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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두 개의 가슴과 열 개의 머리를 갖고 있다

내가 아닌 나를 만들어라

by 루파고

한 가지 색만 가진 작가는 오래가지 못한다. 일색인 작가의 글은 이 글이 저 글 같고, 새로 쓴 글도 언젠가 본 적 있는 글만 같다. 한 작가의 글을 오랜 기간 읽다 보면 작가의 색을 볼 수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대작가들의 글에서는 그들만의 색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정말 잘 쓴 글일수록 작가의 자아를 파악하기가 힘들다.

글을 쓰는, 그것도 소설을 쓰는 나의 입장에서 이런 표현은 금기시해야 하지만 굳이 이런 걸 언급하는 이유가 있다. 작가는 팩트 폭력과 질타를 두려워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게 때문이다. 작가를 성장시키는 건 다름 아닌 그것들이란 걸 작가들이 모를 리 없다. 난 소설 한 편을 탈고할 때마다 며칠에서 길면 거의 일주일 정도 몽롱한 상태로 지낸다. 캐릭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다. 잘 쓴 글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얼마나 몰두했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가끔 지난 내 글들을 읽다 보면 내가 쓴 글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기억력의 장애인가 싶을 정도이다. 마구 거짓말을 내뱉고 기억나지 않는 척하는 위정자들의 경우와는 다르다.

작가는 뜨거운 심장을 가져야 하고 한편으론 차가운 심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극과 극의 상황을 구상해야 하고 서로 다른 감정으로 캐릭터의 생각을 오가야 하기 때문이다. 오롯이 한 가지 성향으로는 다채로운 캐릭터를 구상하고 이어가기 어렵다. 게다가 열 개의 머리를 가져야 하는 이유도 그렇다. 한의학에서는 사람을 네 가지로 분류했고, 일본의 유명한 혈액형으로 성격을 분류한 엉망의 논리도 있다. 굳이 열 개의 머리를 필요로 한다고 명시한 것도 어찌 보면 억지스럽지만 가능하다면 더 많은 머리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정말 다른 분야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소설이란 걸 쓰려면 정신병자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다양한 컬러를 보유한 뇌를 소유해야 한다. 아니, 그렇게 되도록 스스로를 성장시켜야 한다.

글쓰기를 제대로 배운 적 없이 소설을 쓰는 내겐 어쩔 수 없이 실험적인 글을 써야 했다. 그렇게 소설이란 걸 쓰면서 중요한 사실을 인지하게 됐다. 젠더 부분이다. 양성을 다 가질 수 없기에 타 성의 성향과 생각 본능적인 부분 특히 성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소화할 수 없었다. 작정하고 써본 적도 있지만 간지럽기도 하고 이게 제대로 쓰고는 있는지 스스로 의심만 갔다. 만약 그런 부분을 깨우칠 날이 온다면 좀 더 재밌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진 않을까 싶다.




언젠가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모 대형 출판사 담당자에게 직접 전해 들은 바, 모 유명 작가의 초고를 받아보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했다. 직원들은 모 작가라는 사람이 그 유명하다는 그 사람이 맞나 싶었다고 했다. 회사 입장에서야 매출이 보장된 작가이기에 출판을 결정했다지만 절반 이상을 직원들이 썼다는 그 글이 과연 모 작가의 글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진짜 작가라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하는데 그는 지금도 버젓이 작가라는 타이틀을 쓴다. 글에는 작가의 생각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다수의 자아가 담긴 책은 쓴 편집자들의 공저라고 표기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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