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정주영 회장님은 한때 나의 우상이었다.
물론 지금도 변함없지만 한 가지 오점을 발견하고 말았다.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나의 잘못이지만 나처럼 우둔한 자에게 조금이라도 귀띔이 되는 문구를 삽입해 주셨더라면 삶의 오류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 같다.
몇 번의 사업을 크게 말아먹은(사람들은 폭망이라 하더라) 후에야 장사와 사업의 차이를 알게 됐다.
모 대학 교수로 있는 형님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해 주었건만 나는 정주영 회장님의 장사론을 들고 따졌었다.
술자리에서 사업가와 장사꾼의 차이를 두고 얼마나 다퉜는지 모른다.
성공한 사람의 말은 어떻게 표현해도 진리다.
나 같은 경우엔 이른바 폭망 후에 깨우친 경우다.
후회스럽고 늦었지만 어쨌든 진리를 알게 된 거다.
오래전 메모를 뒤적이다 이 글을 발견했다.
언제 썼는지 기억에도 없었다.
어디서 긁어다 놨다 싶었지만 거지 같은 문맥을 보니 내가 쓴 글이 맞다는 걸 알게 됐다.
주르륵 읽다 보니 고난의 시절에 이 글을 쓰던 느낌이 살아나 송곳처럼 가슴을 푹푹 찔러댔다.
단어 하나 하나가 기억났다.
20개를 채우려다 15개까지 쓰곤, 꼭 20개를 채울 필요가 뭐가 있겠냐며 나와 타협하고 15개로 접었던 기억도 났다.
생채기는 완전히 아물지 않았던 거다.
원래 글에서 조금 수정을 봤다.
오타, 문맥도 허접한 부분이 있고 오랜 세월이 지난 시점에 생각의 변화도 있었다.
1.
사업가는 사업을 시스템으로 본다. (즉, 플랫폼이며 프레임이다.)
장사꾼은 사업을 눈 앞의 돈으로만 본다.
2.
사업가는 1억을 투자해서 10억 벌겠다는 목표가 있다.
장사꾼은 1억이 아까워 주머니에서 꺼내지 않는다.
3.
사업가는 열매를 얻기 위해 씨를 뿌리지만,
장사꾼은 열매를 얻기 위해 바구니를 챙긴다.
4.
사업가는 규모를 키우는데 관심이 있다.
장사꾼은 내가 먹을 것에만 관심이 있다.
5.
사업가는 장사란 말을 싫어한다.
장사꾼은 본인이 사업가란 사실을 모른다.
6.
사업가는 자신이 프로 장사꾼이라고 생각한다.
장사꾼은 작은 이익이라도 챙기려 한다.
7.
사업가는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번다.
장사꾼은 방법은 중요지 않고 결과만 생각한다.
8.
사업가는 도덕과 윤리를 고려하지만
장사꾼은 남의 이목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9.
사업가는 새로운 정보와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
장사꾼은 공부와 담을 쌓는다.
10.
사업가는 후배 사업가에게 물려주고 노후의 편안한 삶을 꿈꾼다.
장사꾼은 죽을 때까지 돈을 벌 수 있는 것에 만족한다.
11.
사업가는 전문가를 알아보고 대우한다.
장사꾼은 자신만이 최고의 전문가라고 생각한다.
12.
사업가는 명예를 지키는 데 목숨을 건다.
장사꾼은 돈을 지키는 데 주력한다.
13.
사업가는 거래가 성사된 후 관계를 고려한다.
장사꾼은 거래 자체만 본다.
14.
사업가의 무대는 전 세계다.
장사꾼의 세계는 확장되지 않는다.
15.
사업가들 중 무늬만 사업가가 있는가 하면,
동네장사라 하더라도 사업가로 성장하는 사람도 있다.
지금의 나는 사업가의 자세가 되었을까?
아직 모르겠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생각은 있지만 지금처럼 마음 편한 삶이 바짓가랑이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노트와 기억 속에 쌓여만 가는 아이템들 중 누군가 시작했다는 뉴스를 보며 행동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할 뿐이다.
게으름과 실천의 부재로 깨우침의 가치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