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윤정의 미스터리 part.2

by 루파고

온통 암흑이었다. 정신이 희미하게 살아나기 시작한 건 요란한 소리 때문이었다. 정신이 맑아지며 통증으로 인한 고통이 강해졌다. 뒤통수는 깨질 듯이 아프고 욱신거렸다. 분명 본인의 신음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입이 뭔가로 막혀있었다. 윤정은 고통을 딛고 팔다리를 움직여보려 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묶여있다는 걸 조금씩 인정해야 했다. 장시간 피가 통하지 않았는지 감각은 무디어져 있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느끼며 억지로 눈을 떴지만 정작 보이는 건 없었다. 앞통수인지 뒤통수인지 모를 부위는 뭔지 알 수 없는 것으로 덮인 듯했다.

두려운 소리가 점점 또렷하고 들려왔다.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였다. 잠시 후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고 욕설과 함께 누군가 뛰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정적만 흘렀다. 정적만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위치는 알 수 없지만 바스락거리는 희미한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윤정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모든 게 공포 그 자체였다.

순간 윤정은 마지막 기억을 놓았을 때 기억이 났다. 그때서야 하반신이 노출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가느다란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온몸에 닭살이 돋아났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온갖 수치심에 미칠 것만 같았지만 몸 어느 것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팔다리가 묶여 있었던지 피가 통하지 않아 저리다 못해 무감각해진 것이다. 엉뚱하게도 팔이나 다리 하나 이상 잘라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지금 누군가 자신의 나체를 감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이어 숨을 죽이고 다른 사람의 숨소리에 귀 기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정은 자신 외에는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스친 듯한 기억을 더듬던 윤정은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이 자신을 겁탈하고 어떤 이유로 싸움이 났으며 이곳을 도망쳤을 거라고 생각했다. 추리할 수 있는 건 그 정도뿐이었다. 누군가 윤정을 발견한다면 이 수치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볼 것이라는 생각에 미쳤고 이내 치를 떨었다.

십 분 정도 지났을 시간이 윤정에게는 한평생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공포심과 수치심만 가득한 상황이었다. 멀리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바닥을 딛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공포 그 자체였다. 소리가 가까워올수록 공포는 극에 달해갔다. 윤정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날 정도로 아팠지만 그따위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누군가 근처까지 다가왔고 거친 숨소리와 숨결이 닿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 밀고 온 공기의 흐름이 하체에서 느껴졌다. 또 당할 거라는 생각에 미칠 것만 같았다. 눈물이 왕창 쏟아졌다.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었다. 언젠가 사극에서 보았던 것처럼 혀를 깨물면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용기는 나지 않았다. 혀만 잘리고 죽기 못할 것이 두려웠다.

하반신 위로 뭔가가 눌려지는 게 느껴졌다. 상대의 체온이 느껴졌다. 끄응, 하는 소리가 났다. 아마도 심장에서 울컥거리는 공포가 목에서 울려 퍼진 것만 같았다.

"미안해요."

남자의 목소리였다. 익숙했다. 편의점 손님 중 한 명이다. 기억을 더듬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봤지만 누군지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 속에서 몇 사람이 후보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경찰인 듯싶었다. 윤정은 몇 가지를 가정하여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적어도 지금 옆에 있는 목소리의 남자는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하반신 위로 눌린 건 옷가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몇 사람이 뛰어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긴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신고하신 분입니까?"

그를 발견한 경찰 한 명이 윤정 옆에 있던 남자를 발견하고 물었다.

"네, 제가 신고했습니다. 저기..."

남자가 윤정 쪽을 가리키자 경찰은 윤정을 보았고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는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당하지 못하는 듯했다. 윤정은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했지만 창피하고 민망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더한 상황에 이르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기로 자신을 추슬렀다. 하지만 눈물은 끊어지지 않았다. 평생 울어도 다 흘릴 수 없는 눈물을 다 쏟아내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제가 손대면 범인 지문 같은 게 없어질 것 같아서 어쩌지도 못하고 이렇게만 있었는데... 윤정 씨가..."

"아... 그렇긴 하죠. 일단 담당 형사가 거의 도착했을 테니 잠시만 기다려 보시죠. 그나저나..."

그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두 사람이 도착했다.

"김형사. 응급차 빨리 오라고 해. 이 친구 뭐야? 이대로 그냥 뒀어? 어떻게라도 했어야지."

형사인 듯한 사람이 먼저 도착한 경찰에게 소리를 질렀다. 윤정 옆으로 다가선 사람은 여자 형사였다.

"괜찮아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녀는 윤정의 몸 위에 담요 같은 걸 덮어주었다. 소리를 질렀던 형사는 사건 현장을 촬영하고 윤정의 손과 발을 묶은 곳에 간단한 지문감식 절차를 거친 후 결박을 풀었다. 윤정은 여자 형사의 부축으로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지만 곧장 정신을 잃고 말았다.

경찰은 윤정을 겁탈한 범인의 흔적은 찾아내지 못했다. 재개발로 철거를 앞둔 오래된 상가 안에서 수십 명의 지문이 발견되었지만 오래전 남겨진 것들이었다. 경찰은 치밀하게 준비된 범죄이며 한 명 이상일 가능성을 보고 있었다. 윤정이 두 명 이상일 것이라고 느꼈던 것이 그들의 수사에 작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윤정을 구해준 남자는 한동안 경찰에게 시달려야 했다. 윤정이 병원에 입원하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녀의 어머니도 응급실에 실려갔고 몇 시간 후 쇼크로 사망하고 말았다. 사건이 어떻게 조사되고 어떻게 결론을 짓건 윤정은 관심도 없었다. 치욕적인 사고를 당한 것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 하나뿐인 가족인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고 나니 삶의 목적을 잃은 것이다. 그대로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의식을 차렸을 때 손목을 긋고 자살을 시도했다. 거의 일주일을 무의식 상태로 지냈는데 의식이 돌아온 그녀는 차라리 무의식 상태였던 때가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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