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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파고 May 31. 2021

18.성산일출봉 앞에서 정성 가득한 물회를

자꾸 가게 만드는 건 확실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이 집을 처음 찾은 건 2년 전 7월 말경 제주도 환상자전거길 당일치기 종주를 하던 중이었다. 제주도의 서쪽 끝인 고산리에 살 때였는데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 되어서야 성산 고성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로드바이크도 아닌 엄마가 타는 MTB를 타고 간 거라 체력 소모가 상당했다. 난 라이딩할 때 에너지바 같은 걸 먹지 않는 편이라 편의점 네 번 들러 음료를 마신 게 전부였다. 온몸에서 에너지원을 몽땅 갖다 쓴 건지 거의 봉크 일보직전이었다. 기똥차네 식당에서 약 백여 미터는 자전거를 탈 수 없을 만큼 힘이 빠져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근처에 식당이 많이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자전거를 지팡이 삼아 간신히 걸음을 옮기는데 고성리 이장님은 듯한 분의 육성이 마을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아아~ 고성리 주민 여러분께 알립니다. 오늘은 아주 강력한 무더위 때문에 폭염주의보가 발효되었으니 밭일 나가 계신 분들은 쉬엄쉬엄 하시고 가급적 밖으로 나오지 말고 실내나 그늘에서 쉬시기 바랍니다."

제주어가 태반이라 정확하게 들은 건 아니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난 속으로 '내가 미쳤지'를 연발하여 하필 이런 날을 잡았나 싶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234km 중 120km는 왔으니 이제 절반 정도밖에 안 남았으니.

그렇게 온몸의 힘을 짜내 고성리 성산일출봉 근처 식당들이 즐비한 골목을 향했다. 원랜 시원한 냉콩국수를 그리며 달려왔지만 바로 이 집, 기똥차네 식당을 찾아들고 말았다. 제일 가깝기도 했지만 갑자기 물회가 땅긴 것이다.

난 어제까지 이 식당 이름도 모른 채 살았다. 처음엔 정말 너무 힘들어서 맛있는 줄 알았다. 무더위를 잊게 해 준 시원하고 매콤 달달한 물회는 내 몸에서 빠져나간 에너지를 완충시켜준 것만 같았던 거다.

그 후로도 세 번을 다녀왔지만 역시 후회되지 않았다. 확실이 내 첫 느낌은 정확했다. 그렇게 하여 이 집은 내 맛집 목록 중 즐겨찾기에 추가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어제 오전 벵에돔 낚시를 마치고 다시 기똥차네를 찾았다.



성산일출봉 근처에는 관광객을 상대로 한 식당들이 많다. 난 관광객이 아니라서 그런지 외지인들이 즐겨 찾는 식당들은 기피하는 편이다. 물론 맛이 있다면야 그럴 리가 없겠지만 블로그 등 SNS 마케팅으로 과대 포장된 식당들이 많아 그런 식당을 찾아가면 백발백중 후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똥차네를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 곳에서 뜨거워진 몸을 식히며 에너지를 보충하려는 목적만 있었고 더 이상은 걸을 수도 없어서였다.


어제는 평소와는 달리 손님이 제법 있었다. 제주에 관광객이 얼마나 많은지 실감하지 못하지 못한 거라면 다니는 곳이 죄다 관광객이 찾지 않는 곳이어서 그럴 것 같다. 낚시 안 다니면 오름이나 한라산으로 나물 하러 가거나 바다 나가서 낚시나 하고 있을 테니까. 도로에 차량이 많고 환상자전거길을 달리는 라이더가 상당히 많이 보이는 걸로 얼추 느낌은 있다.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인 종업원과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되어 주문 시 주인아저씨가 주문을 받았다. 한치물회보다는 일반생선물회를 선호하는 편이라 주문을 해두고 물티슈로 낚시로 더러워진 손을 문질러 닦아내고 있는데 상이 차려졌다. 색깔부터 매콤 달달함이 전혀 져오는 느낌이다. 물회 구성물도 보면 양배추, 파프리카, 깻잎, 배, 당근 등 다양한 야채가 담뿍 들어있다. 수북이 쌓인 하얀 생선회 살이 군침을 돌게 했다. 물회의 핵심은 물회양념장 아닌가? 진짜 기똥찬 편이다. 구성물은 아쉽지만 물화 국물 만큼은 내 최애 물회집인 속초 봉포머구리집에 비견할 만하다.


이 식당의 상차림은 상당히 제주색이 강렬한데 특히 제주식 게장이 정말 맛있다. 짜지도 않으며 게 살에 풍부하게 스며든 간장이 말 그대로 밥도둑인데 물회 없어도 밥을 비우기에 충분했다. 어쩜 처음 맛보는 느낌일까? 벌써 네 번째 방문인데 말이다. 그만큼 맛이 좋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리라. 전날 바다에 나가 미역을 미역귀째 잘라 왔는데 마침 여기 상차림에 미역도 올라왔다. 집에선 당분간 생미역을 먹게 되겠지만 아무튼 제주에서 제주 미역을 먹는 건 즐거운 일이다.



드디어 물회를 비벼 맛을 보기 시작했다. 밥도 조금 덜어 물회에 말아먹었다. 아직 무더운 시기가 아니라 그런지 얼음같이 차가운 물회가 아닌 점이 아쉬웠지만 그런 건 개의치 않기로 했다. 칼칼하고 시원한 맛의 물회 국물과 풍부하게 담은 야채들이 오전 내내 앉았다 일어났다 뱅에 낚시에 힘들었던 몸뚱이에 에너지를 채워주기 시작했다. 동행자 역시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염치없지만 양이 적지 않았던 게장을 비우고 추가 주문하니 그 역시 아낌없이 내어 주었다. 어느 하나 맛이 없는 찬도 없었고 우린 대화를 잃은 채 물회를 비우고 있었다.


이렇게 바닥을 비우고 계산을 하며 나오며 가격표를 봤다. 물회가 15,000원이라는 데 만족도가 높은 음식이다. 딱히 다른 건 관심이 가지 않았다. 집에 가면 엄마표 밥상에 제주도산 갖은 생선들이 수북하니까 말이다. 육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많은데 제주도민이라고 늘 생선이 풍족하진 않다. 이웃들이 나눠주기도 하지만, 낚시를 다니는 사람이라도 있어야 생선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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