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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파고 Oct 11. 2019

잠자는 땅, 시비리 16화 - 무지개마을

요정의 숲을 지나는 데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요정들이 우리 움직임과 호흡을 맞춰야 해서 흔적을 지우는 게 더욱 느릴 수밖에 없었죠. 높은 산이 많아서 그랬던 것도 있어요. 그런데 정말 이상한 있었어요. 엄마가 말했던 것처럼 요정의 숲에서 다른 동물을 만난 적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 큰 숲에 말이죠. 유리스에게 들으니 동물들은 요정들의 숲에 오래 머물면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게 된다더라고요. 특히 나이가 많은 동물들은 갑자기 죽어버리기도 한대요. 그래서 그랬던가 봐요. 노란여우 할아버지는 요정의 숲에 머문 지 삼 일째 되던 날 잠을 자다가 돌아가셨어요. 요정들은 아름다운 자리에 노란여우 할아버지를 묻어 주었어요. 동물들은 원래 죽은 동물을 땅에 묻지 않는데 요정들은 그렇게 하는 게 더 예의 있는 거라고 했어요. 우린 무지개마을을 보지도 못하고 잠들어버린 노란여우 할아버지가 불쌍했어요. 그래서 요정의 관습대로 땅 속에 묻어드리기로 했어요. 많은 동물들이 노란여우 할아버지를 위해 노래했어요. 편히 잠드시라고요. 요정들은 우리가 가는 길을 안내해 주었어요. 엄마 아빠가 지나갔던 그 길 그대로였대요. 엄마는 그 길이 조금씩 기억난다고 했어요. 요정의 숲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지만 이곳 역시 언젠가는 사냥꾼이 쳐들어오겠죠? 동물이 없다는 것을 알고 떠나기는 하겠지만 그들이 만약 요정들을 볼 수 있다면 요정들도 잡아갈까요? 그럴 수도 없겠지만 말이에요. 우리가 요정의 숲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던 날엔 요정들이 우리를 위해 노래를 불러 주었어요. 신기한 노래였는데 묘하게도 그 노래는 모든 동물들이 들을 수 있었어요. 정말 아름다운 노래였어요. 마법의 주문을 거는 노래였대요. 다만 그 효력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오랜만에 부르게 되어서 그런지 자신이 없었대요. 어떤 마법인가 물었더니 길을 찾는 눈을 갖게 해 달라고 숲의 기운을 가진 자에게 부르는 노래였대요. 그들의 노래처럼 무지개마을을 찾는 눈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요정의 숲을 떠난 지 겨우 하루 만에 『얼지않는연못』에 도착했어요. 엄마가 말했던 것처럼 안개가 자욱했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연못에 모두 풍덩 하고 몸을 던졌어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신나게 놀았어요. 물이 너무 따듯했죠. 몸에 뭍은 물을 털어내고 말리자 털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어요. 다들 기분도 좋고 나른했는지 근처에서 기절한 것처럼 잠이 들었어요. 눈을 떴을 땐 태니 일행이 연못 안에서 조용히 목욕을 하고 있었어요. 모두들 환호성을 치며 그들이 무사하게 돌아온 것을 축하했어요. 저는 태니를 꼬옥 안아주었어요. 코며, 눈이며, 귀며 얼굴을 모두 핥아 주었어요. 엄마는 말할 것도 없었고요. 물론 다른 동물들도 가족의 품에서 기쁨에 겨워했어요. 얼지않는연못을 빠져나가는 데는 무려 삼일이나 걸렸어요. 지금까지의 여정 중에 가장 편안한 구간이었어요. 하루 종일 걷다가 지친 몸은 얼지않는연못이 모두 개운하게 복구해 주었거든요. 물론 먹을 것도 지천에 깔려 있었죠. 즐거움을 준 가장 큰 이유는 사냥꾼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거였어요. 마음이 편안하니까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는 것 같았어요. 엄마의 기억에 의하면 그다음에 우리가 만나게 될 곳은 『그림자숲』이었어요. 그런데 동물들 중에 더 이상의 여행을 두려워하는 이상한 녀석들이 나타났어요. 엄마는 그림자숲 때문에 고민하는 동물들이 있을 것 같다고 했어요. 입구를 통과하지 못하게 되거나 영원히 그림자를 잃게 될까 걱정하는 것 같았어요.






“우리는 여기에서 헤어지는 게 나을 것 같네요.”

늑대 무리들 중 하나가 말했다.

“왜요? 무슨 일이죠?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왜 헤어지겠다는 거죠? 같이 가요~ 그동안 함께 고생했잖아요!”

동그란엉덩이는 떠나려는 늑대들을 붙잡으며 만류했다. 하지만 늑대들은 한사코 동그란엉덩이의 손길을 뿌리치고 반대방향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들의 뒷모습이 왠지 서글프고 안타까워 보였다. 이제 다 왔는데…… 동그란엉덩이는 오랜 친구를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이미 늑대들의 지난 실수를 모두 용서하고 그들의 마음을 이해해 주기로 했었지만 늑대들 스스로는 용서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늑대들은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능력과 용기를 가진 동물이라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입구가 하나밖에 없다던 그림자숲의 입구까지 동그란엉덩이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자주 오던 곳처럼 익숙한 느낌마저 들었다. 동물들은 그림자숲을 들어서면서 서로의 그림자를 확인했다. 듣던 대로 그림자가 서로 다르게 생긴 걸 알 수 있었다. 어떤 동물은 그림자가 흐리고 또 어떤 동물은 그림자가 진했다. 특히 어린 동물들의 그림자는 거의 검은색이었고 나이가 많은 동물들의 그림자는 좀 더 흐렸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동그란엉덩이의 그림자는 검은색이었다. 노란민들레숲의 동물들을 발견한 그림자숲 동물들이 먼저 인사를 했다. 외부의 동물들이 찾아들자 우두머리에게까지 소식이 전달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림자숲의 지도자인 『긴털호랑이』가 다가왔다. 동그란엉덩이는 노란민들레숲을 떠나오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물론 그림자숲에도 사냥꾼들이 들이닥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긴털호랑이는 사냥꾼들의 위험성에 대해 그다지 걱정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동그란엉덩이는 고집이 센 긴털호랑이를 설득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걸 느끼고 포기해 버렸다. 고마운 건 그림자숲의 동물들은 노란민들레숲의 동물들이 굶주린 배를 채우도록 협조해 주었다는 것이다. 인심이 좋은 숲이었다.

동굴을 빠져나온 뒤 17일째 되었을 때 비로소 그림자숲의 끝자락에 섰다. 그림자숲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숲을 나서면 또 긴 설원이 이어질 것이다. 다시 고통이 시작된다는 의미였다. 동그란엉덩이는 무지개마을의 근처에 도착했을 거라는 기대에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다음날 오전, 해가 뜨기 전 출발해 그림자숲에서 한참 왔는데 멀리서부터 눈보라가 몰려오고 있었다. 대충 봐도 꽤 큰 눈보라처럼 보였다. 동그란엉덩이는 뾰족귀와 함께 했던 3일간의 눈보라를 기억했다. 그땐 빈 나무 틈이라도 있었으니 살 수 있었지만 지금은 많은 동물들과 눈보라를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동그란엉덩이는 동물들을 모두 모아 함께 웅크린 채 눈보라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세차던 눈보라는 동물 무리 근처까지 오다가 눈발이 약해지며 위력이 줄어들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시커멓던 구름과 눈발은 가늘게 내리다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쳐 버렸다. 대신 그들이 나아갈 방향은 온통 하얗게 변해 버렸다. 원래 하얀 시베리아 설원이 더욱 하얗게 변한 것이다. 이제 세상은 흰색과 파란 하늘색만 남았다. 바위도 하얗고, 얼음도 하얗고, 가끔 보이던 굵은 나뭇가지도 하얗다. 세상은 설원 위에 수평으로 선이 그어진 것처럼 보였다. 동그란엉덩이는 얼마 남지 않았을 거라고 느껴지는 무지개마을을 향해 하얀 눈밭에 발자국을 찍기 시작했다. 동물들 역시 희망에 찬 표정으로 걸었다. 발목까지 빠지는 눈이지만 폭신폭신한 게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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