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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추억소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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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파고 Dec 09. 2021

추억 소환 3, 의리에 무너진 날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었던 상황을 이제야 알 듯한 이유

누군가 합리적 판단을 하지 않고 상식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의심해볼 요가 있다.

난 선배가 많았다.

그중 8년 선배들과 너무 가까웠다.

형수들은 나를 선배들의 애인이라 취급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심지어 선배들은 그런 이점을 활용해 나를 팔아 불가능한 일탈을 하기도 했다는 것도 알게 된 일도 있었다.

역시 비밀이란 없는 거다, 라는 걸 그 당시 알았다.

90년대 선배 둘이 요즘엔 PC방이라고 하는 인터넷 카페를 오픈했다.

국내에 PC방이 거의 없을 때였고 당시 컴퓨터를 무려 50대나 설치한 곳이었는데 하루 매출 100만 원을 넘기는 날이 제법 있었다.

당시 컴퓨터 경력만 20년 가까이 됐던 나는 참새방앗간처럼 들렀고, 알바들이 부족하면 일을 돕기도 했다.

당시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이 출시되었는데 밤을 꼴딱 꼴딱 새우는 사람들이 상당했다.

알바도 상당히 많이 고용해야 했는데 선배는 어쩌다 보니 가정주부 한 명을 고용하게 됐다.

처음엔 알아서 청소도 하고 주부 근성인지 걸레를 들고 구석구석 닦는 등 제법 성실하게 일을 하는가 싶었다.

그런데 한두 달 정도 지나면서 행동거지가 점점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다른 알바들에게 주인인 양 위선을 떨었고, 게으름을 피우더니 급기야 지각에 있어서는 안 될 일도 벌어지기까지 했다.

선배 둘 다 자유롭게 일하긴 했어도 기업에서 중요한 직책이라 저녁에 퇴근하고 잠시 들러 장부나 보고 퇴근하거나 인터넷 카페에서 몇 시간 지내다 들어가기 일쑤였다.

혹은 나와 술자리를 하거나 말이다.

난 가정주부 알바(당시 난 누나라고 부르고 있었다)의 이런저런 문제점을 보다 못해 맘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지적 아닌 지적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 당장에 봇물 터지듯 다툼이 시작됐다.

결과적으로 대화로는 풀지 못했고 이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는 상황이라는 판단에 난 선배에게 사실을 토로하고 말았다.

적어도 난 그게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배는 나를 불러다 놓고 오히려 나를 탓하고 내게 잘못이라 말하고 있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여자가 어떻게 이간질을 했을까 싶었다.

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난 의리를 저버린 선배에게서 신뢰가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화가 났지만 하늘 같은 선배에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오해받는 일, 모함받는 일이 그렇게 역겹고 더러운 일이라는 걸 그때 절감했다.


그리고 20년이 훌쩍 지난 요즘 선배가 왜 그 여자 편을 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더 기분이 나쁜 건, 그걸 이해했다는 거다.

왜 그때 그들이 불륜 관계였다는 걸 몰랐던 걸까 싶기도 하지만 이젠 그런 관계를 말하지 알아도 알아볼 수 있다는 데 찌들었음이 한탄스러운 거다.

점차 순수함을 잃어가고 때가 묻고 뻔뻔해지는 이 삶이라는 건 낯짝이 두꺼워진다거나 삶의 더께가 두꺼워진다는 표현처럼 피해 갈 수 없는 아련한 슬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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