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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파고 Oct 11. 2019

잠자는 땅, 시비리 18화 - 사냥꾼의 최후

엄마가 오로라를 타고 아빠 곁으로 가신 후 우리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요. 이틀째 그저 걷기만 했어요. 저 멀리 숲이 보이긴 했지만 아무리 가도 가까워질 줄을 몰랐어요. 정말 징그럽게 멀었어요.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벌판은 온통 눈과 얼음뿐이었어요. 푸른색이라고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죠. 여정이 길어질수록 여기저기서 불평불만이 늘어났어요. 게다가 믿고 따르던 엄마도 없으니 두려웠던 거예요. 다행히 무지큰발 아저씨가 동물들의 무리를 이끌었지만 아무래도 엄마만큼 의지가 되진 못했던 것 같았어요. 그래도 무지큰발 아저씨는 포기하지 않았어요. 정말 우직한 끈기 하나만큼은 최고라고 생각해요. 겉으로 내색하진 않으셨지만 무지큰발 아저씨의 마음이 그 무엇보다 무거웠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지나는 길에 흰 털을 가진 곰 몇 마리와 은빛여우 비슷하게 생긴 희고 예쁜 털을 가진 여우를 만난 것 외에 다른 동물들은 본 적이 없네요. 동물들이 살 수 없는 곳이란 생각에 점점 더 막막하기만 했어요. 앞으로 밤이 두 번 더 찾아올 때면 저 멀리 보이는 숲에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요?







“태니야, 손이야 힘들지? 업어줄까?”

무지큰발이 힘겨워하는 태니와 손이에게 말했다. 체력이 좋은 무지큰발이라 할지라도 힘들긴 마찬가지였지만 엄마를 오로라에 태워 보낸 두 녀석이 자꾸만 신경 쓰였던 것이다. 태니와 손이가 괜찮다며 고개를 가로젓는데 갑자기 무지큰발이 미끄러지며 쭈욱 엎어져 버렸다. 앞 발은 앞으로 뒷 발은 뒤로 벌어진 채로 납작하게 바닥에 붙어 버린 것이다.

“우하하하하~”

절대로 넘어지지 않을 것 같지 않았던 무지큰발의 모습에 태니와 손이는 물론이고 뒤를 따르던수백의 동물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무지큰발의 모습에 깔깔거리던 동물 몇 마리가 옆으로 넘어지기도 했다.

“얼음이네?”

태니가 무지큰발 뒷다리 부분을 보며 의아한 듯 말했다. 무지큰발이 미끄러지며 만들어진 자국 밑에 얼음이 드러나 보였던 것이다. 태니는 두 발로 눈을 걷어치우고 다시 확인해 보니 얼음이 분명했다.

“여기는 호수인 것 같아요.”

태니가 말했다.

“정말! 호수가 얼어붙은 것 같은데?”

무지큰발 역시 두꺼운 다리를 움직여 눈을 옆으로 치워 보았다. 한 번 휘저었을 뿐임에도 엄청나게 많은 눈이 치워져 있었다. 그런데 무지큰발의 표정에 불안감이 드리웠다.

“얼음이 두껍지 않은 것 같은데. 조심해서 걸어야겠어. 동물들에게 서로 거리를 두고 걸어가라고 해. 얼음이 깨지면 주변의 모두가 호수에 빠져버리고 말 거야.”

무지큰발은 얼음 호수에 대한 경험이 많은 편이었다. 얼음이 깨지면 얼마나 위험한 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동물들 역시 노란민들레숲을 탈출하면서 얇은 얼음이 깨지며 동물들이 물에 빠져 죽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서 위험성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얼음이 깨져서 빠지게 되면 다시는 올라올 수 없어. 그냥 물에 빠져 얼어 죽는 거야. 예전에 본 적들 있으니까 다들 명심해야 해. 그리고 안타깝지만 누군가 물에 빠졌더라도 절대 돕겠다는 생각을 하면 안 돼. 가능한 한 빨리 먼 곳까지 도망쳐야 해. 옆까지 같이 깨지는 날에는 다 같이 죽는 거야.”

무지큰발은 큰 소리로 말했다. 놀란 동물들은 순식간에 멀리 간격을 두고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숲을 향해 나아갔다. 얼마 가지도 못했는데 호수 바닥에서 기이한 소리가 났다.

찌이이이이익~ 찌익~ 숨이 멎을 듯한 표정이 된 무지큰발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제 더는 무리야.’

무지큰발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태니, 손이 잘 들어!”

“네?”

앞서가던 태니와 손이가 무지큰발을 향해 뒤돌아 보았다.

“왜요?”

태니와 손이는 무지큰발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음을 느꼈다.

“아저씨!”

태니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너희들끼리 가야겠다. 덩치가 큰 곰들은 이제 여기까지야. 얼음이 깨지려고 하고 있어.”

무지큰발이 떨리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말했다.

“아저씨!”

태니와 손이는 무지큰발과 헤어지기 싫었다.

“빠른발은 덩치는 크지만 가벼워서 괜찮을 거야. 대신 지금부터 쉬지 말고 뛰라고 해. 그럼 괜찮아. 다행히 얼지 않은 곳은 없어. 다만 현재 상태의 얼음 두께로는 내 몸무게를 버틸 수 없어. 지금 우리는 호수의 중간쯤에 있는 것 같아. 만약 여기서 물에 빠지면 영원히 만날 수 없어.”

우지끈~ 뒤에서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모두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보았다. 갈색곰 한 마리가 바닥의 얼음이 깨지며 호수에 빠져 버린 것이다. 간신히 머리를 내민 갈색곰은 주변의 얼음에 발톱을 세워 꽂았지만 자꾸 밀려날 뿐이었다. 갈색곰이 안간힘을 쓸수록 얼음은 더욱 금이 가고 깨져 가고 있었다. 갈색곰은 도와 달라는 소리도 하지 못한 채 얼음만 파헤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목격한 동물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어차피 안돼. 도와주려고 하지 마! 주위에서 멀리 도망쳐! 그리고 갈색곰은 물론 다른 곰들도 뒤로 방향을 돌려야 해!”

무지큰발은 크게 소리 질렀다.

“아저씨! 저희는 이제 누굴 믿고 따라야 돼요? 아저씨마저 없으면 저희는. 저희는……”

태니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표정이었다. 코 끝을 찡긋거리는 게 간신히 울음을 참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얘들아! 너희들은 이제 어른이야. 너희 엄마 동그란엉덩이는 너희들이 이미 어른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마음을 놓고 너희 아빠 뾰족귀에게 갈 수 있었던 거야. 너희 엄마가 내 꿈에도 나타났었어. 너희들을 부탁한다고. 하지만 너희들에게는 더 이상 나의 보살핌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너희들은 어른이 되는 중이야. 얘들아. 호수가 더 꽁꽁 얼면 나도 뒤따라 갈 거야. 먼저 건너가 있어. 무지개마을이 가까운 곳에 있어.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아저씨는 힘이 세잖아. 어서 가! 다른 동물들은 너희만 바라보고 있잖아. 힘 내고. 자~ 빨리 건너가! 무지개마을로 가야지.”

그렇게 말하는 무지큰발의 얼굴엔 약간의 공포와 걱정과 아쉬움이 함께 담겨 있었다. 태니와 손이는 가까스로 참았던 눈물을 흘리며 무지큰발과 곰들을 뒤로하고 조금씩 거리를 벌렸다. 멀리서 곰들이 포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힘내! 꼭!”

무지개마을을 찾아가라는 응원의 소리였다.




태니 일행은 갈색곰들과 헤어지고 온전히 하루를 더 걸어서야 멀리 보이던 숲의 첫 번째 나무 앞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나무였지만 그동안 만났던 숲과는 달리 잎이 뾰족하지 않았다. 노란민들레숲의 동물들은 무지큰발과 곰들을 두고 온 게 너무 안타까웠다. 겨울 하루거리에 그들을 두고 올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숲으로 들어선 후 몇 시간을 더 걸어서야  동물들이 머무를 만한 곳이 나타났다. 잎이 무성한 숲 속에는 제법 먹을 것도 보였다. 동물들은 허겁지겁 허기진 배를 채웠고 배가 부르자 각자 적당한 곳을 찾아 배를 깔고 엎드렸다. 모두들 피곤함에 지쳐 자리를 잡자마자 코를 골며 골아떨어지고 말았다.

“형들. 미안해요. 힘들 텐데~”

빠른발은 화들짝과 함께 태니와 손이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자 손이가 말했다.

“아냐! 괜찮아. 난 배가 좀 고프긴 해도 힘들진 않았어. 게다가 지금은 든든히 먹고 나니 힘이 넘쳐나는걸.”

화들짝이 말했다.

“다름이 아니고요. 아무래도 아직 마음을 놓으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아직 무지개마을을 찾은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형들에게 부탁을 좀 하려고 해요.”

손이가 말했다.

“그래? 듣고 보니까 그렇네.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 내 생각에는 여기서 무지개마을이 멀리 있지는 않을 것 같아요. 빠른발 형하고 화들짝 형은 여기서 북극성 방향으로 가서 무지개마을을 찾아줘요. 나는 다시 그림자숲으로 가볼게요. 혹시 사냥꾼들이 우리를 추적하는지 확인해야겠어요. 그리고 그림자숲 동물들이 사냥꾼에게 당한 것은 아닌지 걱정도 돼요. 그랬다면 우리 때문일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무지큰발 아저씨도 너무 걱정되고요.”

손이는 태니를 앞으로 밀어내며 말을 이었다.

“태니는 여기서 우리 노란민들레숲 동물들을 지켜줘야 해!”

“안돼! 형. 그건 형이 할 일이야. 내가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무래도 길 찾는 건 형보다 내가 더 잘하고 나는 형보다 훨씬 빠르잖아. 냄새 맡는 것은 형이 더 잘하지만 사냥꾼을 만나게 되더라도 도망치는 건 내가 더 나을 거야.”

태니가 일부러 손이의 기분을 자극했다.

“내 생각에도 태니 말이 맞다고 생각해. 손이 네가 여기서 동물들을 지켜주는 게 나을 것 같아. 태니야! 그런데 너 혼자서도 가능하겠어? 위험하지 않을까?”

빠른발이 말했다.

“형도 마찬가지지만 우리 은빛여우는 원래 혼자 잘 다녀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우리 아빠도 항상 혼자 다니셨는걸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할까?”

“아뇨. 형들은 따로 움직이지 말고 같이 가는 게 좋겠어요. 처음 가는 길인데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해요. 만약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누군가 한 마리는 도움을 요청하러 와야 하잖아요.”

“알았어. 손이 말이 맞는 것 같아.”




태니가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왔을 땐 무지큰발 일행은 이미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게다가 지난밤 내린 눈으로 곰들의 발자국도, 어떤 흔적도 볼 수 없었다. 태니는 무지큰발을 만나면 그림자숲까지 같이 가려고 했지만 원래 계획했던 대로 혼자 떠나야 했다.

거의 사흘 밤낮을 뛰어서야 그림자숲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림자숲 곳곳에서 회색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다행히 산불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분명 그림자숲에 무슨 일이 생긴 것만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태니는 온 힘을 다해 뛰었다. 그림자숲 근처에 도착할 무렵 태니는 인간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한스가 만들어 주었던 음식과 비슷한 냄새도 났다. 사냥꾼들이 그림자숲까지 몰려온 것이 분명했다. 태니는 조심스럽게 숲으로 들어갔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그림자숲 동물들을 구할 수 있다면 뭐라도 해야만 했다. 그들이 원한다면 무지개마을로 데려갈 수도 있다.

“야!”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딛던 태니는 오른쪽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억지로 매우 작게 소리를 낸 것이었다. 숲 속의 나무 사이를 살피던 태니는 목소리의 주인은 지난번에 만났던 긴털호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저씨! 무슨 일이에요?”

태니가 물었다.

“큰일 났어. 사냥꾼들이 우리 숲에도 쳐들어 왔어. 그때 너희들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긴털호랑이는 얼마 안 된 사이에 꽤 수척해져 있었다.

“다른 동물들은요?”

“모두들 일단 깊은 숲 속으로 가서 숨어 있으라고 했어. 하지만 이미 많은 동물들이 잡혀갔어. 사냥꾼들은 너무 잔인하고 무서워. 그런데 너는 왜 다시 돌아온 거니?”

긴털호랑이가 물었다.

“혹시나 이런 일이 생겼을까 걱정이 돼서 왔는데 제가 한 발 늦었네요. 제가 일찍 왔다 하더라도 도움이 되지는 못했겠지만요.”

“아니다! 이미 우리는 너희들 도움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야. 너희들의 조언을 듣고 미리 준비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어. 이 모든 건 내 잘못이었어. 이제는 돌이킬 수 없지만 말이야.”

긴털호랑이는 흐느끼듯 말했다. 기력이 빠진 듯 긴털호랑이는 머리를 바닥에 붙이고 몇 가닥 없는 수염을 흔들어댔다.

“자책하지 않으셔도 돼요. 사냥꾼은 우리가 감당하기엔 너무 무서운 존재예요. 제게 방법이 있어요. 아저씨는 숲 속 동물들이 모두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를 낼 수 있으니까 한 곳으로 모이라고 소리쳐 주세요. 모두들 밤에만 이동하라고 알려주세요. 사냥꾼들은 눈이 좋지 않아서 밤에 이동하는 걸 두려워해요. 우리는 여기서 기다렸다가 동물들이 모이면 함께 북극성 방향으로 가야 해요.”




그날 밤, 호랑이 울음소리가 숲 속을 채우자 그림자숲의 동물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긴털호랑이가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태니의 말대로 밤눈이 어두운 사냥꾼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사냥꾼들은 동물들이 한 자리에 모여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냥꾼들이 만든 공포의 그림자에 눌렸던 그림자숲의 동물들은 전설 속 무지개마을이지만 이미 지옥이 되어버린 자신들의 숲을 버리고 떠나는 데 동의했다.

“야! 태니!”

이번에 들린 목소리는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태니의 머리 위였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너무 반가웠다. 유리스는 태니의 머리 위에 사뿐사뿐 날갯짓을 하며 두둥실 떠 있었다.

“유리스~ 여기는 어쩐 일이야? 요정의 숲은 어쩌고?”

태니는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예상했던 것처럼 요정의 숲에는 동물이 살지 않아서 그런지 사냥꾼들이 들어왔다가 그냥 지나갔어. 그래서 나는 한스와 함께 여행을 하는 중이야. 한스는 너무 외로운 녀석이거든. 그 녀석은 친구가 나밖에 없대. 가족도 없고. 그래서 뭐~ 불쌍하기도 해서 같이 나왔지 뭐야. 그러다 여기서 네 목소리를 듣고 찾아왔지 뭐니.”

“그럼 한스는 어디에 있는데?”

“좀 멀어.”

“그런데 내 목소리를 어떻게 들었다는 거야?”

“네 진심의 목소리가 내게 들렸어. 슬퍼하는 목소리 말이야. 한스에게 가자! 한스가 이번에도 너를 도와주겠대!”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거야? 한스 혼자서 어떻게?”

“글쎄 말이야. 한스에게 좋은 생각이 있대!”

유리스는 옆에 없는 한스의 생각을 읽고 대변하는 것처럼 답했다. 태니는 그림자숲의 동물들에게 손이가 있는 숲의 위치를 알려주고 바로 출발하게 했다. 동물들이 모두 숲을 떠나는 것을 지켜본 태니는 유리스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태니는 제발 이번이 마지막 모험이기를 기도했다.

‘엄마! 부탁해요.’

갑자기 태니는 엄마를 기억했다. 배가 고프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사실 태니도 많이 지친 상태였다. 어릴 때부터 엄마 아빠에게서 들었던 신나는 모험이란 것도 실제로 겪어보니 무조건 신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힘든 건 과정이라 즐거웠던 모험의 결과에만 집착해서 그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튼 지금은 너무 힘들고 괴로웠다. 그저 마음 편한 숲에서 한참 동안 푹 쉬고 싶었다. 게다가 사냥꾼이 나타난 후론 세상의 숲이 너무 잔혹하게 보였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고통스러웠다. 몸이 힘든 것은 그래도 견딜만했지만 가까웠던 가족과 친구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날 때마다 심장이 터져 나가는 것만 같았다. 동물들이 태니 곁에서 한두 마리씩 사라져 갈수록 이 모험의 끝이 언제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모든 동물들이 죽고 나서야 모험이 끝나게 되는 건 아닌가 싶었다.

“태니! 오느라 고생했어.”

한스가 먼저 태니를 발견하고 인사했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는데 한스의 얼굴에는 거친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 있었다. 볼은 꽤 야위어서 핼쑥했다.

“한스. 고마워. 계속 우리를 도와줘서 말이야. 그런데 한스도 꽤 힘이 드는가 봐. 얼굴에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아 보여.”

“괜찮아~ 한동안 수염을 깎지 않아서 그래 보이는 거야.”

“그런데 좋은 방법이라는 게 뭐야?”

“일단 이 숲의 동물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피신을 시키는 게 좋겠어.”

“이미 여기 동물들은 손이가 있는 곳으로 가라고 했어.”

“잘했어 태니!  사냥꾼들에게 거짓말을 할 거야. 너에게는 미안한 이야긴데 너희 은빛여우는 사냥꾼들이 제일 좋아하는 동물이야. 은빛여우 한 마리는 시베리아 호랑이 열 마리 이상의 값어치가 있거든. 밍크로는 거의 백 마리 이상이고, 그리고…… 점점 더 비싸지고 있어. 이제 거의 잡히지도 않거든. 다른 숲에 가도 은빛여우들을 만날 수가 없어. 그래서 말인데 네가 미끼가 되어야 할 것 같아. 그렇지 않고서는 사냥꾼들이 북쪽으로 가는 걸 포기하지 않을 거야. 이미 은빛여우 세 마리가 북쪽으로 가고 있고 그 무리가 수천 마리에 이른다는 소문이 퍼진 상황이야. 어지간해서는 그 동물들을 포기하려 들지 않을 거야. 나는 사냥꾼들에게 은빛여우 스무 마리가 해가 뜨는 방향으로 도망쳤다고 할 거야. 그쪽은 아직 사냥꾼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은빛여우들이 그쪽으로 도망쳤다고 하면 믿을 거야. 계획대로만 된다면 모두 그쪽으로 달려가겠지. 이번에 사냥꾼들은 썰매와 한 달 이상 먹을 수 있는 식량까지 만반의 준비를 해서 왔어. 그래서 이번만큼은 결코 너희들보다 속도가 느리지 않아. 잘 알겠지만 시베리안 허스키들은 썰매를 끌고도 굉장히 빨라.”

세 마리였던 은빛여우는 이제 두 마리가 됐어. 엄마는 얼마 전에 오로라를 타고 가셨어."

엄마 생각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태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지?”

“그랬구나…… 태니 너는 그림자숲의 해가 뜨는 방향의 절벽 밑에 서있어. 사냥꾼들의 눈에 잘 띄어야 해. 태니는 거기 있다가 유리스가 뛰라고 하면 무조건 뛰다가 적당한 곳에 숨어 있어. 난 사냥꾼 중에 말하기 좋아하고 허풍이 센 녀석을 데리고 가서 네가 도망가는 모습을 보여줄 거야. 그리고 나는 은빛여우가 스무 마리 이상 뛰어가는 걸 봤다고 할 거야. 그럼 그 녀석은 못 봤다고 말하지 못하고 내 말보다 부풀려서 이야기할 수도 있어. 어쨌든 사냥꾼들에게는 그렇게 소문이 나겠지. 그럼 사냥꾼들은 모두 해가 뜨는 방향으로 뛰어갈 거야. 그게 내 계획이야. 밤이 되면 나는 사냥꾼들의 시베리안 허스키를 모두 풀어줄 거야. 그러면 사냥꾼들은 썰매를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추적을 하지 못하고 포기하게 될 거야. 어때? 내 생각이?”

한스의 계획은 정말 완벽해 보였다. 그렇게만 된다면 사냥꾼들은 더 이상 노란민들레숲의 동물들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었다.

“태니…… 그리고~”

한스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뭐? 태니가 물었지만 한스는 그냥 됐다고만 했다. 유리스는 갑자기 뒤돌아 서서는 울기 시작했다.

“유리스는 왜 그래?”

태니가 물었지만 유리스 역시 대답이 없었다.

“아니~ 그냥 나중에 이야기해줄게~ 우리 일단 작전대로 하자.”

한스는 부랴부랴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태니! 한스가 지금 뛰래!”

유리스는 벌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오며 말했다. 멀리 보였지만 유리스의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태니는 부리나케 뛰기 시작했다. 좁은 절벽을 끼고 열심히 뛰던 태니는 미리 봐 두었던 바위틈 사이로 쏙 들어가 숨었다.

“와우! 태니 정말 빠른데? 아무도 못 따라오겠다. 크크~”

태니는 유리스의 칭찬에 으쓱했다.

“뭘! 이 정도 가지고. 빠른발 형하고 화들짝 형은 나보다 훨씬 빨라. 손이 형보다는 내가 좀 더 빠르긴 하지만 말이야.”

“나는 한스를 도와주러 갈 테니까 여기에 잠시 있어봐. 내가 다시 데리러 올게.”

유리스는 태니에게 한숨 자 두라고 일러두고는 다시 벌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가 버렸다. 태니는 바위틈 옆으로 누워 머리와 꼬리를 말아 안은 채 새록새록 잠이 들어버렸다. 태니의 곤히 자는 모습은 아직 아기 여우 같았다.




“엄마!”

태니의 엄마 동그란엉덩이는 예쁜 아기 은빛여우 태니를 꼭 안아주었다. 태니는 엄마의 품이 포근하고 좋았다.

“우리 태니. 엄마가 보고 싶었지?”

동그란엉덩이는 열심히 태니의 얼굴을 핥아 주었다.

“엄마! 엄마!”

태니는 아직 아기여서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다. 태니는 엄마에게 보고 싶었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려 했지만 태니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저 ‘엄마!’ 소리뿐이었다.

하지만 동그란엉덩이는 태니의 마음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 미소 지었다. 동그란엉덩이의 뒤에는 아빠 뾰족귀가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태니는 엄마와 아빠가 있어 너무 행복했다. ‘손이 형은 어디 갔지?’ 태니는 손이 형의 행방이 궁금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태니! 일어나! 빨리! 빨리!”

태니는 유리스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꿈을 꾸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응! 유리스. 왜 그래? 좋은 꿈 꾸고 있었는데~”

태니는 앞발로 눈을 비볐다. 어느샌가 눈물도 흘렸던 것 같다.

“태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한스가 빨리 너를 데리고 오래. 한스가 할 말이 있는가 봐. 마지막이 될지도 몰라. 아니~ 마지막일 것 같아.”

유리스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슬퍼 보였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한스는 방금 간 거 아니었어?”

“이 바보야! 넌 여기서 벌써 하루 종일 잤단 말이야. 빨리 가야 해!”

유리스는 더 이상 설명해 주지 않고 앞장섰다. 태니는 한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을 알 수 있었다. 멀리 썰매들이 보였다. 물론 시베리안 허스키들은 흔적도 없었다. 사냥꾼들 역시 보이지 않았다. 썰매는 거의 수십 대는 되어 보였다.

“저기야! 아직 숨을 쉬고 있다. 태니 어서!”

유리스의 말을 듣고서야 태니는 지금 상황을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스가 죽어가고 있구나!’

태니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뛰어가던 속도 때문에 앞으로 두어 바퀴 데구루루 굴러버렸다.

“태니. 괜찮아?”

앞서가던 유리스가 다시 돌아와 물었다.

“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태니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울어버렸다.

“태니?”

한스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한스! 나야!”

태니는 다시 일어나 한스에게 뛰었다. 한스는 배에 칼이 꽂힌 채 누워 있었다. 한스 주변에는 한스가 흘린 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태니! 미안해! 이런 모습을 보여서……”

한스는 헉헉거리며 힘겹게 말했다.

“괜찮아. 왜 이렇게 된 거야?”

태니는 한스의 거칠어진 얼굴을 핥았다. 한스의 눈물이 짭조름했다.

“태니! 그래도 임무는 완수했어. 이제 너희들은~ 이제 안전할 거야! 하하하~”

한스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한스는 태니가 그만 울었으면 했다.

“너에게 해 줄 말이 있었어. 난 이 말을 꼭 해 주고 싶었어. 내 의식이 살아 있을 때 말이야. 네 아빠 뾰족귀에게서 너희 은빛여우는 인간이 죽은 후 영혼을 만나서도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다고 들었어. 내 이야기도 들어줄 수 있지?”

한스는 힘들게 헉헉거리며 말했다.

“응~ 알았어. 미안해. 우리 때문에 한스가 이렇게~”

“아냐. 미안해할 것 없어. 난 뾰족귀에게서 생명을 받았고 뾰족귀를 죽게 했어. 난 맹세했어. 꼭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네 목에 있는 그 목걸이는 내가 소년이었을 때, 뾰족귀가 나를 구해 주었을 때. 그때, 내가 뾰족귀의 목에 걸어준 거야. 태니. 이제 그 목걸이를 다시 내게 돌려주지 않겠어? 사실 그건 우리 엄마가 내게 준 거야. 이제야 나는 아빠하고 엄마를 만나러 갈 수 있을 것 같아.”

한스는 태니의 목에 손을 뻗쳤다. 태니는 목을 내어 주었다. 한스는 태니의 손에 목을 갖다 댔다. 한스는 태니의 목에 걸린 것을 빼서 손에 꼭 쥐었다. 그리곤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내 몸에 엄마가 준 목걸이와 아빠의 칼이 돌아왔어. 이제 난 엄마 아빠와 함께 있는 것 같아.”

태니는 그제 한스 배에 꽂힌 칼이 아빠의 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태니. 이제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줘. 내가 언젠가 이 말을 꼭 해 주고 싶었어. 내 이야기야. 네 아빠 뾰족귀와 내 첫 번째 만남. 그리고 두 번째이자 마지막 만남. 네 아빠는 우리 가족이 늑대들에게 죽게 되었을 때 나를 구해줬어……”

한스는 태니에게 더 이상의 말을 전하지 못한 채 그대로 영원히 잠들어 버렸다. 한스의 입술이 움직임을 멈추자 한스의 영혼이 한스의 잠든 몸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환하게 웃어주었다.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한스의 영혼은 태니에게 나머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남겼다.

“난 살면서 단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어. 늑대에게 복수하는 것만이 내 목표였고 그걸 실천해왔지. 그래서 내 별명은 『지옥에서 온 늑대사냥꾼』이었어. 하지만 늑대에게 복수를 해도, 아무리 많이 죽여도 나는 행복하지 않았어. 그런데 나는 너희들을 도우면서 드디어 행복이란 걸 알았어. 처음으로 행복했어. 그리고 더 이상 외롭지 않았어. 고마워 태니!”

한스의 영혼은 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태니는 벌떡 일어나 한스의 영혼이 사라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었다.

오오오~ 오오오~

탕! 탕! 태니의 울음소리와 함께 멀지 않은 곳에서 두 발의 총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태니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태니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유리스는 너무 놀라 절대로 써서는 안 되는 요정들의 금기 마법을 쓰고야 말았다. 한스와 태니의 몸을 손이의 옆으로 이동시켜버린 것이다. 유리스는 알고 있었다. 금기시된 마법을 쓰면 더 이상 요정의 숲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유리스는 어쩔 수 없이 노란민들레숲의 식구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제는 무지개마을의 식구가 된 것이다.







저는 유리스에게서 태니와 한스의 마지막 활약에 대해 들었어요. 태니는 정말 용감한 녀석이었어요. 멋진 녀석이었어요. 이제 저는 완전히 외톨이가 되어버린 것 같았어요. 저희 가족에 대한 비밀 하나를 알려 드릴게요. 저는 원래 엄마 아빠의 아들이 아니에요. 저희 친부모님께서는 제가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셨어요. 이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말이에요. 엄마 아빠는 태니가 태어나기 전에 저를 데리고 숲으로 돌아오셨대요. 유리스의 말에 의하면 제 고향은 원래 이곳 무지개마을 이랍니다. 엄마 아빠는 단 한 번도 태니와 제가 형제가 아니란 걸 티 낸 적이 없으세요. 태니와 저는 역시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형제였고요. 태니가 정말 그립네요. 정말 멋진 내 동생. 유리스의 말로는 태니는 오로라의 일부가 되었대요. 요정들만 아는 사실인데 순수한 영혼들만이 오로라의 진실을 알고 있대요. 한스와 태니는 오로라가 나타날 때면 언제나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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