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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파고 Sep 18. 2022

34. 외갓집이 있었던 진해까지 추억 라이딩

할아버지 돌아가신 후 20년이 넘어 찾아간 진해는 많이 변했지만

몇 달째 부산 인근의 라이딩 코스를 발굴하는 중이다. 부산엔 마음 편하게 로드바이크를 탈 만한 코스가 별로 없다는 걸 알게 된 후 라이딩의 매력을 조금씩 잃어가는 요즘 불현듯 외갓집이 있던 진해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해졌다. 카카오맵을 열어 진해까지 가는 길을 검색했지만 자전거로 가기엔 딱히 적합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달 전 진해해안도로의 행암동 횟집거리가 기억나 검색해본 적이 있었는데 진해로 들어가려면 마침 그 길로 가야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얼마나 가보고 싶었던지 굽이 굽은 그 도로를 달리던 꿈을 꾼 적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진해는 외갓집이 있었던 곳이며 엄마의 고향이고 나도 외갓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출생에 따른 고향인 곳이기도 하다. 사실 태어나기만 했다고는 할 수 없다. 발령이 잦았던 아버지의 근무지 문제로 인천과 진해를 오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여좌동의 대야초등학교를 2학년 때 반 학기, 4학년 때 한 학기 정도 다닌 것 같다. 외갓집은 여좌동의 엄청 큰 정원을 가진 주택이었고 그 고주택에서 놀았던 어린 시절의 짤막한 추억이 남아 있다.

군대 전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엄마도 나도 진해엔 갈 일이 없어졌다. 막내 이모가 여좌동에 아직 살고 있지만 서울에서 진해까지 가려는 노력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었던 것 같다.

이번엔 마침 부산에 내려와 있으니 진해까지 가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은 상황이다. 정확히 헤아려 보진 않았지만 이번에 진해에 가면 무려 25년 정도 된 셈이다.





이번 라이딩은 엄마에게 고향 진해의 변화된 모습을 담은 사진을 선물로 보낼 생각이 출발 전부터 가슴이 뛰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고 어린 시절 몇 가지 깊은 추억이 남은 곳이기도 하기 때문인데...

진해를 배경으로 쓴 소설(아직 출판 전, 이 년째 퇴고 중)이 있기도 해서다.



서부산낙동강교 근처에 주차를 하고 자전거를 꺼낸 후 얼굴에 선크림을 두껍게 칠했다. 봄 볕엔 딸 보내고, 가을볕엔 며느리 보낸다던 말처럼 가을 햇살에 살이 더 탄다는 걸 오랜 경험으로...

그래서 여름에도 안 하던 짓을 하고 말았다. 덕지덕지 선크림을 바르고 마스크까지 쓰고 헬멧을 썼다. 아직은 좀 더운 편이지만 한여름 땡볕에도 라이딩을 다닌 마당에 이 정도는 우습지 싶었다.



낙동강 옆을 지나다 보니 명지항이 나타났다. 차를 타고 대로변을 지나다닐 땐 볼 수 없었는데 작은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식당도 꽤 많다.



좁아터진 자전거 도로가 영 불편하다. 명지선착장 근처를 지나면서 정비 상태는 엉망이었던 길은 자전거도로라고 정비 된 구간을 만나 달릴 만했지만 좁은 건 여전했다. 옆에 빈 공간도 있던데 왜 이렇게 조성했는지 모르겠다.



대로변 옆으로 조성된 자전거도로는 말 그대로 자전거도로라고 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아마 도시계획부터 이런 시설에 대한 구상이 없었고 나중에야 억지로 조성한 듯했다. 관리 수준도 엉망이다.



신호대교를 넘으며 한 컷 찍어봤다. 날씨가 점점 가을스러워지고 있다. 멀리 신호동 주거단지가 보인다. 신호대교 자전거도로 구간은 배수로 홀 때문에 바퀴가 걸려 신경이 많이 쓰였다. 개선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가덕대교다. 난 일부러 해안가 쪽으로 돌아섰는데 역시 이쪽은 자전거 도로가 개발되어 있었지만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신 어구를 손질하는 어부들이 널어놓은 것들 때문에 위험했다. 제주환상자전거길은 이런 문제가 심각해서 자전거도로를 이용하는 것을 두고 라이더와 주민들 사이에 말이 많다. 다녀보지 않으면 절대 모르는 건데 해보지도 않고 라이더 탓만 하는 몰지각한 사람들도 문제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제주환상자전거길은 좁기도 하지만 주민들이 널어놓은 어구와 철마다 이것저것 말리는 해산물, 농기계, 관광객 무단주차, 쓰레기, 사고 잔해 등 자전거도로는 이미 자전거길이 아니다.



부산신항 배후물류단지를 가로질러 용원어시장 쪽으로 가다 보니 주거단지가 나타났다. 지도로 보던 것보다 규모가 크다. 일요일이라 차량 소통이 많지는 않았다. 거기서 용원동을 지나 진해대로를 타고 라이딩을 하는데 오랜만에 달리는 기분이 나긴 했다. 하지만 팩라이딩이 아니라 위험하기도 해서 중간에 빠졌는데 이왕이면 최대한 해안 쪽으로 빠져서 달릴 것을 그랬다. 지금 지도를 보니 녹산온천 쪽으로 해서 안골만 옆으로 난 도로를 이용했으면 좀 더 안전한 라이딩이 됐을 것 같다.

국도 구간은 사진이 없다. 중간에 케이조선 쪽으로 빠져 진해국가산업단지 뒤로 난 길로 접어들었다. 행암동으로 가려면 그 길밖에 없다.



짧은 업힐이 있었는데 경사도는 8~11%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딱히 길거나 경사도가 세지 않아서 슬슬 놀면서 올라갔는데 정상에 오르자 멀리 진해시가 보였다. 드디어 진해로 접어든 걸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가슴이 뛰었다. 25년 만에 밟는 진해인 거다.



아마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해였던가? 친구 녀석을 태우고 여의도에서 여기까지 달려온 적이 있었다. 여기 한바다횟집이란 상호가 걸린 집인데 그때 상호가 그대로인지는 모르겠다. 당시엔 이 폐철길을 건넌 이 공원 자리에 평상 위 술자리를 펼쳐 줬었다. 여기서 진하게 마시고 근처 모텔에서 하룻밤 자고 왔던 오래전 기억이다. 공원까지 조성되며 많이 변하긴 했는데 내 추억의 그 평상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 회가 참 싸고 맛있었는데... 언젠가 혼자가 아니라면 여기 다시 와서 한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천부두 쪽으로 향하는 길이다. 곧 진짜 진해 도심으로 접어드는 시점이다.



로터리를 지나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곳으로 갔다가 다시 길을 찾았다. 내비 없이 다니니 수시로 지도를 살펴야 해서 힘들긴 하지만 그것도 라이딩의 재미다. 이제 해군 관련 시설과 만나기 시작했다. 어릴 땐 진해하면 군항제 그리고 벚꽃만 기억에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다양한 소재들이 녹아 있었구나 싶었다. 여기선 시속 50km/h 정도로 달려줬다. 쭉 뻗은 도로에선 가끔 질러 줘야 개운하다.



진해는 인천처럼 개항으로 인한 변화를 겪은 곳이다. 게다가 해군 기지까지 있어서 왜색도 잔존하며 군인 도시의 냄새가 짙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황해당인판사라는 오래된 건물에 오래된 간판을 유지한 상가가 눈에 띄었다.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하는 마당에 왜 저길 사진 한 장에 만족하고 지나쳐 버렸는지 모르겠다. 다음엔 아예 날 잡고 진해 여행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고풍적 인상이 깊게 자리 잡았다.

지금 지도를 보니 진해근대역사테마거리라고 한다. 인천 신포동에도 비슷한 테마로 지역이 있는데 비슷한 콘셉트 아닌가 싶다. (신포동을 배경으로 해서 쓴 '오래된 집, 이음'이라는 미스터리 로맨스 소설을 썼다.) 내가 진해 살 땐 저런 건 관심도 없었을 테고, 저런 건물이 여기저기 즐비했을 것 같다.



이런 오래된 건물도 눈에 띄었는데 모 금융 관련 업체 간판이 매우 불합리적으로 걸려 있었다. 그래서 그 부분만 비껴 촬영했다. 자전거를 타며 클릿도 빼지 않고 촬영하며 지나친 게 많이 아쉽다. 정말 나중엔 제대로 다녀보려 한다.



왜색 짙은 우체국 건물이다. 운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건물 자체가 그냥 오랜 추억 덩어리 같다.



중원로터리라고 한다. 완전 역대급 규모의 로터리 아닌가 싶다. 서울시청 앞 로터리가 이것보다는 훨씬 크지만 이젠 로터리 역할을 상실했고 로터리라고도 할 수 없으니 모르긴 해도 전국적으로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큰 것 같다.



지금 탈고 중인 소설 <돌배나무집 셋째 딸>에도 이 진해역이 등장하는데 이젠 폐역이 됐다. 의정부 폐역 투어 라이딩을 다니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에도 그런 느낌이다. 그런데 내겐 이 진해역이 좀 특별하게 느껴지는 게 내 어린 시절의 몇 개 기억나지 않은 단편들 중에 진해역의 기억이 조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 여기서 완행열차(비둘기호였을 것 같다)를 타고 마산까지 가서 서울 가는 기차를 탔던 기억이 있다. 막내 이모와 함께였던가? 참 오래전 기억이라 까마득하기만 하다. 그땐 진해역이 참 크게 보였던 것 같았는데 이렇게 왜소하다니... 그리고 역 대합실을 건너 개찰구 역무원도 기억난다. 요즘엔 볼 수 없지만 어떤 기구로 찰칵 누르면 기차표에 구멍이 뚫렸다. 대합실을 나오면 철도가 있었고 가물가물하지만 그걸 건너서 열차를 탔던 기억이다. 그게 약 42년 전이었으니 참... 나도 나이 많이 먹었구나. ㅠㅠ



외할아버지의 집은 기억에 좀 더 잘 남아 있었다. 우리 집은 할아버지 집과 그리 멀지 않았던 기억이다. 장복산에서 내려오는 4차선 도로가 꺾어지는 부분에 직진으로 향해 좌회전해서 들어가면 외갓집이었다. 그 짧은 길이 어린 내겐 엄청 긴 길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이번에 자전거를 타고 가서 보니 진해라는 도시도 참 작긴 하지만 내가 알던 그 동네는 조막만 하게 보였다. 우리 집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여좌천은 이렇게 정비되어 있었다. 사람은 내려갈 수 없는 모양인지 보기엔 좋은데 난 이 개천에서 멱도 감고 고기도 잡곤 했었다. 어쩌면 시골이란 곳에 살아본 적 없던 내게도 이런 기억이 남아 시골스런 추억처럼 느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외할아버지 집은 이 골목 어디엔가 있었는데 25년 만에 찾고 보니 대체 어디쯤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자전거에서 내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외할아버지 집 앞이라고 했다. 거긴 또 어떻게 갔냐는 엄마. 부산에서 멀지 않다고... 기껏 50km밖에 안 된다고 했지만 제주에서도 하루 왕복 50km씩 자전거를 타는 엄마는 내게 그 먼 곳까지 자전거를 타냐고 한다. 엄마에게 들으니 외할아버지 돌아가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살던 집은 철거하고 새로 지어서 매각했다고 한다. 지금 그 집엔 누가 살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내 소설 <오래된 집, 이음>은 그런 호기심에서 시작되어 쓰게 된 거다. 50년 동안 한 집에 살던 여러 가족들이 반 세기에 걸친 사랑에 대한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이야기...



잠시지만 다녔던 대야초등학교에 가봤다. 지금 봐도 학교 규모가 엄청나다. 어느 학교인지는 모르겠지만 외할아버지는 교장선생님으로 퇴직하셨다. 할아버지 때문에 엄마는 처녀 시절에도 그 흔한 미팅 같은 걸 한 번도 못해 봤다며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작은 도시 부잣집 셋째 딸에 아버지는 선생님이셨으니 말이다.



학교 앞 골목은 여전했다. 건물은 바뀌었지만 문방구가 있던 자리도 그대로다. 거의 반 세기가 다 되어가는데 변한 거라곤 개축된 건물 몇 개와 정비된 도로뿐이라니...



잠시 다녔지만 대야초등학교 뒤쪽에 각인된 추억이 있었다. 그런데 그 추억의 공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내 기억엔 3층까지 가지가 뻗은 엄청 큰 뽕나무가 있었는데 오디 열매가 어찌나 큰지 쉬는 시간이면 창문을 열고 오디를 따서 먹느라 입이 새까맣게 됐던 기억이다. 도시에 살던 내겐 얼마나 임팩트가 큰 경험이었는지 모른다. 학교 끝나고 친구들과 벚나무에 매달려 열매를 따서 먹기도 했고 아카시아 나무에 기어 올라가 아카시아 꽃을 훑어 먹기도 했다.



이 개천은 여좌천의 상류 지류들 중 하나인데 내가 이 동네 살았을 땐 위쪽에 큰 저수지가 하나 있었다. 그 옆엔 외할아버지가 취미로 경작하는 큰 논들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농기계도 좋지 않았을 시절 논농사라는 게 취미로 할 수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한데 할아버지의 논은 결코 작지 않았다. 대부분 소작을 줬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혹시나 싶어 개천을 따라 올라갔지만 저수지는 온데간데없었다. 저수지엔 나의 많은 추억이 있었는데 영원히 사라진 거다. 저수지 원류 지점에서 가재도 잡고 저수지에 울타리처럼 조성된 산딸기도 따먹고, 찔레순도 벗겨 먹고, 들판에서 자란 꽈리도 먹었었다. 그저 동네 친구들에게 하나씩 시골 놀이를 배웠던 그 자잘한 경험들이 내겐 엄청 강렬한 추억이 되었던 거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이 집들 중 하나였을 것 같기도 하다. 인천으로 발령이 난 다음 해 아버지는 사고로 운명하셨는데 내겐 이 동네가 그 어떤 곳보다 깊은 추억이 남은 곳이다. 워낙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 그래서 내겐 아버지와의 많은 추억이 없다. 그중 이 동네에서의 추억은 얼마나 깊이 각인되었는지 모른다. 어느 날 밤 한껏 술에 취한 상태로 귀가한 아버지는 갑자기 야영을 가자고 하셨다.


우리 가족은 동네 뒷산 계곡으로 자주 캠핑을 갔다. 직업군인이셨던 아버지는 집에 있는 A형 군용 텐트와 각종 군용품을 배낭에 챙겨 넣었고 엄마는 계곡에서 먹을 음식과 조리를 위한 도구를 준비했다. 동생과 나는 그저 놀러 간다는 자체만으로도 즐거운 나머지 좋아하는 장난감 몇 개를 손가방에 집어넣었다. 승용차도 대중교통도 없이 자전거 한대에 무거운 짐을 싣고 산으로 떠나는 캠핑. 힘들게 산을 올라 농업용 저수지의 원류인 계곡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넓은 공간이 조성되어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계곡에 우리만의 아지트인 A형 텐트를 세우고 엄마는 저녁식사 준비를 했다. 밖에 나가서 먹으면 뭐든 맛있다는 걸 절실하게 느꼈던 것 같다. 당시는 딱히 군것질 거리도 없고 놀 거리도 많지 않았기 캠핑 가서 먹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기껏해야 수제비 정도와 아버지가 미군 합동훈련 때 얻어온 통조림들이었다. 정말 캠핑이나 가야 먹을 수 있었던 귀한 음식이었던 것을 이제야 기억한다. 산속 계곡에서 먹는 삼겹살은 그야말로 예술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풀벌레 소리, 이름 모를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음악이 됐고 온 가족이 함께 시끌벅적거리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그 이상의 바람이 없었다.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세상을 떠난 지 37년이나 된 아버지와의 추억 때문인 거다. 그냥 울어도 될 건데... 난 참아내고 말았다. 이상하게 여기서 이러고 싶진 않았던 거다.



아마 이 자리의 버스정류장은 예전 그대로인 것 같다. 근처에 오락실이 있었는데... 갤러그와 엑스리온이라는 게임에 푹 빠져 많이 혼났던 기억도 난다.






이제 다시 복귀하는 길이다. 맘 같아선 장복산 넘어서 창원으로 해서 김해로 빠져나가고 싶지만 최대한 국도를 피하고 싶어서 왔던 길로 돌아가기로 했다. 엄마는 한사코 조심해서 돌아가라며 성화였다.

여좌동에 막내 이모가 사신다지만 이 나이에 쫄쫄이 입고 이모 만나러 가는 것도 웃기고 해서 그냥 돌아가기로 했다.



기억은 참 웃기는 거다. 경사가 그리 세 보였던 언덕인데 지금의 내겐 평지 같다.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희야네국수 있는 자리에 여좌통닭이라고 있었다. 당시엔 아버지 월급날이 통닭 먹는 날이었다. 우리 집은 항상 먹을 게 풍족했던 편인데도 그놈의 통닭은 별미 중의 별미였다. 특히 여좌통닭은 군부대에서 입수한 기름으로 튀겼다고 했는데 맛이 기가 막혔던 기억이다. 엄마도 세상 어느 통닭보다 맛있었다고 한다. 완전 추억의 통닭인데 지금은 없다.

직진해서 들어가면 외갓집이 있던 곳이다.



우연히 이 길로 접어들었는데 무려 42년이 지난 기억이 되살아 났다. 정말 웃기는 일이 바로 이곳에서 있었던 거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기억나지는 않는데 병원에 갔다가 주사 맞는 타이밍에 도망쳐 나왔다가 병원 문 닫을 때까지 기다려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다. 지금도 주사는 무서운 존재지만 당시엔 얼마나 무서웠던지 바로 줄행랑을 쳤었으니... 엄마에게 혼나는 게 그나마 덜 무서웠던 것 같다.



시내를 벗어나 소죽도공원이라는 곳에 멈췄다. 짧게 자란 나무와 공연장이 있는 아담한 공원인데 바닷가라 그런지 분위기가 좋았다. 여기 남는 벤치를 차지하고 앉아 전화 한 통 하며 잠시 땀을 식혔다.



참 신기한 건 철도가 놓인 이 절벽이 언제부터 내 기억에 남아 있었던 걸까? 왜 그렇게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위치는 아래 주소...

http://kko.to/nd_QMavSA




해안도로를 달리며 뭔가 이상하게 생긴 건물이 있다 싶었는데 음지도라는 섬에 조성된 창원솔라타워라고 한다. 안타까운 건 같은 돈 들여 저렇게 허접한 건축설계를 할 수 있다는 용기가 가상하게 느껴졌다. 제정신들이 아니다.



재덕만매립지를 지나 아라미르CC 옆을 타고 달렸다. 원래 계획으로는 남문경제자유구역을 거쳐 흰돌메공원, 황포돛대노래비, 안골포를 거쳐 가는 걸 계획했었는데 너무 많이 달린 거다. 돌아가긴 귀찮고 해서 지도를 보니 부산신항 옆으로 뭔가 대규모 조성공사를 하는 지역이 보였다. 도로가 없지는 않은 것 같았고...



여긴 수도동이라고 한다. 지도를 보니 저 멀리 있는 섬은 아랫꼬지섬인가보다. 나중에 캠핑 장비 챙겨서 다시 오기로 맘먹었다. 조용한 게 딱 내 취향이다. ㅎ



아직 포장되지 않은 상태라 바퀴 펑크 날까 염려되어 아주 살살 달려줬다. 스페어 키트는 항상 준비하고 다니지만 귀찮은 일이니까 말이다.



부산신항 안에 난 대로 옆을 달리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시원하긴 하지만 미끄러질 우려도 있고 대형 컨테이너 트럭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평일이었다면 목숨에 위태로움을 느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절대 이 코스로 오지 말았어야 하는 거다. 웅천대교를 건넌 후 5km 정도 되는 거리를 35km/h 속도로 꾸준히 달려 빨리 벗어나기로 했다. 견마도 근처에서 길을 잘못 들어 이리저리 헤매다가 다시 돌아와 갈맷길을 찾아냈다.



생각 없이 가다가 가지 않아도 되는 업힐을 끝까지 갔다가 상수시설까지 봤다. 다시 내려와 이미 익숙한 길로 접어들었고 이젠 길을 찾는 걸 가지고 고민할 일이 없으니 마음이 편해졌으니.



돌아 나오는 길은 명지신도시 외곽 해안도로를 선택했다. 안 가본 길을 가보는 게 더 재밌으니까 말이다. 한적하고 다 좋았는데 여기도 태풍의 피해가 있었는지 중간에 막힌 구간이 있어서 다시 공도를 타야 했다. 차가 없는 한적한 도로라 다행이었다.



명지항 인근에 도착, 5km쯤 남은 시점이다. 강수량이 많아져 여기서 콜라 한 잔으로 원기 회복하고 다시 달려 주차 지점까지 돌아왔다. 이번에도 역시 한 끼도 안 먹었다. 음료수만 줄기차게 마시다 왔다. 혼자 다니면서 이렇게 안 먹고 다니는 걸 피하겠다고 하면서도 라이딩만 나서면 어쩔 수 없다. ㅠㅠ



숙소로 돌아와 먹는다는 게 또 이모양이다. 짜파게티에 스팸 한 통(다 먹진 못했지만), 소주 2병(1병 남겼다), 건빵 한 봉... 너무 일찍 들어온 걸까? 피곤하지도 않고 술도 안 당기고...

베란다에서 흙탕물에 지저분해진 자전거를 세차하고 첫 끼를 먹었다.



8시부터 라이딩을 시작해 3시 42분에 종료했으니 아주 편안한 라이딩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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