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달리에서 세화 방향으로
2020년 1월 1일부터 무슨 자전거냐고들 하는데 내겐 나름 의미가 있었다.
매일 마시던 소주를 끊은지도 20여 일이나 됐고, 이참에 살도 팍팍 빼서 20대 때 몸을 만들어 보겠다는 취지가 있었다.
얼굴에 각이 사라진 후로 몸매는 포기하고 살았던 나를 잡아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새해가 밝았으니 정신 바짝 차리고 움직여 봐야겠다는 의지 같은 것이랄까?
아침 일찍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성산일출봉 아래까지 일출을 보러 갔으나 기상예보대로 일출을 볼 수는 없었다.
처음엔 성산까지 갈 생각이 없었는데 마침 일출 시간까지 십 분 이상 남아있었기에 좀 더 바다 가까운 곳까지 가기로 마음을 바꿨다.
일출은 이게 전부였다.
아쉽지만 뭐 어쩌겠는가?
아무튼 맘 속으로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소원을 빌었다.
특히, 한 가지 일은 더욱.
집으로 돌아가 아침을 챙겨 먹고 창고에서 자전거를 끌고 나섰다.
어제부터 강풍이 장난 아니었는데 바람이 잦아들 것 같지는 않았다.
바람은 북북서풍이다.
성산에서 올레길 21코스부터 19코스까지 한 번에 돌 계획인데 바람은 여지없이 맞바람이다.
바람은 거의 돌풍 수준이라 자전거가 잘 나가지 않았다.
골목길에나 접어들면 그나마 바람을 피해 달릴 수 있었다.
십 분 정도 달리자 마스크를 챙기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맞바람이라 얼굴이 따가웠다.
그래도 육지보다 온도가 높은 편이라 다행이다.
종달리 바닷가까지 가서 GARMIN GPS의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이제부터 21코스의 시작이다.
반시계 방향으로 도는 코스로 1, 2, 3-1, 3-2코스를 돌 때와는 반대 방향이다.
집과 가까운 코스를 먼저 돌기로 작정한 것이다.
해안도로를 끼고 아주 잠시 달리자 바로 지미봉으로 올레길이 이어졌다.
지미봉 앞 주차장에는 주차된 차가 많이 보였다.
1월 1일이라 지미봉 위에서 한 해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았다.
마침 지미봉에서 내려온 한 무리의 올레꾼들이 단체사진을 촬영하는 모습도 보였다.
지금껏 지미봉에 올라보지 않았기에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
이름이 독특한 지미봉은 내가 즐겨 다니는 낚시 포인트에서 랜드마크처럼 보이는 오름이다.
경사도가 가파를 것이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초반부터 자전거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십여 미터나 갔을까, 나는 자전거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경사는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경사도가 크다 보니 대부분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자전거를 끌고 메고 헉헉거리며 지미봉 정상으로 향했다.
무려 다섯 번은 쉰 것 같다.
생각했던 것보다 높은 오름이었던 것이다.
거의 다 올라간 지점에서 뒤를 돌아보니 성산일출봉을 배경으로 멋진 풍경이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곧 정상에 오르면 더욱 멋진 풍경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부풀었다.
정상에는 이십 명 가까운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자전거를 끌고 온 나를 신기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쩌겠냐?
올레길이 지미봉을 통과해야 하는 코스로 되어있는 것을.
성산일출봉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꽤나 장관이었다.
예전에 성산일출봉에 올랐을 때는 지미봉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다시 오른다면 확인해 봐야겠다.
땀을 식히려 겉옷을 벗어 두었는데 십 분 정도 지나자 몸에 한기가 스미기 시작했다.
이제 하산할 때가 된 것이다.
주섬주섬 옷가지를 걸치는데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경사진 언덕을 올라오면 재미있는 다운힐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을 상기한 나는 사람들이 내려간 후 한참 더 쉬었다.
기대했던 다운힐은 아주 짧았다.
올라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계단길이 대부분이어서 다운힐을 즐길 여건이 아니었다.
숲 속 길을 내달리는 기분은 MTB가 아니면 알 수 없다.
특히 다운힐을 즐기려면 안장이 낮아야 하는데 장거리 라이딩을 목적으로 안장을 높게 세팅한 상태라 몇 차례 힘든 상황을 겪기도 했다.
똥꼬에 아주 강렬한 충격파가......
지미봉 입구로 내려오니 안내판이 있다.
지미봉은 165.8m란다.
지미봉에서 농로를 지나는데 물이 고인 곳이 많아 낭패였다.
자전거 바퀴에 진흙이 붙으면 옷에 다 튀는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에 번거롭더라도 자전거를 들고 이동하는 게 현명한 일이다.
이런 길이 올레길답다.
돌담이 이어진 농로를 다니는 길은 제주만의 제주스러움을 담은 느낌이다.
농약 뿌릴 때 빼고.
종달리 크리스마스 리조트 뒤편으로 길이 나온다.
여기는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철새 도래지인 이 곳은 사시사철 묘한 매력을 지닌 곳이다.
바다 안쪽으로는 양식장이 있는데 지금도 운영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다리를 건너 하도해수욕장 앞에 잠시 멈춰 섰다.
자전거를 세워 두고 사진을 찍는데 내가 나오는 것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멋들어져 보인다.
토끼섬 앞인데 여기는 너울이 있는 날 벵에돔이 잘 나온다고 알려진 포인트다.
물이 빠졌을 때 토끼섬으로 가면 낚시가 잘 된다고 들었는데 아직 가보지는 못했다.
다음에 기회를 만들어 가보련다.
바닷가 길을 가다가 다시 내륙으로 돌아섰다.
잠시 달려가니 이번에도 도하를 해야 하는 상황.
여기서 처음으로 올레길 여행자들을 만났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고, 올레족은 물고인 곳에서 만난다. ㅎㅎ
하도리의 별방진이다.
별방진 뒤편으로 올레길이 나 있는데 지난번에 워낙 디테일하게 본 곳이라 지나면서 사진만 찍었다.
자전거에서 내리지도 않고 달리며 촬영한 건데 이 정도면 성공작인 듯하다.
다시 올레길스러운 길로 접어들어 제주의 정취를 느낀다.
돌담길은 언제 봐도 정감이 깊다.
봄이 되면 돌담 사이로 뱀도 슬그머니 기어 나온다.
농번기가 본격적으로 이어지면 사방에서 꿩 튀어나오는 소리에 놀라기도 한다.
요즘은 당근, 파, 무 농사가 한창이다.
한참을 달리니 올레길 안내판이 하나 보였다.
여기서부터는 숨비소리길이라고 안내되어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의 이상한 단독주택이 하나 보였고 돌담이 아니라 시멘트로 담을 이룬 묘도 보였다.
영 제주스럽지 않은 모습이다.
지나오면서 여럿 보긴 했는데 남의 집안일에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제주도 어르신들이라 과연 이런 모습을 두고 어떤 생각들을 하셨으려나 모르겠다.
하도리 동네로 다시 접어들기 시작했다.
면수동이라는 옛 지명이 어떤 의미를 가졌을지 궁금해졌다.
잘 운영되는 잔디 축구장이 하나 보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21코스는 종료다.
시골길을 달리다 다시 만난 문명의 모습이다.
코스의 마무리 시점이 다가왔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지점이다.
21코스의 마무리 지점인 해녀박물관 앞이다.
의외로 넓은 곳인데 제주를 그토록 헤집고 다녔음에도 이 곳에 처음 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하도리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일까?
어선 세 대가 육지에 올라와 있는 것도 이색적이다.
바닷가 도시에 가면 가끔씩 마주치는 모습이긴 하지만 제주에서 보니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해녀박물관은 휴장이었다.
왜 숨비소리길이라 했나 했더니 해녀박물관 때문이었던 것 같다.
다른 이유는 딱히 없는 것 같다.
1월 1일인데 국화는 매혹적인 자태를 뿜어내고 있었다.
겨울 맞나 싶지만 제주에서는 제주다운 모습이다.
나는 스탬프 찍는 행위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사진만 한 장 찍고 만다.
여기는 올레길 21코스 마무리 지점이자 시작 지점이다.
GARMIN 520 GPS를 끄고 결과를 저장했다.
거리는 11.18km라고 나와있지만 가끔 길을 잘못 들어 몇 백 미터 정도는 적게 잡아야 할 것이다.
지미봉을 오르는 것 외에는 딱히 경사진 곳은 없다.
바닷가 길을 갈 땐 환상자전거길과 겹치는 구간이 몇 있었는데 벌써 3바퀴나 돌아서 그런지 옛 기록과 겹치는 곳도 있었다.
올레길 21번 코스의 가장 멋진 곳은 두말할 것 없이 지미봉이 아니었나 싶다.
맞바람을 버티고 달린 덕에 운동량은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