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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파고 Oct 11. 2019

잠자는 땅, 시비리 14화 - 바위산

우리는 북극성을 바라보며 계속 걸어갔어요. 동물들은 고향과 가족을 잃은 마음만큼이나 발걸음도 무거웠어요. 다들 너무 힘들어했어요. 우리 가족도 아빠 뾰족귀를 잃었기 때문에 가족을 상실한 슬픔을 알고 있어요. 물론 그들의 슬픔은 우리와는 많이 다를 것 같았어요. 만약 그들이 늑대들의 꾀에 빠지지 않고 계속 엄마의 주장을 따랐더라면 그런 슬픔은 없었겠죠. 하지만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을 되돌릴 수 없다는  모두 잘 알고 있었어요.

엄마는 오래된 기억을 더듬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아빠 뾰족귀와 모험을 떠났던 길은 지금의 길과 전혀 달랐어요. 자신감 넘치던 엄마는 막막해지고 말았어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는 길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잖아요. 엄마는 알고 있었어요. 도중에 포기하면 모든  허사가 되어 버린다는 것을 말이죠. 지금까지 목숨이 오가는 힘든 고비를 여러 번 헤쳐왔던 엄마였지만 앞으로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또 어떤 사고가 날 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고민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없지만 말이죠. 아니나 다를까 우리의 길에는 생각지도 못한 장애물이 나타나고 말았어요.






살짝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자 거대한 절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여기부터는 노란민들레숲에 살던 어떤 동물도 가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들어본 적도 없는 미지의 세계인 것이다. 앞에는 절벽, 뒤로는 호수였다.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어쩌면 운에 맡겨야 할지도 모른다. 숲을 빠져나오자마자 맞닥뜨린 절벽은 앞으로의 고난스러운 여정을 예고하고 있었다. 호수 건너 사냥꾼들이 언제 추적해 올지도 알 수 없었다.

“제가 절벽 위로 올라가서 길을 살펴볼게요. 아무래도 이런 길에 익숙한 저희들이 도움이 될 거예요.”

절벽 타기로 유명한 산양들이 다가와 말했다. 딱히 대단한 능력이 없어서 평소엔 존재감이 없던 동물이었다.

“우리 산양들을 이끌고 저 위에서 길을 찾아볼게요.”

산양들의 우두머리 격인 반짝이는뿔이 말했다. 동그란엉덩이는 힘없는 동물도 나름 각기의 장점이 있고 극한 상황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에 거듭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동그란엉덩이는 고마운 마음으로 산양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다른 동물들이 안전하게 올라갈 수 있는 길도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부탁과 함께였다. 그리곤 빠른발과 화들짝에게도 다음 임무를 부탁했다. 절벽 아래 양쪽으로도 탈출할 방법을 찾아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빠른발과 화들짝은 원래 숲에서 태어나고 자란 동물은 아니었지만 숲의 동물들을 위해 봉사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게다가 달리기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최고의 선수들이었다. 동물들은 한시라도 빨리 사냥꾼들에게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야 했다. 동그란엉덩이는 세 방향의 정보를 모으면 좀 더 안전한 탈출로를 빨리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다른 동물들은 휴식도 취하고, 먹을 것도 찾고, 또 어떤 동물들은 혀로 상처를 핥았다.

해가 기울어 가면서 절벽 아래 어둠이 짙어질 무렵 산양들이 절벽에서 내려왔다. 동그란엉덩이가 산양들에게 달려가는데 빠른발과 화들짝도 헐떡거리며 도착했다.

“해가 지는 쪽에는 사냥꾼 마을이 있어요. 다행히 제가 갔으니 망정이지 빠른발이 갔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해가 지는 쪽으로 달려갔던 화들짝이 이름처럼 화들짝 놀란 표정을 하며 소식을 전했다.

“해가 뜨는 방향엔 또 다른 절벽과 호수로 막혀 있어요. 호수는 끝도 보이지 않았어요. 호수는 해가 뜨는 방향으로 나 있어요. 북극성 방향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어요.”

엄청난 달리기 속도를 가진 빠른발 역시 아직까지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꽤 멀리까지 다녀온 것 같았다. 전설에 의하면 무지개마을로 난 동굴 입구로 나가면 무지개마을로 갈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다들 막다른 길뿐이다. 화들짝이 다녀온 방향이 전설이 말하는 길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있었다. 그렇지만 그 길로 가다가는 자칫 사냥꾼들에게 모두 죽임을 당할 게 뻔했다. 이제는 산양이 가져온 소식만 남았다. 

“어때요?”

동그란엉덩이가 반짝이는뿔에게 물었다. 희망이 사라진 표정이었다.

“아직은 알 수 없어요. 제가 다녀온 지점까지는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았어요. 거기서부터는 발이 빠르고 체력이 좋은 녀석들을 보냈어요. 가급적 바위산 끝까지 다녀오라고 했어요. 녀석들은 체력이 좋으니까 새벽이면 돌아올 거예요. 일단은 기다려 보자고요. 어차피 밤에 움직이는 건 힘들 테니까.”

기다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동그란엉덩이는 모든 동물들에게 새벽까지 쉬면서 기다리자고 했다. 정작 체력을 비축해야 한다던 동그란엉덩이 자신은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저 불안하기만 했다.

반짝이는뿔이 말한 대로 해가 뜰 무렵이 되자 젊은 산양 네 마리가 가뿐한 발걸음으로 가파른 절벽을 뛰어 내려왔다. 산양들은 평지를 걷는 것보다 더 익숙하게 절벽을 뛰어다녔다. 산양들이 내려오는 걸 발견한 동물들은 무지개를 본 것처럼 넋을 놓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동물들은 처음으로 산양들의 능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길이 있어요! 좀 위험하긴 하지만 다른 동물들도 충분히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산양들이 절벽을 내려오는 동안 떠날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동그란엉덩이와 동물들은 반짝이는뿔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산양들은 다른 동물들의 앞뒤에서 길잡이 역할을 했다. 동물들이 힘들어하는 구간에서는 산양들이 동물들의 엉덩이를 뿔로 밀어주었다. 발을 헛디뎌 떨어질 뻔한 아찔한 순간들도 있었지만 추락한 동물은 한 마리도 없었다. 모든 게 산양들 덕분이었다.

해가 거의 중천에 뜰 무렵이 되어서야 동물들은 낙오 한 마리 없이 절벽의 정상에 설 수 있었다. 절벽 위는 너른 평원 같았다. 높은 곳에 올라 보니 멀리 노란민들레숲이 한눈에 들어왔다. 엄청나게 크게만 느껴졌던 숲을 위에서 내려다보니 그리 크지 않아 보였다. 멀리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사냥꾼 마을도 보였다. 노란민들레숲 근처에 사냥꾼 마을이 새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만약 동물들이 탈출하지 않았다면 하루가 멀다 하고 사냥꾼을 피해 다녀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다 숲을 완전히 불태워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동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여기 이름을 『돌아올수없는절벽』이라고 지으면 어떨까요?”

태니가 말했다.

“왜?”

동그란엉덩이가 태니를 품에 안으며 물었다.

“우리 숲으로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래요. 우리 고향이 영원히 없어지는 거잖아요.”

“아냐. 고향은 사라지지 않아. 나중에 사냥꾼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다시 돌아오게 될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고향은 우리 마음속에,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 있는 걸~”

“네. 엄마. 그렇긴 해요.”

“손이야. 태니야. 흔히 고향이란 태어나고 자란 곳을 말하는 것이긴 해. 하지만 새롭게 살아가는 곳이 고향보다 더 좋을 수도 있는 거야. 고향은 추억 속에 있는 거야. 추억 속으로 다시 돌아갈 순 없잖아. ”

“엄마! 그럼 혹시 무지개마을에도 사냥꾼이 쳐들어와서 또 어딘가로 이사를 가야만 한다면 무지개마을도 우리 고향이 되는 건가요?”

이번에는 손이가 물었다.

“손이야. 고향이라는 건 그저 단어에 불과한 거야. 너의 마음에 좋은 추억을 담고 있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고향인 거야. 태어난 곳은 그저 태어나기만 한 곳일 뿐이야. 네 추억이 없다면 말이지. 그래서 결국엔 네 고향은 한 개도 될 수 있고 두 개, 세 개 아니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어. 네 추억이 있다면……”




동물들은 하루 종일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바위 위를 걸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동물들은 가끔씩 뒤를 돌아보았다. 두고 온 집과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족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 동물들의 대열은 끝이 보이지 않게 이어졌다. 동물들은 호수를 건너온 이후로 물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해 갈증이 심했다. 다들 고통스러웠지만 살겠다는 의지가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바위산에서의 첫 번째 밤은 세찬 찬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추위에 떨어야 했다. 연약한 어린 동물들은 배고픔에 울다 잠이 들었다. 동물들은 세찬 바람을 피해 서로 부둥켜안고 자야만 했다.

다음 날 해가 뜨고 길을 나서자 곧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잠깐의 오르막을 지나고 평지가 나올 무렵 그들의 눈앞에 넓은 숲이 나타났다. 조그만 옹달샘도 있었다. 동물들의 눈엔 절벽 위 아름다운 숲의 모습이 펼쳐졌다. 대부분의 동물들이 여정을 멈추고 자리를 잡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노란민들레숲의 동물들이 머물기엔 터무니없이 작은 숲이었다. 숲 속으로 들어서자 많지는 않지만 절벽 아래쪽 숲에 사는 동물들과는 영 다르게 생긴 동물들이 살고 있었다. 그곳 동물들 또한 신기한 듯 모여들었다. 사냥꾼 같은 존재도 모르는 걸로 봐서는 오랜 세월 외부와 단절된 곳이 분명했다. 동물들은 그 숲을 『숨은숲』이라고 불렀다. 예상했던 대로 숨은숲은 넓지 않아 얼마 걷지 않고도 지나칠 수 있었다. 숨은숲의 동물들은 노란민들레숲의 동물들이 지나가는 행렬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작은 옹달샘은 노란민들레숲의 동물들이 모두 마셔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다음날 밤 역시 딱딱한 바위 위에서 자는 수밖에 없었다. 의외로 넓고 큰 바위산도 고생스러웠지만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기약 없는 여정이 동물들의 밤을 더욱 고단함으로 이끌고 있었다. 다만 이 여정이 얼마나 더 길어질지 걱정이었다.




삼 일째 오후 늦게 바위산의 끝이 보였다. 동물들은 젊은 산양들이 하룻밤 사이에 이곳까지 다녀왔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이제는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 내리막길은 오르막길보다 더 힘들고 더 위험했다. 불행한 일이지만 동물 몇 마리가 발을 헛디뎌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높이만 보아도 동물들의 생사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공포와 불안으로 다들 벌벌 떨었다. 하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내려가야만 했다. 절벽 타기의 고수들인 산양들조차도 도와줄 수 없는 위험한 길이었다. 그렇게 높은 절벽은 아니었지만 모든 동물들이 절벽을 내려오기까지는 하루 종일 걸었던 것보다 오래 걸렸다. 먼저 내려온 동물들은 다른 동물들을 생각할 틈도 없이 주저앉아 버렸다. 다리가 후들거려 도와줄 수도 없었고 정신도 혼미한 상황이었다. 힘이 세든 약하든 덩치가 크던 작던 모든 동물들이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동물들은 절벽 아래에서 삼 일째 밤을 보내야만 했다. 역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지만 절벽을 내려오느라 혼미해진 정신 때문에 먹을 것을 찾아다닐 만한 기운도 없었다. 노란민들레숲을 떠나던 마지만 날보다 피곤하고 괴로운 날이었다. 모두 기절한 듯 잠이 들어 버렸다. 그날 밤엔 칭얼대는 어린 동물조차 없었다.





“태니! 손이~ 빨리 일어나! 어서!”

동그란엉덩이는 어린 두 아들을 흔들어 깨웠다.

“아이~ 엄마~ 조금만 더 자고 싶어요.”

손이는 한쪽 눈만 뜨고 더 자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태니는 엄마의 말을 듣지 못한 척 코까지 골았다.

“어서 일어나. 엄마 좀 도와줘. 빨리~ 그렇지 않으면 엄마 혼자 갈 거야.”

동그란엉덩이는 다시 한번 아이들을 다그쳤다. 그제야 태니와 손이는 두 발을 웅크려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알았어요. 뭘 도와드리면 돼요?”

손이가 먼저 일어나서 나섰다.

“미안해 얘들아. 너희도 힘이 들겠지만 근처에 먹을 게 좀 있는지 찾아봐야겠어. 여기가 어딘지도 잘 모르겠고 말이야. 빠른발하고 화들짝은 벌써 저 앞에 있는 숲으로 들어갔어. 동물들을 찾아 물어보겠다고 말이야.”

“우리도 형들에게 모두 맡겨 놓고 잠만 잘 수는 없죠. 그럼 저희는 어디로 갈까요?”

태니가 나섰다.

“그래~ 역시 내 아들들은 정말 멋진 녀석들이야. 너희 둘은 절벽을 왼쪽으로 끼고 가봐. 무지큰발 아저씨는 오른쪽으로 가시라고 할 거야.”

“무지큰발 아저씨는 어디 있는데요?”

“잠꾸러기인지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어. 겨울이 되면 곰들은 잠이 많아지나 봐!”

“히히~ 그럼 무지큰발 아저씨가 꼴찌네요? 태니, 빨리 가자~ 엄마 다녀올 게요.”

“그래~ 너무 멀리 가지 말아. 너무 멀면 동물들을 데리고 가기도 힘들어. 우리가 꼭 멀리까지 가야 한다면 무지큰발 아저씨 방향으로 움직여야 할 거야~”

“네. 알겠어요.”

태니와 손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후다다닥 소리를 내며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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