안에 혼자만 남아 있는 것이다. 사방이 적막하다. 이제는 영진이 맘 놓고 집 안 곳곳을 활개치고 다닐 시간이 된 것이다. 그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이층 구조의 집안을 구석구석 헤집기 시작했다. 일층에는 영진의 집 거실보다 큰 주방이 있었다. 대형 냉장고도 두 개나 있고, 와인 저장고는 물론이고 신기한 가전제품들이 즐비했다. 사실, 영진의 주요 관심사는 거실에 다 있었지만 집 안 어디에도 영진의 관심이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 영진은 이층으로 올라갔다. 이층에도 거실이 하나 있었다. 집이 크기도 했지만 거실이 두 개나 있다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화장실은 아들 명수 방보다 컸고, 고급스럽기는 무궁화 몇 개짜리 고급 호텔 그 이상이었다. 그런데 거울에 비친 모습은 영진 자신의 몸이 아니었다. 꿈 치고는 설정이 제법 디테일 하다고 생각했다. 현재 영진의 얼굴은 그다지 잘 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기보다 아주 못생기지도 않았다. 영진은 양변기에 앉아 보았다. 고급이라 느낌부터 다른 듯했다. 영진은 자신의 집에 설치된 싸구려 비데 와는 수준이 다른 제품에 부러움이 밀려들었다. 이것이 꿈이 아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방 하나는 손님용으로 꾸며진 듯했고, 하나는 영화를 보기 위해 만들어진 방인 것 같았다. 구석 방은 아들의 방이었다. 큰 창가에 원목으로 짜여진 대형 책상 한쪽 벽에는 책으로 가득 찬 도서관 벽과 같았고, 수납장 안에는 잡다한 장난감이 가득했다. 아들의 방은 거실 두 개는 합쳐놓은 것 같았다. ‘이왕 꿈인데, 마누라하고 명수가 내 가족으로 나왔으면 더 좋았을 것을~’ 영진은 내심 아쉬웠다. 영진은 다시 일층으로 내려가 안방으로 들어갔다. 방 크기도 어마어마했지만 침대 사이즈만 해도 생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영진은 대충 옷을 벗어두고 침대에 누웠다. 편안했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편하게 생각했던 자신의 집 거실에 있는 소파보다도 좋았다. 그는 그냥 그대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진은 어느 샌가 스르르 잠들어 버렸다. 얼마나 잤을까? 영진은 누군가 옆에 눕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새로운 아내일 것이었다. 술 냄새가 진동했다. 술 냄새가 역하긴 했지만, 그의 팔에 살며시 미끄러지던 아내의 살결이 느껴졌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 있다. 털만 곤두선 것은 아니었다. 영진은 새로운 아내의 팔을 더듬었다.


“왜요?”


아내는 몸을 돌려 등을 보였다. 실크로 된 잠옷 위로 가느다란 등골과 하얀 살결이 비췄다. 잠옷 안으로 핑크 빛 팬티가 동그란 엉덩이를 돋보이게 했다. 영진은 성욕이 솟구쳤다.

‘오늘 밤은 몽정을 하겠구나.’ 영진은 어차피 꿈이라는 생각에 자신감이 생겼다. 그는 팔을 뻗쳐 새로운 아내의 팔을 문질렀다.


“귀찮아요~ 오늘도 그냥 잘래! 생전 안 그러다 오늘은 갑자기 웬일이래요?”


새로운 아내는 투덜거리며 영진의 손길에서 벗어나 버렸다. ‘어라? 앙칼진데? 여기서 포기할 순 없지!’ 영진은 다시 접근해서 성욕을 채우기로 마음먹었다. 영진은 이번에는 아내의 팔을 넘어 가슴을 더듬었다. 브라를 하고 있지 않아서 보드랍고 폭신한 가슴과 유두의 돌기가 느껴졌다. 영진의 숨소리가 빠르게 거칠어졌다.


“아이~ 정말 싫다니까!”


새로운 아내는 빽 소리를 질렀다. 영진은 다시 시도하려다가 이미 기분이 상해버렸다. 비록 꿈 속이지만 강제로 범하고 싶지는 않았다. 영진은 다시 벌러덩 누워 버렸다.



*



다음날 아침, 영진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꿈이라면 깨어나고 싶었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절대로 꿈일 수가 없었다. 영진은 어색한 회사에 출근하기가 두려워졌다. 아침부터 새로운 가족과 맞대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어색한 집, 어색한 아내. 어색한 아들. 영진은 대체 이 불가능한 상황이 벌어진 것에 대해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긴!’ 영진은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며 벌써 이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이려는 듯 했다. 어쨌거나 그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이 되기 전에 그 어떤 징후조차 없었다. 영화에서 보면 뭔가 이유가 있어서 짜잔~하고 이런 경우가 생겼는데, 영진에게는 그 어떤 것도 있었던 적이 없었다. 꿈이라고 생각할 땐 자신이 어떻게 생겼던 알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바뀐 것이다. 모든 건 어색함에 둘러 싸여져 있다. 아니! 영진 자신만 빼고는 그대로였다. 혹시 그게 아니라면 그의 새로운 아내도 아들도 모두 자기처럼 아무것도 아닌 척 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거짓된 세상을 부정하고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진실이 밝혀진다는 것이 두렵고, 모든 사람은 정상인데 자신만 비정상이라는 시선이 두려워서 모두들 평범한 듯 보이려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는 그다지 대화가 없었다. 영진의 원래 가족은 이 집안처럼 부유하지는 않지만 이 집 식구들에 비하면 상당히 정감 넘치는 분위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이 가족의 예의인지는 모르겠지만, 밥알이 목에 걸릴 것만 같은 침묵과 어색함이 흘렀다. 일곱 시쯤 되었을까, 새로운 아들은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대화라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얼마 후, 수행 기사가 집으로 들어왔고 영진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의에 의해 회사로 끌려갔다. 승용차 안에서의 기분은 어제와는 판이했다. 신기하고 즐거운 마음은 이미 싹 사라지고 없었다. 출근길도 어색했다. 물론 회사로 가고 싶지도 않았지만 딱히 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집에서 머물고 있다간 어떤 상황이 놓일지 예측할 수 없었다. 차라리 자신만의 공간인 사장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진은 비서에게 모든 스케줄을 취소해 두라고 지시한 뒤 의자에 앉았다. 창 밖의 세상은 모두 그대로였다. 벌써부터 자신의 아내 하연과 아들 명수가 그리워졌다. 영진은 언젠가 총각인 시절을 그리워했었던 게 부끄럽게 느껴졌다.

영진은 아무래도 원래 살던 집으로 가보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비서와 기사를 물리치고 택시를 불렀다. 영진의 집은 바뀌어버린 집과 멀지 않은 동네였다. 영진은 아침에 출근하면서 그것이 제일이 이상했던 것이다. 영진은 자신이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물론,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영진은 점심 식사도 걸러버렸다. 입맛이 있을 리가 없었다. 시계는 두 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이제 두어 시간이면 명수가 돌아올 시간이다. 영진은 근처 편의점의 플라스틱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커피 한 잔을 들고 명수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에라도 원래 살던 집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현재 영진의 얼굴은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그 방법은 피하기로 했다. 휴대폰은 이미 꺼버린 지 오래였다. 비서에게는 개인적인 일로 나간다고는 했지만 자신이 회사에 있는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전화가 온다고 해도 어차피 아는 사람도 없다.

세 시 사십 분. 벌써 편의점에서 한 시간 넘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게 눈치가 보였다. 영진은 편의점에서 이것저것 주전부리를 사다 두고는 하나씩 뜯기 시작했다. 멀리서 명수의 불알친구인 규섭이가 보였다. 영진은 여러 가지 예상을 해보았다. 명수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경우와 모든 게 그대로이지만 영진 자신만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경우다. 그렇다면 명수의 아빠는 다른 누군가 일 것이다. 아니! 모습은 분명 그대로일 것인데 내면은 영진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슴이 뛰었다. 이래도 저래도 영진은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현실은 너무 가혹한 것 같았다. 부자가 된 자신의 인생은 영진의 인생이 아니었다. 영진의 인생은 원래대로 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이란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다른 누구도 영진의 입장이 아니니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규섭이가 편의점 앞을 지나가고 멀리서 명수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새로운 아들이 보였다. 충격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영진은 아직까지 새로운 아들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어제 저녁 그들이 나눴던 대화는 그저 새로운 아들이 자신에게 아빠라고 불렀던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두 아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편의점 앞을 지나가면서도 영진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아예 눈길조차 마주치지 못한 것이다. 충격적이었다. 명수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니! 지금은 자신의 새로운 아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더 이상했다. 영진은 세상의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영진은 조심스럽게 두 아들을 따라가며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명수야! 너희 아빠 어때? 우리 아빠는 원래보다 더 이상해졌어.”


새로운 아들이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우리 아빤 너희 아빠처럼 아침에 출근도 하고 저녁에 내가 좋아하는 선물 사가지고 오실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어. 너네 아빠 별로야! 그래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어딘가로 나가기는 하시더라고! 엄마가 놀래서 기절하시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치경이 너는 우리 아빠 어떻게 생각해?”


영진은 이제서야 새로운 아들의 이름이 치경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영진은 지금 자신의 상황을 두 아이들이 알고 있다는 것을 듣고서 머리를 둔기에 맞은 것처럼 멍청해졌다. ‘대체, 이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영진은 상황을 정리해보려고 했지만 역시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영진은 일단 아이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니네 아빠는 너무 이상해! 어제는 우리 아빠보다 일찍 퇴근하셨길래, 역시 너희 아빠는 다르구나 생각했어. 그런데 학원에 다녀와서 보니까 계속 잠만 자고 계시던데? 니네 아빠는 잠꾸러기인가 봐. 어떻게 잠만 잘 수가 있는지 모르겠어.”


“그럼, 우리 아빠는 저녁에 선물을 사서 들어왔겠네?”


치경이가 명수에게 물었다.


“응! 뭔가 사오시긴 했어.”


“뭔데?”


“별 거 아니야. 과자를 사오셨는데, 들어오실 때 술을 잔뜩 드시고 오셨어. 니네 아빠는 맨날 그렇게 술만 드시는 건 아니지?”


명수가 말했다.


“명수야. 우리 아빠는 어디 가도 우리 아빠인가보다. 하하하~”


“그럼 너는 우리 아빠 맘에 들어? 우리 계속 바꿀까?”


“아니! 난 그냥 우리 아빠가 좋은 것 같아. 너희 아빠는 술만 좋아하고, 말도 없어서 심심해! 우리 아빠는 얼마나 재미있는데~ 사실, 엄마가 그렇게 뭐라고 해도 우리 아빠는 언제나 웃어버리거든.”


“너희 아빠도 우리 집에서는 하나도 재미없었어. 우리 아빠처럼 말도 안하고 말이야. 잠만 자고~”


명수와 치경이는 서로의 아빠를 흉보기 시작했다. 영진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어떤 방법으로 아이들이 두 아빠를 바꾼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영진은 몇 시간 동안 받았던 스트레스가 한 번에 풀어지는 듯했다. 영진은 아이들이 방향을 바꿔 어디론가 향하기를 원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우리~ 하루만 더 바꿔보자. 혹시 알아? 아빠가 변할지도 모르잖아?”


치경이가 말했다. 명수와 치경이는 하이파이브를 하고 갈림길에서 각자의 길을 향했다. 두 아들은 곧 집에서 학원으로 향할 것이다. 영진은 아이들이 어떤 방법으로 아빠를 바꿔치기 한 것인지 그 비밀을 알아내고 싶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었지만 말이다. 영진은 명수의 뒤를 밟기로 했다. 어딘가에서 분명 아이들의 비밀이 밝혀질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영진은 명수의 학원 세 개 중, 두 개는 위치를 알고 있었다. 어느 학원부터 가는지 순서도 알고 시간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영진은 명수의 학원 스케줄대로 골목길을 누볐지만 명수의 행로에서는 그 어떤 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이제 영진은 퇴근하고 싶어졌다. ‘남의 집이지만 그래도 집은 편한 것인가 보다.’ 영진은 휴대폰을 열어 기사를 불러냈다. 다시 차를 타고 집으로 가야만 했다. 영진은 혼자서 집에 가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지금쯤 치경의 진짜 아빠 역시도 자기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장님! 뭐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기사가 룸미러를 돌아다보며 물었다. 영진은 그저 미소로 답해주었다. 역시 새로운 아들 치경이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영진은 돌아오는 길에 명수와 치경이의 대화를 떠올렸다. 두 녀석은 서로의 아빠가 부러웠던 것 같았다. 적어도 치경이는 명수의 아빠인 자신이 부러웠었다는 것을 알고 하루만이라도 명수에게 대하듯 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아이들은 내일이면 다시 아빠를 바꿀 것이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아내는 오늘도 무슨 행사가 있는지 집에서 볼 수는 없었다. 영진은 어젯밤 새로운 아내의 등 라인과 하얗고 뱀처럼 매끄러운 피부를 연상했다. 멋진 여자임에는 분명했다. 영진은 평소 원래의 집에서 하던 대로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의 리모콘을 무작위로 돌려댔다. 방송을 보며 한참을 깔깔거리던 중 새로운 아들 치경이가 옆에 선 채 팔짱을 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아이들의 비밀을 알게 된 그는 치경이가 왜 그런 모습으로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영진은 치경이를 옆구리에 끼고 이층 치경이의 방으로 뛰어올라갔다. 그리고 아홉 시가 다 되도록 치경이와 신나게 놀아 주었다. 치경이는 지쳐서 더 놀지도 못한 채 기절한 듯 잠들어 버렸다. 영진은 치경이를 방에 눕혀두고 저택에서의 마지막 밤을 즐기기로 했다. 거대한 욕조에 물을 가득 받아두고 몸을 담근 후 향이 좋은 고급 비누로 몸을 문질렀다. 그리고는 시청각실이나 다름없는 방에서 DVD에 담긴 음반들을 감상했다. 감미로운 밤이 된 것 같았다. 새로운 아내는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영진은 어쩔 수 없이 혼자 침대 누웠다. 어쨌든, 타인의 아내를 탐한다는 것은 죄악과 다름없었다. 어차피 명수 엄마는 평소에도 섹스를 즐기는 편이 아닌데다 요즘엔 영진을 피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가짜 영진에게 몸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그날 밤 늦은 시간, 역시 술에 취해 들어온 영진의 새로운 아내는 영진의 몸을 더듬었다. 하지만 영진은 절대로 몸을 허락할 수가 없었다. 범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영진이 몸을 돌렸다. 새로운 아내는 영진의 사타구니를 손에 쥐었지만 영진은 끝까지 그 혼란 속에서 버텨내었다. 절대로 아무 일이 없이 밤을 보냈다. 아침 식사 후, 영진은 치경이에게 재미있는 표정으로 몇 차례 웃음을 주었다. 새로운 아내는 그런 분위기에 적응이 안 되는지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아침 식사를 마쳤다. 영진은 다시 기사가 운전하는 승용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어제와 마찬가지로 택시를 타고 영수와 치경이가 다니는 초등학교 교문을 지키고 숨어 있기로 했다. 세 시 경이 되어서야 두 녀석이 다시 나타났다. 영진은 근처에서 구입한 모자를 푹 눌러쓰고 아이들을 따라갔다.


“명수야! 우리 아빠 그냥 더 바꾸고 살면 안 될까? 너희 아빠 너무 재미있어!”


치경이가 신이 난 듯 말했다.


“난 싫어! 너희 아빠 너무 재미없어! 난 우리 아빠가 제일 좋아! 너희 아빤 또 술 마시고 들어오셨어! 정말~ 그리고 니가 말한 것처럼 좋은 선물도 안 사오신단 말이야. 난 그냥~ 우리 아빠가 더 좋아!”


명수의 말에 영진은 후련해 지는 듯했다. ‘역시! 내 새끼~’ 이내 영진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영진은 두 아들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지만, 표정을 보고 있는 것처럼 아이들의 표정이 그려져 있었다. 특히, 치경이의 아쉬워하는 표정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두 아들은 골목길 어귀로 들어섰다. 골목 구석에는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노파 한 분이 지팡이를 턱에 괴고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명수와 치경이는 할머니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영진은 멀리서 숨어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대화는 알 수 없었지만, 영진은 노파가 이 사건을 만든 주인공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아이들은 소리쳤다.


“네! 고맙습니다!”


명수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으로 봐서 치경이는 못내 섭섭한 것이 분명했다. 영진은 언제 다시 자기 몸으로 돌아가게 될지 궁금했다. 영진은 다시 기사를 불러냈다. 회사로 돌아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문제는 거기에서부터 시작이었으니까 말이다. 영진은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그리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



*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때린다.


“여보!”


신경질적인 목소리였지만 이건 분명히 영진의 진짜 아내 목소리가 분명했다. 영진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알게 됐다. 벌써부터 행복했다. 그는 눈을 번쩍 뜨고 아내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곤 깊게 키스했다.


“이 사람이 미쳤나? 어제부터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영진의 아내는 꽥 소리를 질렀다. ‘어제부터라니?’ 영진은 순간 묘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어젠?”


“그래! 인정할게! 오랜만에 해서 그런지 정말 잘하던데. 어디서 다른 여자한테 배워 오기라도 한 거야? 그럴 리도 없겠지만.”


영진은 아내의 말에 하체에 힘이 빠져 나가는 듯했다. 영진은 미친 듯이 현관문을 박차고 뛰기 시작했다.



*



“할머니!”


헉~헉~ 영진은 숨을 고르며 소리치듯 할머니를 불러댔다.


“아까~ 꼬마들 소원. 그거 다시 한 번만 더 들어주세요!”


영진은 명수와 치경이가 이야기하던 노파를 붙들고 실랑이 중이다. 영진은 자신의 아내를 겁탈한 치경이 아빠에게 복수해야만 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