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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부엌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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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파고 Aug 25. 2021

사무실로 식사 초대를 했다

코로나가 만든 사무실의 새로운 문화

코로나 때문에 사무실에서 밥을 해 먹기 시작한 지 무려 네 달은 된 것 같다. 이젠 주변 식당을 어슬렁거릴 일도 없고 굳이 차를 운전해 멀리 양평도 마다하지 않고 맛집을 찾아다니는 행위도 중단됐다. 맛집을 섭렵하고 다니는 우리 같은 사람이 꼼짝 않고 사무실에서 밥을 해 먹다 보니 단골 식당과 꽤 소원해진 것 같기도 하다. 다행인 게 죄다 입들이 까다로운 사람들이다 보니 내 요리가 빛을 발한다는 거다.

내 요리엔 몇 가지 양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주방에 그런 게 아예 없다고 말하는 게 옳다. 이십 년 넘게 사본 적도 없는 것들 중에 미원 같은 합성감미료가 있다. 당연히 다시다 같은 건 사지도 않고 취급도 않는다. 설탕은 말할 것도 없다. 꼭 단맛을 내야 한다면 꿀이나 올리고당을 쓰긴 하는데 약한 단맛이 필요할 땐 양파, 그보다 좀 강한 단맛을 필요로 할 땐 매실청을 쓴다. 매실청을 만들기 위해 설탕을 쓰니 엄밀히 말하면 설탕을 쓰지 않는다고 할 순 없다. 어쨌든 난 요리에 있어 원 재료의 특징을 최대한 살리는 걸 중요시하는 편이다.

요리는 의외로 창의성을 요구한다. 요리를 배워본 적도 없고 뭔가를 만들 때 책이나 인터넷을 보는 일은 거의 없는 편이라 내가 만든 요리 중엔 듣보잡 음식들이 가끔 있다. 어쨌거나 난 요리를 잘하는 편인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엔 중요한 관계사 대표님을 사무실로 초대해 나의 요리를 선보이기로 하고 감히 초대를 하고 말았다. 외부인에게는 한 번도 시전 되지 않았던 나의 요리가 이번에 큰 고비를 맞게 된 것이다. 내 요리가 정말 맛있는 걸까? 이제 진정으로 객관성 있는 평가가 이뤄질 거라고 생각하니 은근히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꽉 차 버린 냉장고를 비울 생각으로 있는 거 없는 거 다 꺼내 요리를 해온 지라 냉장고 안 가득하던 식자재들이 꽤 줄어들고 없었다.

요리할 때 전혀 부담을 갖지 않는 난데, 손님 대접이라 생각하니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평소 해 먹던 톳밥, 비트 밥, 고사리밥 같은 걸 해볼까 싶었는데 우연히 강황을 얻어 강황 밥을 준비하기로 작정했다.



난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현미쌀을 씻은 후 강황가루를 풀어 한 시간 정도 쌀을 불린 후 밥을 지었다.



오늘은 요리를 하면서 사진을 많이 못 찍었다. 전날 공수해 온 한우 채끝등심을 손질하느라 손이 엉망이어서 스마트폰을 들 수 없어서다.

일단 창고에 있는 제주 단호박, 제주 감자, 양파, 파, 단양 마늘, 제주 청양고추를 꺼내 손질을 시작했다. 모든 재료가 준비된 상태에서 요리를 시작하면 편하다. 씻고 닦고 썰고 붓고 하는 행위가 약 삼십 분 정도 이어졌다. 평소엔 이십 분이면 되는데 십 분을 더 투자했다는 건 평소보다 바짝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증명한 거다. 엄마가 보내준 된장을 풀고 단호박과 감자를 쪼개 넣은 후 파, 청양고추, 양파를 넣고 푹 끓이기 시작했다.



채끝등심에 붙어있던 기름을 다 걷어내고 먹기 좋은 사이즈로 깍둑썰기 하여 들통 사이즈 냄비에 투척했다. 미리 썰어둔 양파, 오이고추, 청양고추, 통마늘과 한우가 잘 어울려 주기를 바라며...

오늘은 후추를 넣지 않고 바질을 담뿍 뿌렸다. 바질향이 간질간질 맛을 올려줄 것 같았다. 죽염을 적당량 뿌리고 아보카도 오일과 참기름을 적당량 넣고 생수를 조금 부었다. 마지막으로 잡내를 줄이고 깊은 맛을 더할 간장 조금, 청주 조금 붓고 센 불로 요리를 시작했다. 고기가 너무 익으면 안 된다. 맛있게 살살 익히기 위해 수시로 휘적휘적! 조금씩 익어가는 게 보인다. 고기를 썰다 조각난 녀석들과 함께 큰 덩이 하나를 잘게 썰어 된장찌개 투척했다. 역시 소고기가 들어가면 찌게의 수준이 높아지게 마련이다.



전기밥솥 아가씨가 밥이 다 됐다는 소식을 알렸다. 너무 뜨거우면 안 되니 나머지 요리가 완성될 때까지 밥을 식히기 위해 뚜껑을 열어 두었다. 이제 다른 준비가 끝나면 밥을 퍼내면 된다.



접시에 한우 볶음을 담아 사진을 남겼다. 역시 그릇이 예쁘면 음식도 맛깔나 보인다. 아직 간을 안 봤는데 짜진 않을까 싶었다. 평소 간을 안 보는 이놈의 고질병이 걱정된 거다. 그런데 의외로 간이 떡 맞고 청양고추 덕에 맛이 기똥찼다.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다더니... ㅎㅎ


단호박채끝된장찌게라고 해야 할까? 양이 적은 감이 있었지만 오늘 식사는 겨우 4명만 하면 되는 자리여서 적당량만 끓였다. 엄마표 된장은 역시 마트에서 파는 된장과 레벨 자체가 다르다. 된장 맛의 깊이를 어찌 표현할까 싶다. 언젠가 글을 쓸 게 있는데 음식은 역시 기본적인 재료에서부터 격이 다르다. 노선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거다. 베이스가 된장국이니 된장이 제일 중요한 거 아닌가?



식사 도중 여수 갓김치 이야기가 나왔는데 냉장고에 있던 걸 다 먹어치운 걸 아시고 여수에서 총알배송을 시킨 녀석이 배송되어 왔다. 삼십 분만 일찍 도착했으면 상 위에 올려졌을 텐데...

주문된 건 세 상자였다. 당연히 한 상자는 손님의 손에 들려 보내졌다. 이 갓김치는 내 평생 먹어본 갓김치 중 그야말로 오 마이 갓! 그냥 갓 레벨의 갓!이다.


처음 오시는 것도 아닌데 빈 손으로 오면 안 될 것 같으셨는지 사무실 옆 유명한 김영모과자점에서 아주 맛깔스러운 파이 세트를 사 오셨다. 포장을 열어보니 먹기 너무 아까운 비주얼 때문에 한참을 구경만 하고 말았다. 김영모과자점은 내가 5년이나 이용한 곳인데... 담엔 누적된 포인트로 평소엔 가격이 두려워 만지지도 못했던 빵을 주워와야겠다. ㅎ




이번에 처음 손님을 초대해 봤는데 어린 시절 집으로 손님을 초대해 파티를 열던 게 기억났다. 예전엔 이웃과 음식도 나눠 먹으며 교류를 가졌었는데 요즘 세상은 많이 팍팍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다음에도 중요한 손님을 초대해 이렇게 식사 대접을 하기로 했다. 모처럼 꽤나 즐거운 식사시간이 된 것 같다. 요리하는 내가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는 건 맛있게 먹어주시는 분들 덕분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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