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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파고 Apr 09. 2023

30년 맛집, 85탄-최초로 밀면을 개발한 내호냉면

어느 지역이나 오래되면 허물고 다시 짓곤 하겠지만 근대화가 빨랐지만 한국전쟁 피란처로 마구잡이식 개발로 개미집처럼 얽히고설킨 골목으로 조성된 부산은 곳곳이 시한부 인생이다.

그중 내호냉면이 위치한 우암동 역시 마찬가지다.

우암동은 부산외대가 있던 곳이기도 한데 부산외대는 일찌감치 금정구로 이전했고 학교 터는 재개발 이슈로 몸살을 앓고 있다.

시한부라는 게 느껴지는 건 내호냉면 바로 옆은 이미 재개발이 한창이기 때문이다.



좀 일찍 퇴근해서 갔더니 아직 저녁식사 시간 전이라 손님이 뜸했다.

골목 안에 내호냉면 간판이 여기저기 붙어 있어 뭔가 했더니 그 골목 안의 점포 몇 개가 내호냉면이라고 한다.

아마 시한부 골목의 생명이 끝날 시점이 되면 어느 지역에 대형 식당을 짓고 영업하게 되리라 싶다.

그땐 이런 노포식당 다운 느낌은 사라지고 없게 될 거다.

난 식당의 음식 맛도 중요하지만 그런 오랜 느낌, 사람들의 추억이 가득한 공간이 좋다.

추억이 뜨거운 그 공간들이 지워지는 게 너무 아쉽다.



여느 노포맛집과 다를 게 없이 매스컴 탄 기사들이나 이런저런 것들이 벽면 가득하다.

그중 내호냉면 100년 가계도라는 게 눈에 띄는데 피난 내려오기 전부터 함경남도에서 냉면집을 했었다는 기록이다.


내호냉면은 묻고 따지고 할 것도 없이 밀면이라는 음식을 처음 만든 곳이다.

부산사람 누구도 그것에 대해 반박하지 못한다고 들었다.

피난 내려온 사람들이 냉면을 먹고 싶어도 비싼 메밀면을 구하기 어려워 보급으로 나오는 밀가루를 가지고 면을 만들어 냉면처럼 만들어 먹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바,

내호냉면이 최초로 만든 거란다.



뜨거운 육수가 먼저 나왔다.

그런데 다짜고짜 소주 두 병을 주문한 설 모씨.

미친 거 아니냐고 하면서도 그걸 당연한 듯 반기는 난 뭔지...

그런데 설 모씨는 '선주후면' 모르냐고... 무식하다며...


先酒後麵

먼저 술을 마시고 난 뒤에 국수를 먹는다는 말.


원래 있는 한자성어다.

그래! 나 무식하다!



주전자는 대체 몇 년 됐을까?

젓가락도 한 줌 꺼내 보았는데 같은 녀석이 하나도 없다.



선수가 시키는 대로 먹어야 한다.

내호냉면은 식당 상호처럼 원래 냉면집이다.

그래서 냉면을 먼저 먹는 게 제대로 된 코스라고 한다.



면을 들었다 놨다 하는 날 이상하게 보는 알바 학생. ㅋㅋ

이해하렴~

나의 오래된 취미생활이라 어쩔 수 없다네.

냉면집에 편육이 없으면 에러라는 정설이 있다.

육수를 사다 쓴다는 말이다.

고로, 내호냉면은 육수를 만들어 쓰는 식당이라는 걸 반증하는 거다.



보통 달라는 사람이 없는 편이라 양념장을 더 달라고 하면 이렇게 왕창 갖다 준다고 한다.



이번엔 기다리던 밀면이 나왔다.

1인 1냉 1밀이다.

이게 내호냉면 공식이라는 거다.



그런데 내호냉면의 밀면의 면 식감이 어째 퍽퍽한 느낌이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처음 먹었던 밀면도 그랬고 지금 단골로 다니는 어떤 밀면집도 모두 쫄깃하고 질긴 면발이 특색인데 내호냉면 면발엔 쫄깃함이 없다.

오히려 퍼진 느낌이 들 정도로 퍽퍽하다.

그래서 육수에 면을 흔들어도 잘 흐트러지지 않는다.

단연코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는 최초의 밀면 창시자의 밀면인데 내가 알던 밀면과 다르다는 거다.

아주 머리 아픈 저녁이 됐다.

상식이 깨져 나갈 때의 아픔 같은 거다.

이렇든 저렇든 내게 맛있는 게 제일 맛있는 음식인 게 맞다.

아무튼 상식은 상식인 것이고, 내가 알고 있었던 밀면의 식감이 깨지고 보니 혼선이 없지 않았다.



세 사람이 이렇게 다섯 그릇을 먹었다.

한 사람은 냉면 큰 걸로 하나 해치웠다.

이렇게 바닥까지 탈탈 털어 마시고 나니 술 생각도 안 난다.



나오는 길에 주방이 오픈되어 있어 도촬 했다.

가격은 쫌 센 편이다.

개금밀면 비싸다 생각하며 먹는 편이었는데 만만치 않다.

강남 물가를 방불케 하는 노포맛집들.

역시 맛집들은 사악하다.



내호냉면 근처의 시대가 마구 섞인 오묘한 복합체들이 재밌어 사진을 몇 장 찍어 봤다.

특히 '부산농산' 간판에 '버스표'라는 단어가 추억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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