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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파고 Oct 11. 2019

잠자는 땅, 시비리
15화 - 한스의 추적

곧 해가 뜨려는지 하늘이 파랗게 변해가고 있다. 태니와 손이는 절벽에 가려 햇빛이 바로 비치지 않는 곳에 있었다. 하루 중 어느 지점인지 전혀 느낌이 없었다.

“손이형! 우리 이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아무래도 너무 멀리 온 것 같아.”

태니가 말했다. 제법 멀리까지 왔지만 절벽 근처에는 먹을 수 있을 만한 것의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동물 한 마리조차 볼 수 없었다.

“잠깐만~ 킁킁~”

손이는 뭔가 냄새를 맡은 듯 코를 킁킁거리며 두리번거렸다. 손이는 태니보다 냄새를 잘 맡는 편이다. 그래서 태니는 손이의 코를 의심하지 않았다.

“형! 무슨 냄새야?”

“응? 글쎄~ 아마도 사냥꾼 같은데…… 왠지 익숙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형! 장난하지 마. 무섭단 말이야!”

“아냐! 정말 사냥꾼이 맞아! 이 근처에 있는 것 같아.”

“정말이야? 그렇다면 큰일인데…… 우리와 멀지 않은 곳에 사냥꾼이 있다면 엄마가 있는 곳도 위험하잖아.”

“그러게 말이야. 큰일이네~ 어쩌면 좋지?”

손이와 태니 둘 다 눈앞이 깜깜 해지는 기분이었다. 심각한 문제였다.

“형! 그러면~ 우리가 사냥꾼을 유인하는 게 어때?”

“그러다 잡히면 어쩌려고?”0

“만약에 우리 둘 중 한 마리만 잡혀야 한다면 그건 내가 할 테니까 형은 빨리 엄마에게 가서 알려! 내가 사냥꾼들을 반대 방향으로 유인하겠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위험해져!”

“아니야! 그럼 내가 하는 게 낫겠어!”

“아니야. 내가 형보다 훨씬 빠르잖아. 형은 금세 잡혀버리고 말 거야. 난 사냥꾼을 유인해 본 경험도 있으니 내게 맡겨줘.”

한참을 옥신각신하던 끝에 결국 태니의 의견에 따르기로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겼다. 둘은 조심조심 숨죽이며 사냥꾼의 냄새가 나는 곳을 향해 걸었다. 사냥꾼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 기척을 들키게 된다면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행히 사냥꾼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듯했다. 태니와 손이는 수풀 뒤로 몸을 잔뜩 낮추었다. 다행히 사냥꾼은 혼자였다.

“형! 저 사냥꾼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거리가 멀지는 않았지만 사냥꾼이 등을 지고 있어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사냥꾼 몸의 태가 꽤 익숙해 보였다.

“태니! 저 사냥꾼! 아무래도 한스 같지 않아? 아니, 한스가 분명해! 나는 정확하게 기억해. 절대 잊을 수 없어. 그래서 냄새도 기억이 났던가 봐.”

“형! 그렇다면 한스가 우리를 해치지는 않을 거 아냐?”

“아냐! 그건 알 수 없어! 그땐 그랬겠지만 이번에도 또 놓아준다는 법은 없잖아.”

“하긴 그렇네~ 그럼 일단 형은 엄마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려줘. 근처에 사냥꾼들이 더 있을지도 모르니까. 동물들 모두 빨리 이동해야만 해.”

“태니. 정말 조심해야 해! 여차하면 도망쳐. 다른 생각하지 말고. 알았지?”

손이는 태니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무조건적인 명령이 깃든 표정이었다. 태니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한스는 숲의 가장자리에서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이제 아침식사를 하려던 참인지 뭔가를 요리하고 있었다. 태니는 손이를 엄마에게 보내고 한스를 감시했다. 문제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태니의 코를 간지럽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이었던 태니에게 있어 한스의 음식 냄새는 도저히 참기 힘든 고문이었다. 태니는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태니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은 배고픈 것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상기했다. 그러나 무언가에 홀린 듯 점점 자기도 모르게 맛있는 냄새에 더욱 깊이 빠져들고 말았다. 태니의 입에는 침이 흥건하게 고였다. 입은 어느새 헤~ 하고 벌어져 있었다. 벌어진 입 사이에서는 침이 쭈우욱 늘어져 바닥에 닿았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태니는 한스를 감시하는 건지 음식을 감시하는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입 주위 땅바닥은 벌써 축축했다.

“얘! 배고프니?”

음식인지 한스인지 정신이 팔려 있던 태니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야! 말 걸지 마! 에휴~ 정말 맛있어 보인다. 그렇지? 그리고 너도 조용히 말해야 돼. 들키면 큰일 나!”

태니는 한스의 요리에서 시선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너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너 이름이 태니 맞지?”

누군가는 다시 또 말을 걸었다.

“거참! 조용히 하라니까. 나는 한스를 감시해야 돼!”

태니는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래? 한스가 먹는 거야?”

누군가가 자꾸 질문을 했다.

“아이~ 정말~ 한스는 먹는 게 아니야. 저기 사냥꾼이 한스야. 먹는 거는 음~냐~ 정말 맛있어 보인다. 그렇지?”

태니는 다시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렇게 배가 고파?”

“응~ 어제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어. 정말 배고파~”

“그럼 조금만 나눠서 먹자고 그래. 쩨쩨하게 먹는 것 가지고 그래?”

“안돼. 들키면 큰일 나. 나를 죽일지도 몰라!”

“아니야! 저 인간은 나쁜 녀석이 아닌 걸. 그냥 가서 같이 먹자고 해봐!”

누군가가 자꾸 말을 걸어왔다. 신경질이 난 태니는 결국 한 마디 쏘아붙였다.

“야! 너 저리 안가?”

태니는 그제야 자신이 알 수 없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분명히 혼자 있었는데 말이다. 상황을 깨닫고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어? 대체 뭐지? 이상한 일이네…… 배가 고파서 그런가?’

태니는 배가 고파 헛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번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정신을 차린 태니는 다시 한스가 있는 곳을 보았다. 그런데 태니의 바로 눈앞에, 그것도 바로 앞에 한스가 보였다.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한스가 태니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한스 머리 위에는 인간과 비슷하게 생긴 조그만 여자 아이가 앉아 있었다. 새처럼 날개가 달려 있는 여자 아이였다. 태니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여태까지 지니고 있던 모든 용기가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태니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뇌가 멎어버린 것만 같았다.

“우리~ 두 번째 만났구나. 네 이름은 뭐니?”

한스가 말했다.

‘어? 한스가 말을 하네? 내가 한스 말을 알아들었어! 어떻게 된 거지?’

태니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멍한 표정만 하고 있었다. 여자 아이는 답답한 듯 입을 다시더니 다시금 말문을 열었다.

“너~ 정말 겁쟁이구나? 한스가 네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잖아. 너희 둘은 이미 아는 사이라며~ 참! 나는 유리스야. 요정이지. 난 오래전에 네 엄마와 아빠도 만나봤었는데~”

태니는 여자아이가 요정이라는 동물이고 이름이 유리스라는 설명을 듣고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 어! 어……”

태니는 영문을 알 수 없어서 멍청해졌다. 대답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너 알고 보니 바보구나? 너희 엄마 아빠는 제법 영리했었는데.”

“아냐. 아냐. 너는 어떻게 우리 엄마 아빠를 안다는 거지?”

태니는 의아한 듯 묻는 와중에 엄마 아빠의 모험 이야기 속 요정의 숲 여행을 기억해냈다.

“혹시~”

태니는 말을 잇지 못했다.

“혹시라니? 네가 생각하는 그거 맞아~”

유리스는 태니의 마음속을 훤히 읽고 있는 듯이 말했다.

“내 생각을 다 읽고 있는 거야?”

“응~ 당연하지. 우리 요정은 그냥 다 알아.”

“그런데 한스는 어떻게?”

태니는 한스와 유리스라는 요정이 함께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응? 한스하고 내가 같이 있으니까 그렇게 이상한 거야? 한스는 착해. 아니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어. 가끔 그런 인간이 있어. 사냥꾼이라는 직업이 문제가 아니야. 영혼 자체가 순수한 거야. 한스는 너희를 돕고 싶어 해. 그래서 여기까지 왔고 우린 어제 처음 만나서 바로 친구가 됐어. 나와 함께 있으면 너는 한스와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어. 물론 모든 동물이 우리를 보거나 대화를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순수한 영혼을 가져야만 해.”

유리스가 간단하게 설명했다.

“내 이름은 태니야! 엄마는 동그란엉덩이, 아빠는 뾰족귀, 형은 손이 그리고 우리 집은…… 우리는 무지개마을로 이사 가는 중이야. 그리고 나는 한스를 발견하고 감시하는 중이었어. 그렇지만 네 말에 따르면 나는 이제 한스를 감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 같은데……”

태니가 한스를 보며 말했다.

“태니. 난 네 아빠와 목숨을 건 인연이 있었어. 뾰족귀가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난 없을 거야……”

한스는 태니에게 뾰족귀와의 인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로 뾰족귀를 죽게 만들었고 결국, 뾰족귀의 은혜를 갚기 위해 사냥꾼이라는 직업을 버렸다며 지나온 이야기를 술술 풀어놨다. 그래서 지금은 늑대만 사냥한다고 했다.

“태니! 뾰족귀는 내 하나뿐인 친구였으니까 태니는 내 가족이나 마찬가지야. 너희들은 지금 사냥꾼들에게 쫓기고 있어. 아마~ 내일이면 사냥꾼들이 이곳에 도착하게 될 거야. 내가 너희를 도와 모두들 안전하게 도망갈 수 있도록 해 주겠어. 너희들이 건너편 숲에서 도망쳐 나와 섬으로 가는 걸 누군가 보게 됐어. 그리고 온통 소문이 나서 주변 마을의 사냥꾼들이 여기로 모여들고 있어. 수천 마리의 동물들을 한 번에 잡을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았거든. 내일이면 사냥꾼들이 수십 명 어쩌면 백 명 이상 몰려올 거야. 그들이 오면 동물들은 모두 죽게 될 거야.”

“그렇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돼? 나는 어떻게 해야 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은 뭐야?”

태니는 애가 탔다. 이제 겨우 사냥꾼들의 추적에서 멀리 벗어났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고작 하루 이틀 차이의 거리로 추적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냥꾼들의 수가 어마어마하다는 이야기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사냥꾼들을 유인하려면 제법 많은 동물이 필요해. 사냥꾼들이 모두 다른 방향으로 돌아서면 더 이상 추적할 수 없을 거야. 적어도 50마리 이상은 있어야 많은 발자국을 만들어서 사냥꾼들을 유인할 수 있을 것 같아. 유리스는 너희들이 도망간 흔적을 지우는 걸 도와주기로 했어.”

“그렇다면 동물들을 모아서 어디로 가면 되는 거야?”

“일단, 여기로 모아 오면 나하고 함께 움직여야 돼.”

“그런데 동물들이 내 말을 믿어줄까?”

“내가 따라가도 되지만 그렇게 되면 오히려 동물들이 지레 겁을 먹고 나를 믿지 않을 거야. 유리스도 돕고 싶다지만 과연 동물들이 어떤 반응을 할지 모르겠어.”

한스의 말에 태니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태니가 입을 열려고 하자 유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알았어! 내가 같이 갔다 오면 돼. 동그란엉덩이가 우리 요정 이야기를 해줬대. 동물들 중에 나를 볼 수 있는 녀석들이 제법 있을 거야. 그럼 믿어주지 않을까? 그래~ 태니 생각대로 해보자! 아~ 그리고 한스! 이 꼬맹이 배가 고픈 것 같으니까 먹을 것 좀 줘봐. 얘 아까 보니까 너무 불쌍해 보이더라.”

유리스는 벌써 태니의 생각을 읽어버린 것이다.

“아냐. 나 혼자 먹을 순 없어. 아무도 밥을 못 먹어서 모두들 배가 고플 텐데 나 혼자만 먹는 건 안돼. 그건 의리가 없는 짓이야.”

태니는 의리를 지키고 싶기도 했고 한편으론 너무 배가 고파서 한스의 음식을 먹고 싶기도 했다.

“어머? 얘 좀 봐. 또 두 가지 생각을 하고 있네? 괜찮아. 그냥 먹고 가~ 그건 의리 지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야. 네가 힘이 나야 다른 동물들을 도울 수 있지 않겠어? 지금은 그렇게까지 급한 상황은 아니니까 염려 말고.”

태니는 손이 형과 엄마가 걱정되었지만 유리스의 말 대로 한스가 만들어준 음식을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처음 먹어보는 인간의 음식이었지만 기가 막히게 맛있는 음식이었다.




“손이형~”

태니와 유리스는 동물들이 머물고 있던 곳으로 달려가던 중 태니 쪽으로 달려오는 손이의 모습을 발견했다. 손이 역시 태니와 유리스를 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

“태니! 너 뒤에 조심해! 이상한 새가 있어!”

손이는 태니와 함께 날고 있던 유리스를 이상하게 생긴 새로 생각한 것이다. 태니는 놀란 표정의 손이에게 유리스와 한스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손이가 자초지종을 알고 있어야 태니가 동물들에게 설명하는 데 있어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손이에게도 유리스가 보이긴 했지만 동물들 중 유리스를 볼 수 있는 동물들이 과연 얼마나 될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유리스의 말을 믿어줄 지도 의문이었다.

다행히 반대편으로 갔던 무지큰발은 동물들이 배를 채울 수 있는 곳을 찾아냈다. 놀라운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덕에 모든 동물들이 든든하게 식사를 한 상태였다.

동그란엉덩이는 무지큰발과 함께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의논하고 있었다. 태니는 그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들이 유리스를 보고 놀라지나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유리스는 여전히 태니 머리 위에 앉아 있었지만 역시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동그란엉덩이는 유리스를 보지 못했다. 그건 무지큰발도 마찬가지였다. 태니는 그들에게 대체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지 고민했다.

“왜?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어? 뭐라도 좀 먹었니? 배고파서 그래?”

동그란엉덩이는 태니가 이상한 표정을 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서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엄마! 여기 유리스가 보이지 않아요?”

“유리스? 내가 이야기해 줬던 그 요정 유리스 말이니?”

“지금 내 머리 위에 앉아 있는데……”

태니의 표정은 상당히 심란해 보였다.

“뭐? 요정이 네 머리 위에 있다고? 난 안 보이는데?”

동그란엉덩이는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엄마! 내 눈에도 보여요. 그런데 엄마도, 무지큰발 아저씨도 유리스가 보이지 않는가 봐요.”

이번에는 손이가 말했다.

“유리스가 그러는데요. 이제는 순수함을 잃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거래요.”

태니가 말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유리스는 엄마하고 아빠를 만난 적이 있대요. 예전에 두 분이 이 요정의 숲에 왔었대요. 같이 식사도 했었대요.”

“그렇다면 여기가 요정의 숲이라는 거니?”

동그란엉덩이는 매우 놀란 표정을 했다.

“네! 맞아요. 여기가 요정의 숲이에요. 엄마 아빠가 왔던 길을 드디어 찾은 거예요.”

태니는 다시 신이 난 듯 말했다.

“그리고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한스를 만났어요. 한스는 유리스와 함께 있었고요. 엉뚱하게도 한스는 유리스와도 대화를 할 수 있었어요. 유리스가 함께 있으면 한스와 저도 대화를 할 수 있어요. 그리고... 한스는 우릴 돕기 위해 여기로 왔다고 했어요.”

태니는 한스에게서 들은 소식을 그대로 전했다.

“그래? 큰일 났네. 그렇다면 한스가 알려준 대로 해야겠지만 동물들이 우리말을 믿어줄까?”

무지큰발이 말했다.

“아저씨는 한스에 대해 잘 알잖아요.”

손이가 말했다.

“물론 잘 알지. 한스는 내 생명을 구해 준 사냥꾼이니까. 그런데 다른 동물들 입장에서는 한스는 그저 무시무시한 사냥꾼일 뿐이야. 우리 이야기를 절대 믿지 않을 거야. 그리고 너랑 함께 온 유리스라는 요정을 우리는 볼 수도 없잖아. 만약 유리스가 다른 동물들에게도 보이지 않는다면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을 거야.”

무지큰발은 고민에 빠진 듯 답답하나 표정이었다.

“동물들 중에 분명히 유리스를 볼 수 있는 동물이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제 말을 믿어줄 거예요. 엄마. 동물들을 모아서 빨리 이야기를 해 보세요. 시간이 많지 않아요.”




“여러분. 여기까지 오느라 정말 고생이 많았는데요. 태니가 방금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지금 중대한 발표를 하고자 합니다. 우선 좋은 소식은……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은 제가 출발 전에 설명했던 그 요정의 숲이라는 사실입니다.”

동그란엉덩이의 말에 동물들은 함성을 질렀다. 너무 기쁜 모양이었다. 동그란엉덩이와 뾰족귀가 오로라를 보기 위해 지났던 요정의 숲에 도착했다는 것은 길을 제대로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음~”

동그란엉덩이는 쉽게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방금 전까지 기쁨에 환호하던 동물들에게 나쁜 소식을 전하기가 미안했다. 동물들은 긴장 속에서 두 귀를 쫑긋 세웠다.

“나쁜 소식은 사냥꾼들이 우리와 하루 이틀 거리에서 추적하고 있다는 것이고 사냥꾼의 수가 백 명 이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동그란엉덩이의 예상대로 동물들의 표정은 방금 전과 정반대로 바뀐 상태였다. 고요했다. 들쥐들 조차도 찍 소리 내지 않았다.

“혹시 태니 머리 위에 앉은 이상한 새가 보이는 동물은 이리 나오세요. 태니도 이리 나와라!”

동그란엉덩이는 태니를 자기 앞에 세웠다.

“자~ 보이는 동물 있나요?”

동그란엉덩이의 질문에 여기저기서 대답이 나왔다. 역시 기대했던 대로였다. 다행이었다.

“그럼 우리에게 있어 다시없을 선택을 하기 위해 한마디 하겠습니다. 우리를 돕는 인간이 있습니다. 한스라는 인간입니다. 저와 제 두 아들 그리고 무지큰발을 구해 준 적이 있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믿을 수 있습니다. 한스가 사냥꾼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고자 먼저 이곳에 왔답니다. 그가 현재 이 근처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여러분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태니 머리 위에 앉아 있는 유리스라는 요정은 저도 예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제 눈으로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유리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순수함을 잃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뭔가 큰 것을 잃었다는 생각에 허무하고 상실감이 들어 마음이 정말 아프더군요. 하지만 저는 이제는 보이지 않는 저 요정을 믿고 싶습니다. 제 잃어버린 순수함을 다시 찾을 수는 없겠지만 제가 가졌던 그 순수를, 그 순수했던 저를 믿고 싶습니다. 오십 마리 동물의 지원을 받겠습니다. 생명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저도 더 이상 제 아이들을 위험한 일에 앞장서게 하고 싶지는 않군요. 알다시피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는 태니와 손이의 공로가 컸습니다. 이제는 제가 직접 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힘세고 체력이 좋은 동물 오십 마리의 자발적인 지원을 받겠습니다.”

동그란엉덩이의 연설이 끝나자 동물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무지큰발, 빠른발, 화들짝, 꼬리만한뭉치, 땜통, 사각턱이 제일 먼저 앞으로 나왔다. 몇몇 동물들은 망설이는 것이 보였다.

“우리가 그 한스라는 사냥꾼을 어떻게 믿습니까?”

어디선가 동물 한 마리가 소리쳤다.

“저는 제 목숨을 걸고 믿습니다. 이미 제 목숨을 한번 구해 준 적이 있는 그를 제가 믿지 못한다면 누구를 믿겠습니까?”

동그란엉덩이가 대답했다.

“그냥~ 함께 도망치면 안 될까요?”

다른 동물이 소리쳤다.

“지금 우리가 하려는 것은 사냥꾼들이 다른 곳으로 가게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요정들이 도와주겠다고 합니다. 우리의 희생이 모두를 살릴 수 있습니다. 우리 오십 마리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각오를 해야 합니다.”

“오십 마리가 안되면 어쩔 겁니까?”

“그렇다면 제가 임의로 지목해서 강제로 끌고 가겠습니다. 그렇지만 자발적으로 함께 해줄 거라고 믿습니다. 스스로 나서지 않으면 우리 가족과 친구들은 모두 사냥꾼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아직도 고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두 여기서 함께 죽기를 바라는 겁니까?”

동그란엉덩이는 거의 울다시피 동물들에게 호소했다. 목소리에는 힘이 가득 차 있었다. 처음 보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손이와 태니는 엄마의 용기 있고 정열적인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연설이 끝나자 동물들이 하나 둘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발걸음은 자신감이 넘치듯 성큼성큼 이었다. 벌써 순식간에 오십 마리가 넘어 버렸다.

“이제 그만 나와도 됩니다. 노란민들레숲의 용기 있는 동물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무지큰발, 빠른발, 화들짝, 꼬리만한뭉치, 땜통, 사각턱은 여기서 남아 동물들을 이끌어 주세요. 지도자는 있어야 합니다.”

동그란엉덩이가 말했다. 그러자 무지큰발이 화를 내며 말했다.

“지도자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동그란엉덩이는 여기서 모두를 이끌어야 해요. 차라리 제가 저들을 이끌겠습니다. 우리는 무지개마을로 가는 길도 알지 못해요. 그 길은 동그란엉덩이 당신밖에 몰라요. 우리더러 어떻게 길을 찾아가라는 겁니까?”

무지큰발이 한마디 하자 모든 동물들이 그의 말에 동의했다. 한참을 묘한 표정으로 고민하던 동그란엉덩이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에 동의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무지큰발 아저씨는 유리스를 볼 수 없잖아요. 결국 한스와 대화도 불가능해요. 아무래도 제가 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지금 이 일에는 제가 최고 적임자예요.”

태니가 앞장서며 말했다.







태니는 정말 멋지고 용기 있는 녀석이에요. 그 누구도 태니의 말에 반론을 제기할 수가 없었어요. 태니의 말이 옳았거든요. 결국 태니는 오십 마리의 용감한 동물들을 이끌고 한스에게 갔어요. 한스를 만난 동물들은 한스를 보며 두려워했어요. 태니에게서 한스의 이야기를 전해 들고 난 후 동물들은 한스에 대한 두려움을 존경으로 바꾸고 말았어요. 곧 한스가 이끄는 동물들은 해가 지는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어요. 유리스의 친구들은 엄마가 이끄는 동물들의 흔적을 마법으로 지워주었어요. 정말 힘든 작업이었대요. 요정들은 몸살이 나서 다들 몸져누웠다니까요.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애쓴 요정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떠나온 것이 너무 맘에 걸려요. 저도 언젠가는 엄마처럼 순수함을 잃고 다시는 그들을 볼 수 없게 될 것이 분명하니까요. 어른이 되면 왜 순수함이 사라지는 걸까요?

한스가 이끄는 동물들은 해가 지는 방향으로 삼일 밤낮을 뛰어갔어요. 일반적인 속도로 갔다면 열흘 이상을 가야만 하는 거리였어요. 게다가 한스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냥꾼들이 쫓아왔어요. 거의 이백 명이 넘었대요. 시베리아에 언제 그렇게 많은 사냥꾼이 몰려든 것일까요? 해가 지는 방향으로 뛰어 어느 정도 흔적을 남긴 후 한스와 동물들은 인사를 하고 헤어졌어요. 한스는 사냥꾼 무리에 복귀한 뒤 동물들을 추적하지 못하게 훼방을 놓겠다고 했어요.

태니 일행은 동물들의 무리에 합류하기 위해 다시 뛰어갔어요. 설원 위를 먹지도 못한 채 달리기를 며칠, 거의 굶어 죽을 정도였을 때였어요. 그들은 인간의 도움을 한번 더 받게 되었어요. 몽골 종족의 인간들이었어요. 태니를 본 사람들의 표정엔 악의 하나 없이 너무 반가워했어요. 인간의 대장으로 보이는 한 늙은 남자는 태니에게 공손하게 인사까지 하고는 먹을 것을 잔뜩 가져다주었어요. 아마도 그들에게 은빛여우는 전설 속의 동물이라서 그랬던 걸 거예요. 태니 일행이 다시 무리를 만난 건 무려 칠일만이었어요. 그때는 『얼지않는연못』에 도착했을 무렵이었어요.

그나저나 우리 엄마 연설 어땠어요? 저는 그날 엄마를 다시 봤어요. 그렇게 강한 분인 줄 몰랐었어요. 노란민들레숲 동물들 모두 엄마를 존경하게 되었죠. 저는 그날 순수함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엄마 말대로 순수함을 잃었다는 것이 왜 화가 나는 것인지 생각해 봤어요. 우리는 영원히 순수할 수는 없는 걸까요? 저는 엄마에게 물어봤어요.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말이에요. 엄마는 나이를 먹은 게 섭섭하다고 했어요. 뭐~ 그게 전부라고 하셨지만 저는 그 한마디에 정말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걸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그건 제가 어른이 되면 자연스럽게 깨우칠 날이 있을 거래요. 지금은 이해할 수도 없겠지만 이해할 필요가 없는 거라고요. 그리고 무지큰발 아저씨가 그러시더군요. 저희는 그저 순수함 그 자체만으로도 완성되어 있는 것이래요. 굳이 일부러 어른이 되어 순수함을 잃을 필요가 없대요. 게다가 아저씨도 저희가 부럽다고 했어요. 요정을 만날 수 있는 그런 순수함을 가지고 있어서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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