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윤정의 키다리 아저씨

by 루파고

이겨낼 수 없을 것만 같은 충격이 연달아 강타했지만 윤정의 정신은 온전했다. 차라리 죽고 싶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르지 않는 눈물도 야속했다. 의식이 돌아온 후 가끔씩 형사, 사회단체, 기자가 수시로 병실 문을 두드렸다. 이틀 후 윤정은 호텔방보다 멋진 VIP병실로 이송됐다. 어떻게 그런 곳으로 옮겨졌는지 알 수 없었는데 어떤 독지가의 조치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부담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들긴 했다. 할머니와 단둘이 살면서 평생을 돈 걱정만 하며 살았던 윤정은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에도 벌벌 떨며 살아왔다. 평생 이런 호사스러움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상상조차...

VIP병실로 옮긴 후 외부인들과의 접촉이 줄어들었다.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던 윤정은 화장실도 병실 안에 있어 문 밖으로 나갈 일이 없어서 좋았다. 일면식도 없는 자신을 돕는 독지가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알아낼 방법도 없었고 부담스러움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런 상황이 모두 각본에 짜인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생겼다.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의심하거나 두려워하며 살아본 적이 없었던 윤정에게 세상 모든 것이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공황장애나 조현병을 의심케 할 정도로 밤마다 시달리는 악몽은 평생을 갈 것 같았다. 병원에서 처방해 준 약도 소용이 없었다. 엄마를 가슴속에 갈무리한 윤정은 스스로를 가두기 시작했다. 그나마 마음을 열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담당의사와 간호사뿐이었다. 스마트폰도 TV도 켜지 않았다. 어떤 활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앉아서 몇 시간도 훌쩍 날아가 버렸다. 온갖 잡념이 사로잡았지만 그날의 기억이 고개를 드는 것보다는 나았다. 의사는 새로운 병을 만드는 거라며 사회성을 찾아야 한다고 했지만 윤정은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심리치료사가 병실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병원에서 보낸 시간은 거의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여름방학도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학교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독지가의 도움도 머지않아 끝날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병실을 나서는 순간 세상엔 혼자만 남을 것이 두려웠다. 자신을 겁탈한 범인은 잡히지도 않았고 정체도 파악되지 않는다고 했다.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병원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공포였다.


*


"죄송해요."

민경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주변의 시선 따위엔 관심을 가질 심적인 여유도 없었다. 이미 감정에 복받쳐 있었다. 그런 고통을 겪고도 이렇게 해맑은 표정으로 잘 살아가는 윤정에게서 존경심이 우러났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자가 지옥 같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니 자기도 모르게 치가 떨렸다.

"괜찮아요. 지난 일인 걸요. 이젠 다 이겨냈어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젠!"

윤정이 테이블 위에 올려진 민경의 손등을 살며시 두드렸다. 민경은 왠지 입장이 바뀐 게 아닌가 싶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간신히 울음을 참느라 가슴을 짓누르며 긴 숨을 몰아 쉬던 민경이 침을 꼴깍 넘겼다.

"그럼 지금까지 미결 사건인 채로 있는 건가요?"

민경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물었다.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무섭지 않아요? 그들이 다시 찾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민경의 걱정 어린 말에 윤정은 피식 웃었다.

"올 테면 와보라죠. 이젠 무섭지 않아요. 오히려 찾아와 줬으면 해요. 이 참에 마무리 짓고 털어버리고 싶으니까요."

민경은 설마 하는 표정이었지만 윤정은 전혀 대수롭지 않은 듯한 표정이었다.

"우리, 함께 잡아보는 건 어때요?"

민경은 눈물을 닦아낸 후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는 마음이 안정될 때를 기다려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고 저를 부른 거 아니었나요?"

윤정은 눈을 흘기듯이 호현을 돌아보았다. 호현은 움찔하는 듯 어깨를 짧게 들썩였다. 민경과는 전혀 이야기된 게 없었기 때문이다.

"비트코인 때문에 만난 게 아니었군요?"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민경도 호현을 쏘아보며 물었다.

"둘 다 왜 이러세요? 제 이야기는 아직 듣지도 않았잖아요."

호현이 손사래를 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지금 두 마리 토끼를 잡자는 건가요?"

민경이 놀란 눈을 하며 물었다.

"세 마리 같은데요. 한 마리는 잡혔고요."

호현은 속을 읽을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무슨......"

"토끼눈을 가진 민경 씨는 이미 잡혔으니까요."

호현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민경의 표정에 멍청한 농담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나이에 벌써 아재 개그네요. 이러니 남들 다 하는 오락프로그램 하나 못 맡았죠."

호현은 스스로를 폄하하며 분위기를 돌리려 했다.

"그 덕에 나를 만난 거죠."

민경의 말에 호현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으로 시작하긴 했지만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말 궁금한데요, 독지가라는 분은 만나보셨나요?"

"미국에 가면 만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웃기지만 저는 키다리 아저씨를 그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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