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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부엌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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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파고 Aug 19. 2021

이곳은 회사인가, 식당인가? 다섯 번째 이야기

난생처음 만들어본 묵사발인데 내 맛집 목록의 안성 고삼묵밥보다 맛있다

지난주 지방 출장 돌아오는 길에 공수된 도토리가루가 한 봉지 있었다. 이걸 언제 묵을 쒀 먹나 고민만 하고 있었는데 창고 의자 위에 대충 널브러져 있던 도토리가루를 목격한 대장의 버릴 거냐는 질문에 드디어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엄마가 쒀준 묵을 먹어본 적은 있었어도 직접 묵을 만들어본 적은 없었기에 묵을 쑤는 과정은 봉투에 붙어있는 매뉴얼에 따라야 했다.

도토리가루 1 : 물 5

별로 어려울 것 없는 공식이었다. 다만 이게 얼마나 부푸는지 대충조차 감이 없었기 때문에 약간 고민스럽긴 했다. 어쨌든 만들면 직원들 모두 먹어치울 수 있을 것이니 눈대중으로 대충 퍼서 밥그릇에 담았다. 적지 않은 양 같았지만 일단 만들어보면 알겠지 싶은 생각에 실행에 옮겼다. 가늘게 빻아진 도토리가루는 말 그대로 분말 상태였다. 얼마나 곱게 빻은 것인지 공기 중에 폴폴 날리기까지 했다. 아무튼 조심스럽게 가루를 담고 삼다수를 다섯 그릇 붓고 가열하기 시작했다. 인덕션이라 조리하는데 여러 애로사항이 있어서 처음 만드는 묵이라 신경이 많이 쓰였다.



매뉴얼에 보니 덩어리가 생기기 시작하고 거품이 볼록볼록 올라오면 계속 저으면서 약한 불로 익히라고 되어 있었다.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점점 평소에 먹던 도토리묵 색깔로 변하며 걸쭉해지고 있었다. 이게 얼마나 된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만하면 됐다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가열한 후 넓은 용기에 끓인 도토리 죽을 옮겨 담았다. 이제 식히기만 하면 된다.

! 묵 끓일 때 소금을 조금 넣었고 참기름도 살짝 부었다.



묵사발에 제일 중요한 게 도토리묵이겠지만 육수는 그야말로 맛을 좌우하는 베이스가 될 녀석인데 이거야말로 고민스러웠다. 인터넷으로 묵사발 육수 만드는 방법을 검색했지만 딱히 맘에 드는 건 없었다. 동치미 국물도 없으니 말 그대로 대략 난감이었다. 난 내 나름의 육수 조리법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냉장고에 보니 동치미라고는 할 수 없는 절인 무 통 안에 있던 액체(?)를 들통에 적당량 쏟아붓고 아세로라 진액 한 봉지를 털어 넣었다. 달달하며 씁쓸한 맛이 육수의 맛을 낼 것이란 믿음이 생겼다. 육수 내용물을 열거하자면...

1. 절인 무 국물

2. 아로니아 진액

3. 식초

4. 매실청

5. 간 양파

6. 간 마늘

7. 간 청양고추

청양고추는 제주도에서 키운 건데 서울에서 파는 청양고추보다 훨씬 달고 매워서 맛을 더 부각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넣은 거다. 매콤하니 얼마나 맛있을지 상상을 하며...

아무튼 조미는 평소 하던 대로 감으로 대충 때려잡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육수는 냉동실로 직행했다. 다행인 게 요즘 냉동실 비우는 데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던지 크지는 않지만 어쨌든 들통이라 불릴 만한 녀석이 들어갈 공간이 있었던 거다.





세 시간 정도 지난 시간, 일단 묵을 담은 용기에서 묵이 떨어져 나올지 궁금했는데 뒤집어 흔드니 툭 하고 떨어져 나왔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묵을 도마 위에 올렸는데 이걸 대체 어떤 모양으로 잘라야 하나 싶어 고민이 됐다. 양이 의외로 많다. 두께는 적절해 보였지만 칼질을 여러 번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묵은 탱탱함이 살아 있었다. 어찌나 탱탱한지 맛을 보지도 않았는데 맛이 보장된 것만 같다.



묵 반토막은 보관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저장하고 나머지 반쪽만 가지고 묵사발을 만들기로 했다. 3인분만 하면 되니 다행이었다. 처음 해보는 요리는 처음 가는 여행과 느낌이 비슷하다. 처음이란 건 정말 매력적인 거다. 초반엔 탱글탱글한 묵이 끊어질까 싶어 조심스럽게 다뤘는데 나중엔 자신감이 생겨 칼질이 빨라졌다. 잘라놓고 보니 묵의 양이 결코 적지 않았다. 묵사발이라고 하면 내 기억 속에 강렬하게 박힌 식당이 있다. 그 유명한 안성의 고삼묵밥이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던 거다. 지금 생각해 보니 김가루가 빠지긴 했는데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고삼묵밥보다 맛있게 만든 것 같다.


이 오이는 제주도에서 키워 공수해 온 라오스 오이다. 5~6년 전 라오스에 갔다가 짜리 몽땅한 오이가 너무 맛있어 시장에서 씨앗을 사 와 제주에 심었던 게 시작이다. 다음 해엔 씨앗을 받아 키웠다가 요즘은 인터넷에서 씨앗을 구입해서 키운다. 이 오이는 안 먹어본 사람은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 사이즈도 먹기 좋다.


이 땅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컴퓨터 옆에 땅콩을 두고 까먹다가 불현듯 갑자기 땅콩을 갈아 넣으면 더 고소해질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미리 껍질을 까둔 걸 믹서기에 갈아본 거다. 맛이 없을 수가 없을 거다.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이번엔 계란으로 지단을 만들기로 했다. 왠지 제대로 된 묵사발을 만들어 보리라는 목표가 생긴 거다.


이제 본격적으로 작업이 시작됐다. 냉면그릇에 도토리묵을 쌓은 후 오이를 올리고 계란 지단을 올린 후 참깰 뿌리고 갈아놓은 땅콩가루도 뿌린다.


냉동실에 꺼내온 육수는 반쯤 얼어서 내 가슴을 설레게 했다. 바로 이거거든. 내가 원했던 게~~


나는 모양새가 흐트러지지 않게 그릇 주변으로 육수를 담아냈다. 조심조심. 이게 얼마나 정성스럽게 쌓은 건데. 점점 비주얼이 잡혀가는 중이다. 나도 모르게 침이 고였다.


마지막으로 참기름을 뿌리면 끝!인 줄 알고 어쨌건 이걸 점심이면 식탁이 되어버리는 회의용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게 정말 내가 만든 것이 맞는 걸까? 아직 간을 보지 않아 확신할 수 없었지만 분명히 맛이 있을 거란 자신감이 있었다. 음식 하면서 맛을 안 보는 이놈의 버릇을 고쳐야 하는데 간을 안 봐도 항상 맛이 있기에 그런 것 같다. 자만은 금물인데...


짜잔! 이걸로 끝일 줄 알았다. 아뿔싸!

"김치 어디 갔냐?"

이 한 마디에 뭔가 빠진 것만 같았던 핵심 포인트를 잊을 걸 알 수 있었다. 난 당장에 탕비실로 달려가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 송송송송 잘게 썰어 한 그릇 내어 갔다.

어쩜 이걸 잊을 수가 있단 말인가?


김치가 빠진 녀석은 딱 이 모양이었는데...

김치를 올린 이 녀석은 아주 제대로 각 잡힌 묵사발이 되고 있었다. 김치 하나에 완성도가 이렇게 달라질 줄이야.



이 한 그릇의 묵사발을 위해 난 오늘 무려 한 시간 가까운 시간을 투자했다. 그런데 난생처음 만든 묵사발의 수준이 내 최애 맛집들 중 하나인 안성 고삼묵밥보다 맛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이상의 식도락가로서 훨씬 까다로운 미식가인 대장은 무려 90점이나 주셨고, 다른 직원은 100점 만점을 주었다. 내가 만든 음식은 전부 맛있다나 뭐라나.


아주 바닥까지 싹 비웠다. 이 엄청난 걸 다음에 비슷하게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만들고도 완전히 감동의 도가니였다.

오늘의 저녁식사도 사무실에서 해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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