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윤정의 미스터리 part.1

by 루파고

윤정은 고등학교 삼 년 내내 편의점 알바를 했다. 최저시급에 준하는 수준이었지만 그거라도 벌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친구들이 학원 다니고 도서관에서 공부할 때 윤정은 언제나 편의점을 지켰다. 불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점장은 윤정의 야간 알바를 모른 척해 주었다. 그래 봐야 밤 열 시부터 두 시간이지만 한 달이면 엄청 큰돈이었다. 기초생활수급 대상이라 정부 지원금이 나오긴 했지만 엄마 병원비와 약값으로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몸이 아파 하루라도 쉬는 날이 생기는 달엔 가계 유지 자체도 버거울 정도였다. 주말엔 아침 여덟 시부터 자정까지 붙박이로 편의점을 지켰다. 끼니도 편의점 사장이 준 유통기한 지난 김밥 같은 것으로 때웠다. 가끔은 유통기한이 가까스로 남은 우유 같은 걸 주기도 했다. 하루 종일 편의점 밖을 나가지 못하는 윤정은 어디 아픈 사람처럼 얼굴이 하얬다. 그렇지 않아도 예쁜 윤정의 외모를 더욱 부각했다. 편의점 사장이 윤정에게 나름의 혜택을 주는 이유가 있었다. 목으로 보자면 길 건너 편의점이 훨씬 좋은데 그 편의점은 유난히 손님이 많은 이유가 윤정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정은 남학생들에게 수도 없이 프러포즈를 받았지만 단 하루도 시간적인 여유를 낼 형편이 아니었다. 물론 윤정의 마음을 들뜨게 한 남학생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그 때문에 윤정의 좁은 어깨가 한없이 처지곤 했다.

가끔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까지 따라붙는 남학생들도 있었고 껄렁한 남학생들 때문에 겁이 나서 지구대로 도망친 적도 몇 번 있었다. 너무 힘이 들 때면 영화처럼 삶의 고단함을 들어줄 왕자님을 상상하기도 했다. 어쩌면 키다리 아저씨 같은 동화 속 후원인 같은 존재가 자신에게도 나타날지 모른다는 헛된 상상이었다. 그게 꿈이 현실이 되긴 했지만.

삼십 대 후반인 점장 역시 윤정을 힐끔거리곤 했다. 사실 처음부터 눈치를 챘지만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다. 집에서 제일 가까운 위치인 데다 시간당 천 원씩 더 쳐서 주는 점장이 고맙기도 했다. 가슴이 도드라지게 나오기 시작하던 중학생 때부터 남자들의 시선을 참아내는 걸 숨 쉬듯 해왔던 윤정에게 그의 시선은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려 세 달 넘게 매일같이 찾아오던 남학생이 있었다. 그는 선물 하나를 남긴 채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착한 얼굴의 남학생은 윤정이 가장 마음에 두던 학생이었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선물이라 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에 사는 누군지조차 알 길이 없어 불가항력적으로 받은 선물이 됐다.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나며 남학생은 윤정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흐려져 갔다.

고등학교 3학년 때에는 평상복 위에 편의점 조끼를 걸치고 있는 윤정을 학생이라고 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잘 먹지도 못하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키가 큰 편이고 가린다고 가려질 수 없을 정도로 글래머가 되고 있었다. 현재의 윤정이 거의 완성될 무렵이었다. 여름이 되자 옷은 얇아졌고 해는 길어져 편의점 앞에서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자정이 가까워지면 고주망태가 되어 나타난 취객들이 추파를 던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정의의 사도 한두 명쯤 나타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사고가 있던 날 역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주 평범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일본과 축구경기가 있었고 무더기로 몰려온 취객들은 파라솔 테이블을 장악했다. 퇴근 전에 테이블 위 쓰레기를 치우려 나갔지만 취객들 중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 있었는지 스스로 주변까지 정리하고 있었다. 그 역시 이 년 가까이 단골이 된 청년이었다. 윤정의 고맙다는 인사치레만으로도 그의 표정은 환하게 밝아졌다. 맥주를 마시던 그는 손님으로 길게 늘어진 편의점 계산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윤정을 힐끔거렸다.

열두 시를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하지만 교대해 줄 사람은 도착하지 않았다. 윤정은 평소 지각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라 그럴려니 하고 포기했다. 다퉈봐야 피곤하기만 할 뿐이었다. 점장이 다른 알바를 구해 보겠다고 했지만 사람 구하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근무시간이 십 분이 더 지나서야 교대자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윤정은 그가 근처에 도착해서야 뛰어오는 척한 거라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윤정은 편의점 조끼를 벗어 창고에 접어 넣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집까지는 걸어서 불과 십 분 정도 거리지만 후미진 골목이 많은 동네를 지나야 했다. 물론 집은 그보다 더 후미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절반 정도 지점을 지날 때쯤, 윤정은 눈동자와 십 센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시퍼렇게 날이 선 커터칼이 보였다.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면 그대로 눈을 그었을지도 모른다.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느낌이 아닌 사실이었다. 강한 통증과 함께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버린 것이다. 분명히 의식은 살아있었지만 목 아래는 남의 것이 된 것만 같았다. 잠시 후 뒤통수에서 강한 고통이 느껴졌다. 태어나서 그런 류의 고통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당최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앞에 한 남자가 섰고 얼굴을 똑바로 보고 있었지만 알아볼 수 없었다. 판단력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생각은 했지만 입 밖으로는 소리는 전달되지 않았다. 눈앞에 익숙한 담장과 철문이 스쳐갔다. 뒤통수를 따라 흐르던 피는 귀 끝에 맺혀 한 방울씩 떨어졌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났고 뭔가 부서지는 소리도 났다. 의식은 가물가물했다. 이대로 죽는가 보다 생각했다. 윤정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데, 그저 알바 외엔 해본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데... 순간 혼자 남은 엄마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옷이 찢어지는 게 느껴졌다. 몸을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감각은 그대로 살아있었다. 팬티가 찢어지고 브래지어도 뜯겨 나갔다. 눈물을 흘리는지 피를 흘리는지 알 수 없었다. 다리가 벌어졌는지 습한 공기가 허벅지 안쪽 피부로 느껴졌다. 윤정은 스스로 정신을 놓아버렸다. 어쩌면 그게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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