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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파고 Oct 11. 2019

잠자는 땅, 시비리
17화 - 오로라의 시작

눈길을 헤치고 나선 지 여섯 밤이 지났다. 동물들은 북극성만 보며 무작정 걸었다. 해는 점점 짧아졌고 이젠 밤이 훨씬 길어졌다. 가끔 크고 작은 숲을 만나긴 했지만 숲에 남은 동물들은 거의 없었다. 더 이상의 여행은 의미가 없다며 그런 숲으로 떨어져 나간 동물들만 해도 절반이 훌쩍 넘었다. 늑대 무리가 떠난 후 다른 동물들에게도 꽤 영향을 미쳤던 것 같았다. 춥고 배고픔에 지쳐 의지가 약해진 동물들은 무지개마을이 그저 환상일 거라는 생각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커져가고 있었다. 더군다나 무리를 이끌고 있는 동그란엉덩이 역시 무지개마을에 가본 적도 없고 정확한 위치조차 모른다는 사실 또한 포기하고픈 마음을 더욱 커지게 만들었다. 게다가 얼마 전 멀리서부터 거대한 눈보라가 몰려오는 걸 본 후론 많은 동물들이 새로운 숲을 만날 때마다 그곳에 보금자리를 트겠다며 무리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제 무지개마을을 찾아가겠다는 동물들은 기껏 천 마리도 남지 않았다. 어쩌면 남은 동물들 역시 머지않아 그 절반, 또 그 절반으로 계속 줄어들지 모를 일이었다. 폭풍이 다가오는 걸 발견한 다음날 거대한 눈보라는 빠르게 그들의 머리 위로 올라앉았다. 동그란엉덩이는 지난 악몽이 온몸을 휘감는 걸 느꼈다. 그땐 그래도 뾰족귀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허탈하기만 했다. 슬프고 괴로웠다. 두 아들이 있었지만 외롭고 사랑의 추억이 그리웠다. 폭풍이 몰아치던 날 아주 좁은 통나무 속에는 사랑도 있었고 추억도 있었다. 그리고 희망도 있었다.

“엄마! 왜 울어요?”

놀란 태니가 물었다.

“힘들어서 그래요? 저희가 있잖아요. 힘내세요!”

동그란엉덩이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영문을 알 수 없는 태니와 손이는 동그란엉덩이의 눈물에 가슴 속 깊이를 알 수 없는 아픔이 밀려왔다.

“아니야!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그래.”

동그란엉덩이는 자신을 걱정하는 두 아들을 보며 다시 힘을 내기로 했다.

‘그래! 이제 뾰족귀는 곁에 없지만 내게는 귀중한 두 녀석이, 사랑스러운 우리의 두 아들이 있잖아. 약해지면 안 돼. 조금만 더 힘을 내자! 여보~ 우리에게 힘을 주세요!’

동그란엉덩이는 뾰족귀와 두 아들을 번갈아 생각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다행히 이번 폭풍은 하루 만에 지나가 버렸다. 눈은 제법 깊게 쌓였지만 걷기 힘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날 밤 시베리아의 벌판 위에는 오로라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빛이 비가 되어 내렸다. 비는 끊임없이 아름다운 춤을 추었다. 오로라는 무지개가 됐고 무지개는 다시 오로라가 됐다. 오로라는 온 세상에 거대한 빛의 장막을 거침없이 뿌려댔다. 햇살에 비친 호수 위에 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바닥에 흩뿌려지듯 빛이 하염없이 춤추고 있었다. 이제 기껏 오백여 마리 정도 남은 동물들은 너른 눈밭 위에서 빛과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모든 동물들이 하늘 위로 고개를 쳐들고 눈밭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깡충깡충, 펄쩍펄쩍 뛰기도 했다. 너무 돌아서 어지럼증이 느껴졌지만 동물들은 그것도 좋았다. 옆으로 쓰러져도 기분이 좋았다. 동물들의 파티는 한참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마주하고서도 동그란엉덩이는 동물들과 춤을 출 수 없었다. 눈 위에 배를 깔고 엎드린 채 먼 하늘의 오로라의 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무지개마을은 어디에 있는 걸까?’

동그란엉덩이는 사실 겁이 났다. 수 백의 동물들이 자신을 믿고 따르고 있었지만 어딘지 조차 알 수 없는 무지개마을을 찾아 가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힘들고 외로웠다. 이런 마음까지는 두 아들 태니와 손이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동그란엉덩이는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모험을 하고 있는 두 아들에게 자신의 그런 심경을 알게 해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동그란엉덩이는 춤에 빠져있는 두 아들을 보았다. 착하고 용기 있는 두 녀석을 보니 해야 할 일은 다 해낸 것만 같았다. 은빛여우들은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독립을 해야만 한다. 수천 년간 지켜져 온 관습이었다. 언젠가 태니와 손이를 품에서 떠나보내고 나면 동그란엉덩이 역시 외롭게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그 시점이 머지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동그란엉덩이는 갑자기 자신을 떠나보내던 아빠의 표정을 기억해 냈다.

‘그것이었구나. 그때 아빠의 마음이란~ 어쩌면 정말, 어쩌면 정말 이곳이 무지개마을이 아닐까?’

동그란엉덩이는 혹시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너무 피곤했다.







엄마는 오로라가 춤을 추던 날,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 버렸어요. 엄마는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태니와 저는 오로라와 춤을 추느라 엄마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지도 못했어요. 엄마의 영혼과도 작별인사를 하지 못했어요. 우린 오로라에게 엄마를 빼앗긴 거예요. 대신 그날 밤 엄마는 우리 꿈에 나타났어요. 작별인사를 하러 왔다고 했어요. 엄마는 오로라를 보며 행복해하는 우리 모습을 보고 방해하고 싶지 않으셨대요. 엄마는 갑자기 아빠가 너무 그리웠대요. 오로라를 본 순간 아빠에게 가고 싶었대요. 엄마는 우리가 이미 무지개마을에 들어와 있다고 했어요. 이제부터는 오로라가 시작되는 곳으로만 가면 된다고 했어요. 엄마는 우리의 마음에, 기억에, 추억에 고향처럼 남아 있겠다고 했어요. 엄마가 보고 싶거나 그리워질 때는 언제라도 기억에서 꺼내 보라고 했어요. 엄마는 기억 속에서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고향 같은 존재가 되었어요. 그리고 엄마는 우리에게 마지막 부탁을 했어요. 이제 여행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엄마를 대신해서 노란민들레숲 동물들을 이끌어 달라고요. 태니 역시 저와 같은 꿈을 꿨대요. 엄마는 우리 둘의 꿈에 동시에 오셨던 거예요. 이제 엄마는 아빠와 함께 어느 때보다 행복하게 살고 계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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