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파고 Oct 11. 2019

잠자는 땅, 시비리
9화 - 전설의 숲

혹시 전설이라는 걸 믿나요? 전설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뜻해요. 우리 시베리아의 동물들에게도 수천 년 동안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있어요. 어떤 전설은 허무맹랑한 것도 있고 실재로 존재했던 것도 있어요. 사실 그것을 믿고 안 믿고는 우리들의 몫인 거죠. 그런데 어떤 동물들은 그런 전설 중에서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것들 때문에 모든 것을 바치기도 해요. 더 이상 어떤 희망도, 방법도 없다고 자포자기할 땐 말도 안 되는 희망에 기대를 하게 되기도 하잖아요.






여기저기서 나이가 많은 동물들의 몸이 아파 낑낑거리는 소리, 어린 동물들의 보채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떤 동물들은 벌써 잠이 들어버렸다. 집을 떠난 지 겨우 첫날밤이지만 사냥꾼을 피해 급히 이동하느라 체력 소모가 심했다. 게다가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거라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동물들의 지도자 역할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동그란엉덩이도 마찬가지였다. 갈색곰 무지큰발, 고슴도치 사각턱, 밍크 땜통, 족제비 꼬리만한뭉치 역시 동물들을 살피느라 쉴 여유가 없다. 시베리안 허스키 화들짝, 흰얼룩호랑이 빠른발, 노루 이글대는눈 그리고 은빛여우 손이와 태니 역시 늙거나 어린 동물들을 보살피기 위해 종일 뛰어다녀야 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아직도 사냥꾼의 습격을 받고 고향을 떠나온 걸 실감하지 못했다.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원래 밤에나 활동하던 야행성 동물들은 낮과 밤이 뒤바뀌었지만 억지로 잠을 청했다. 밤이 깊자 대부분의 동물들이 코를 골며 꿈나라로 골아떨어졌다. 그런 후에야 동물들을 보살피던 지도자들과 숲의 용사들이 한 곳에 모였다. 식량 문제, 향후 계획 등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동물들의 운명이 달려있기 때문에 모두들 정신을 놓을 수가 없었다. 노란여우 할아버지 역시 힘든 기색이 역력했다.

“에헴~ 다들 고생이 많았네~”

노란여우 할아버지는 곧 쓰러질 듯 피곤해 보였지만 새로운 지도자들과 숲의 용사들을 격려했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그나저나 좀 쉬시지 왜 나오셨어요.”

동그란엉덩이가 노란여우 할아버지를 부축하며 말했다.

“아직은 버틸 만해. 지금은 나도 도와주어야 하는데, 내 몸 하나 편하자고 에헴~ 누워 있을 수는 없지. 다들 모여서 대책회의를 하려나 본데. 내가 제때 찾아왔군.”

노란여우 할아버지는 수풀 위에 자리를 잡고 엎드렸다.

“잘 오셨어요. 어차피 저희 생각만으로는 좋은 대책이 나올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빠른발이 아니었다면 우리 숲 속 동물들이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튼 빠른발에게 다시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아니~ 제가 뭘요. 저도 이제는 노란민들레숲 식구인데 당연한 일을 한 걸요.”

빠른발은 겸손하게 답했다.

“알겠네. 에헴~ 하지만 너무 겸손할 필요는 없어. 에헴~ 충분히 칭찬받을 행동을 한 거야. 영웅적인 행동이기도 하고 말이지.”

노란여우 할아버지는 앞발을 모아 엎드린 후 턱을 괴며 말을 이었다.

“에헴~ 혹시 말이야, 동그란엉덩이 자네는 무지개마을로 가려고 하는 겐가?”

“네~ 그렇지 않아도 지금 그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어요.”

동그란엉덩이의 말에 몇몇 동물들이 깜짝 놀라며 눈을 반짝였다. 동그란엉덩이는 눈빛을 의식하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우리 숲의 동물들이 믿지 않을 것 같아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저는 무지개마을 입구까지 다녀온 적이 있어요. 물론 뾰족귀가 저를 데리고 간 거지만.”

“글쎄~ 난 자네 말을 믿네. 에헴~ 하지만 다른 동물들은 무지개마을이 상상 속에만 있는 곳으로 알고 있지. 에헴~ 무지개마을은 우리 동물들에게는 그저 전설로만 알려진 곳이지 않나? 에헴~ 솔직히 말하자면, 에헴~ 나는 자네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지는 않아. 에헴~ 하지만 무지개마을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건 믿을 수가 없어.”

노란여우 할아버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달리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사냥꾼들은 숲을 태우고 멀리까지 사냥을 다니고 있어요. 사냥꾼 마을도 너무 많아지고 있고요. 노란민들레숲은 물론이고 호수 건너편 숲에 사는 동물들 역시 사냥꾼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 거란 말이에요.”

동그란엉덩이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현실적으로 동그란엉덩이의 말이 하나 틀린 게 없었다. 도망치거나 피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란 걸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가죽이 두꺼운 동물조차도 버텨 내기 힘든 시베리아의 겨울이 아주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북극성 방향으로 더 올라간다는 건 사실상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동그란엉덩이가 무지개마을의 입구까지 다녀온 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위치도 정확하지 않다. 길을 알고 있던 뾰족귀도 죽고 없다. 확실치 않은 기억만 믿고 전설 속의 무지개마을을 찾아간다는 건 무모한 계획이다. 어쩌면 무모하다기보다는 어렵게 죽는 방법을 택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무지개마을로 가는 건가요?”

태니가 물었다.

“응~ 일단은 그래~”

동그란엉덩이가 대답했다. 태니와 손이는 어릴 때부터 뾰족귀와 동그란엉덩이의 모험담을 수도 없이 들었다. 특히 무지개마을 모험은 그 무엇보다 환상적이었다. 그런데 노란여우 할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노란민들레숲의 어떤 동물도 무지개마을로 가는 길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달리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무지개마을로 가는 길이 어디까지 기억나세요?”

손이가 물었다.

“응~ 나도 최대한 기억해보려고 노력하는 중인데. 지금까지 기억나는 건 『얼지않는연못』을 지나서 갔다는 거야. 거기까지 간다면 다시 기억날 것 같아. 무지개마을까지 가는 길은 굉장히 멀고 긴 여행이었지만 아름답고 멋진 것들을 많이 보았어. 너희 할아버지께서 들려주셨던 것들보다 훨씬 멋진 여행이었어.”

잠시지만 동그란엉덩이의 표정은 낭만적인 기억에 푹 빠진 듯했다.

“에헴~ 잠깐. 자네는 혹시 비밀의 동굴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는지 모르겠네.”

노란여우 할아버지가 물었다. 동물들이 모두 노란여우 할아버지에게 집중했다.

“저는 뾰족귀와 비밀의 동굴을 수도 없이 다녀서 제법 잘 아는 편이에요.”

동그란엉덩이였다.

“에헴~ 그럼 자네는 통로를 몇 개나 찾았나?”

“우리 숲 쪽으로 연결된 곳까지 해서 세 개 찾았어요.”

“그렇군. 나도 세 개 밖에 모르는데. 안타깝구먼. 에헴~ 그 동굴의 입구가 다섯 개인 것은 알고 있지?”

“네. 뾰족귀가 살아 있었다면 나머지 두 개를 더 찾았을 거예요. 그런데 그게 왜요?”

동그란엉덩이는 의아한 듯 물었다.

“자네는 그 전설을 듣지 못했던 모양이구먼. 에헴~ 그 통로들 중 하나는 무지개마을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걸 모르는가?”

노란여우 할아버지의 말에 모두들 매우 놀라는 눈치다.

“그건 알고 있었지만 제가 찾은 동굴 입구 세 개는 모두 북극성 방향이 아니었어요. 아마도 제가 아는 입구들은 모두 아닌 것 같아요. 그 입구만 알고 있다면 모두들 안전하고 빠르게 갈 수 있을 텐데. 아쉽네요.”

동그란엉덩이의 아쉬움이 목소리에서 그대로 느껴졌다.

“잠깐만요! 저도 입구 세 개를 알고 있긴 한데요. 다들 세 개씩 알고 있다고 그랬죠?”

이번에는 무지큰발이었다.

“에헴~ 그렇네.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비밀의 동굴을 알고 있는 건가? 에헴~ 노란민들레숲 동물들도 비밀의 동굴에 대해서는 그저 존재만 알고 있지 신성시하는 곳이라 에헴~ 일부러 찾아가거나 하지 않는 곳인데~”

“그건~ 음~ 제가 뾰족귀를 처음 만난 날 알게 됐어요. 제가 위험에 빠졌을 때 동굴에서 빠져나왔던 입구가 반짝반짝돌멩이마을이었어요. 그때 뾰족귀는 동굴의 입구가 전부 다섯 개라고 말해 줬어요. 뾰족귀는 세 개 밖에 찾지 못했다면서 나중에 나머지 입구를 찾아보자고 했어요. 하지만 뾰족귀는 저를 구하려다 죽게 됐고, 그 후 저는 나머지 두 개의 입구를 찾기 위해서 혼자 동굴 속을 헤매고 다녔어요. 결국 제가 살던 흰나비가춤추는숲과 연결된 입구와 반짝반짝돌멩이마을 입구 말고 독수리바위 입구를 찾았어요. 뾰족귀는 산이비치는호수가있는숲과 연결된 통로가 있다고 했지만 그곳은 찾을 수 없었어요. 혹시 독수리바위 입구가 무지개마을로 가는 입구 아닐까요?”

무지큰발은 자기가 아는 대로 설명을 하긴 했지만 딱히 자신은 없는 말투였다.

“음~ 자네~ 용감하구먼. 에헴~ 역시 숲의 용사가 되기에 충분한 담력을 가졌어. 비밀의 동굴에 들어갔다가 살아서 나오지 못한 동물이 정말 많다네. 에헴~ 내가 보기엔 자네가 다른 입구를 찾은 것은 정말 대단히 운이 좋은 거라고 할 수 있어.”

노란여우 할아버지는 무지큰발을 칭찬했다.

“그렇지 않아도 동굴 안에서 길을 잃어 굶어 죽을 뻔한 적도 있어요.”

“에헴~ 아쉽게도 자네가 알고 있는 독수리바위 쪽 입구는 북극성의 반대쪽 입구라네. 우린 다른 입구 하나를 찾아야 해! 에헴~”

동물들은 아쉬워했다. 안전하고 빠르게 숲을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이다.

“할아버지~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태니였다.

“에헴~ 태니가 좋은 꾀가 있나 보구나.”

“꾀는 아니고요. 그저 좋은 생각이 아닐까 하는 거예요.”

이번에는 관심이 태니에게 모아졌다.

“지금 우리는 동굴의 다섯 개 입구 중에 네 개를 알고 있잖아요. 이제 나머지 하나만 찾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렇지!”

“함께 찾는 건 어때요? 어차피 사냥꾼이 이 쪽으로 올 것 같지도 않고요.”

“그건 안돼! 에헴~ 여태까지 찾지 못했던 것을 이제야 찾을 수 있다고 어떻게 보장하지? 에헴~ 만약 입구를 찾지 못한다면 우리 노란민들레숲의 동물들은 한 곳에 모여서 우리를 죽여 달라고 부탁하는 꼴이 되는 거야. 에헴~ 난 동의할 수 없어. 에헴~ 태니의 생각은 좋지만 지금은 숲의 동물들의 목숨을 담보로 모험을 할 수는 없어.”

노란여우 할아버지는 태니의 의견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강경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동굴 탐사대를 만들면 어떨까요? 어차피 이 속도라면 동물들이 호수까지 가는 시간도 오래 걸리니까요. 호수로 가는 길도 동굴 입구 근처를 지나가야 하잖아요. 동물들을 이끌고 동굴 근처까지 가려면 이틀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동굴 탐사대가 이틀 안에 나머지 입구 한 개를 찾아낸다면 동물들이 동굴로 이동할 수 있어요. 제 생각엔 우리가 호수 쪽으로 간다고 해서 무조건 안전하다는 보장도 없어요. 거기에도 사냥꾼들이 지키고 있다면 모든 계획은 깨지게 되고 다른 대안이 없잖아요.”

동그란엉덩이의 새로운 제안이다.

“저도 동그란엉덩이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무지큰발이 동그란엉덩이의 의견에 맞장구쳤다.

“저도요.”

“저도 동그란엉덩이 생각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도 비슷합니다.”

다른 동물들 역시 동그란엉덩이의 의견을 따르고자 했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동그란엉덩이의 의견을 따르도록 하지. 에헴~ 그러면 동굴 탐사대는 누가 지원할 텐가? 동굴 속에서 길을 잃으면 굶어 죽을 수도 있어. 게다가 무지개마을로 가는 지름길을 발견하지 못하면 모험의 의미도 없어. 에헴~ 그리고 이틀 안에 도착하지 않으면 이미 모든 동물들은 동굴 입구에서 점점 더 멀어져 버릴 거야. 그러면 다시 돌아오기 힘든 결정을 해야 할 거야. 에헴~ 그러니까 생각 많이 하고 결정해 주기를 바라네.”

노란여우 할아버지의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결코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제가 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최근에 비밀의 동굴에 갔던 건 저 밖에 없을 것 같아요. 대신에 저와 함께 갈 동물들이 필요합니다. 동굴 속은 미로 같아서 갈림길이 나오면 흩어져서 찾아야 할 수도 있거든요. 발이 빠르고 용기 있고, 음~ 그리고 기억력이 좋아야 해요. 저는 머리가 좋지 않아서 힘들었어요.”

무지큰발이 비밀의 동굴탐사에 앞장섰다.

“저도 갈게요.”

태니였다.

“저도 가겠습니다. 저도 노란민들레숲을 위해 힘쓰고 싶습니다.”

빠른발이었다. 태니를 제외한 무지큰발과 빠른발은 다른 숲에서 온 동물들인데 죽을지도 모르는 일에 자발적으로 지원했다.

“에헴~ 무지큰발과 빠른발이 나서서 움직인다면…… 정말 고맙구먼!”

노란여우 할아버지는 진심으로 고마운 표정이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더 큰 도움을 받았었는데 이번에는 저도 큰 일을 하게 된 것 같아서 오히려 더 뿌듯한 걸요.”

빠른발이 말했다.

“저도 뾰족귀에게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이미 사냥꾼에게 죽은 목숨이었을 겁니다. 저는 이 임무를 하다가 죽게 되더라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비밀의 동굴에서뿐만 아니라 산불 때부터 뾰족귀와 인연이 되어 목숨까지 건지게 된 무지큰발은 뾰족귀에게 은혜를 갚겠다는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잠자는 땅, 시비리 8화 - 노란민들레숲의 최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