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깁니다!"
호현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민경은 누굴 만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어 당황스러웠다. 집 앞이라 외모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나오기도 했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도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평소 이런 적이 없었던 호현에게 실망감이 들었다. 게다가 호현의 표정에 밝은 빛이 도는 것을 확인하고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윤정 씨. 이쪽으로..."
민경은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여자라니...' 짧은 순간에 불과하지만 이유 없는 불안과 초조함이 밀려드는 것이 강박증으로 변해갔다. 가장 먼저 하얀 손에 들린 핸드백이 눈에 들어왔다. 언뜻 봐도 검은색 금색 로고를 번쩍이는 샤넬 최고급 제품이었다. 그뿐 아니었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전체적으로 조화롭게 부티가 나는 여자였다. 하얀 피부에 검은 가죽 장갑이 묘하게 대조적이면서도 절대적으로 어울려 보였다. 피부는 우유처럼 뽀얗고 전체적으로 어딜 보나 자연미인이었다. 이미 방송에도 공개했듯이 민경은 일부 과학과 의료기술의 도움으로 미인 소리를 들어왔다. 좌절감 같은 게 느껴졌다. 더군다나 방송국에서 만난 대한민국 누구나 최고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던 미녀들도 민경을 이렇게까지 압도하게 만들지 못했었다. 게다가 호현의 표정은 전에 없이 밝았다. 민경은 후회가 밀려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작 사귀자고 고백이라도 했어야 했나 하는 후회였다.
선글라스도 쓰지 않은 작은 얼굴은 큰 키에 운동으로 다져진 건강한 체구와 조각처럼 잘 어울렸다. 신이 빚어 내린 어떤 생명체도 그녀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동양적인 작은 눈매는 오히려 서양미가 엿보였으며 풍만한 가슴은 어떤 남자도 숨을 쉬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얕게 날이 선 코는 도도함이 내재되어 있었다. 기껏 립글로우즈나 발랐을 것 같은 도톰한 입술에서 나오는 언어는 지혜로움이 녹아있을 것만 같았다. 턱 아래쪽에 난 작은 점은 완벽한 아름다움에 방점을 찍은 듯 보였다. 어쩌면 신이 방심해서 찍어졌을 턱 밑 점이 없었다면 어떤 남자도 선뜻 말을 건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윤정이 가까이 다가오자 민경은 숨이 막혀버릴 것만 같았다.
민경은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심호흡을 했지만 그마저 쉽지 않았다.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윤정의 미모 때문은 아니었다. 호현의 표정, 그건 그저 잘 알고 지내는 여자를 보는 눈빛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왠지 턱이 시려오는 느낌이었다. 민경은... 평생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약간 허스키한 느낌의 목소리는 도도한 외모에 지적인 아름다움까지 거머쥐고 있었다. 민경은 그녀의 밝게 미소를 짓는 얼굴에 황홀할 지경이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미의 기준이라는 게 송두리째 날아가고 없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최고라고 할 수 있는 대단한 미모가 아니라는 건 인지하면서도 묘하게 주체하지 못할 마력 같은 것이 윤정에게 있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민경은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법에 걸린 것처럼 자유롭지 않았다. 목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 내가 대체 왜 이러지?'
"민경 씨, 인사해요. 송윤정 씨라고 자산가이면서 독지가에다가 그리..."
"그만 하세요. 좀~ 맨날 이렇게 해야 되나요?"
윤정이 호현의 말을 제지하려 손을 잡아끌었다. 민경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저... 누구신지 모르겠는데, 누구 소개받는다는 소리를 못 들었는데..."
민경이 말끝을 흐렸다. 이제 조금씩 정신이 드는 듯했다.
"미안해요. 말씀드린 분이 바로 윤정 씨예요. 놀라게 해 드릴 생각으로 미리 말하지 않은 건데 제가 잘못한 듯한 기분이 드네요."
호현은 민경의 표정에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뭔가 예상치 않은 상황으로 흐르는 것 같았다.
"아녜요. 괜찮아요. 일 좀 잘해보자는 건데 어때요?"
민경이 웃으며 말했지만 표정은 그다지 부드럽지 않아 보였다.
"제가 잘못 온 건 아니죠? 호현 씨?"
윤정 역시 웃으며 말했지만 표정은 곱지 않았다. 민경은 제대로 처신하지 못한 자신을 나무랐다. 호현 역시 원하지도 않았고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애매한 분위기를 계산했다. 호현은 민경을 마음에 두고 있었기에 어떤 일이든 돕기 위해 마음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어렵게 부탁해 이런 자리까지 만들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린 민경은 윤정을 조목조목 뜯어보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신이라는 존재가 이렇게 불공평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살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예쁘고 돈도 많고 독지 활동을 할 정도로 마음도 넓은 여자가 사이버 금융범죄 자문가라는 타이틀까지 갖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편견 때문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내는 건 금세였다. 민경은 호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윤정을 두고 '여자들도 반해버리는 멋진 분'이라는 표현에 여자일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민경은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호현의 표현이 절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다. 호현의 설명에 의하면 민간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통찰력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고 했다. 콜롬비아 대학에서 재무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재경부 외자 관리부 자문을 맡고 있다는 사람이 여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완벽한 추리를 추구하는 민경은 아주 치명적 오류였다고 자책했다. 생각은 꼬리를 물며 꼬이고 꼬였다. 어쩌면 춘자의 취미생활 방송을 진행하는 게 너무 아마추어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시청자들에게는 그저 예쁘장하게 생긴 성형미인이 진행하는 오락 수준의 추리 방송 정도로 보이지는 않았을까? 민경은 춘자가 되었다가 다시 민경이 되었다가 정체성을 오가며 기억 속 지난 방송들을 휘리릭 돌려 보았다.
"죄송합니다. 피디님이 미안하실 일이 뭐가 있어요. 제 잘못이네요. 제가 잠깐 잊고 있었어요. 그게 오늘 인지도 몰랐거든요. 피디님 죄송해요."
민경은 호현이 윤정을 여자로 보지 않기만을 바랐지만 윤정의 호현을 보는 눈빛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그건 여자의 심안으로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민경은 잘못 본 걸 거라고, 절대 그런 마음은 아닐 거라며 생각을 눌러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