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B로 올레길 종주하기_제19코스

by 루파고

20코스를 마치고 시계를 보니 벌써 2시 30분이 훌쩍 넘었다.

자칫 잘못하면 해가 지고도 올레길 어딘가를 헤매고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제주의 어둠이 공포처럼 들고 일어섰다.

제주는 가로등이 없어 해가 지면 암흑 그 자체다.

특히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올레길 같은 경우는 특히 심하다.

혹시 몰라 랜턴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그 상태로 자전거를 탄다는 건 사고 위험을 안고 간다는 거라 가급적 빨리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갑자기 20코스까지만 하고 말아야 하나, 절반만 할까 하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한다면 하는 막무가내 막무가내 루파고 아닌가?

나는 해가 지기 전까지 남은 시간이 없다는 판단에 발길을 재촉하고 말았다.

쉬는 시간은 거의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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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많아지며 날이 금세 어둑어둑해졌다.

숲길로 들어서면 음침해서 기분이 살짝 나빠지곤 했다.


제주에는 밭 한가운데 이렇게 묘가 있는 곳이 많다.

제주에만 있는 전통은 아니겠지만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집과 농지는 절대 팔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옛이야기지만 지금도 주변 어르신들이 손가락질을 한다 하여 비밀리에 매매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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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나타난 포장도로를 달리는데 다시 숲길이 나타났다.

이번엔 제발 좁은 산길이 아니기를......

그런데 하늘의 도움이 있었던지, 넓은 임도가 쭉 이어지는데 편안한 주행을 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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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풍력단지를 조성하며 만들어진 길이었던 것이다.

아주 달릴 만했다.

숲길 산책을 나온 듯한 즐거운 길이었다.

대신 사람 한 명 본 적 없는 게 흠이다.

물론 올레길 20번 코스를 달리면서 만난 사람은 달랑 3명뿐이다.

올레길에서 납치 인사 사고가 난 게 그저 우연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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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력발전기 숲을 통과해 나오니 정자 앞에 스탬프를 찍는 곳이 또 나왔다.

아직 길은 한참 멀었는데 왜 이런 게 있는 걸까?

그런데 이쯤 되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왠지 외롭다는...

역시 혼자 다니는 것보다 여럿이 다니는 게 훨씬 즐겁다는 사실을 실감한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제주에서 올레길 라이딩을 함께 다닐 사람이 아직 없는걸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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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동하는데 폐허가 된 잔디 축구장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육지에는 운동장이 부족해 난리인데 제주에는 이런 곳이 있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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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을 지나는데 묘하게 생긴 건물이 보였다.

지도를 보니 제주환경자원순환센터란다.

어딜 가나 마찬가지겠지만 혐오시설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제주도 구석구석에 이런 시설이 종종 눈에 띄는데 기억에 남는 곳이 있다.

한라산 중턱에 있는 폐기물 처리시설이다.

모르긴 해도 거기에서 방출된 오염수가 지하수로 파고들어 상수원이 될 텐데 오염에 잘 신경 쓰고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환경단체에 속해 있다면 정말 눈여겨볼 시설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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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도로를 가로질러야 한다.

북촌으로 가는 길이다.

멀리 함덕 서우봉도 보인다.

지도상으로 서우봉을 돌아서 가게 되어있는데 마침 가보고 싶은 코스이기도 했다.

북촌포구는 대물낚시가 가능한 아주 유명한 낚시터다.

해창 때 이곳에 가면 황당한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포구에서 40이 넘는 대물 감성돔이 나온다.

대신 낚시를 멀리 던져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발디딤이 좋은 포구에서의 낚시라 불편하지 않다.

이곳이 낚시로 유명한 이유는 나도 가서 보고야 알았다.

유속이 엄청나게 빠른 곳으로 제주에서도 흔치 않은 포인트인 것 같다.

아마 앞쪽에 있는 작은 무인도인 다려도 때문에 물길이 좁아져서 그러하리라.

큰 물고기가 놀 만한 자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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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포구를 지나 샛길로 들어서니 동명대가 보인다.

제주 곳곳에 이런 문화재가 많다.

북촌 포구 근처에서 올레길 진입로를 찾을 수 없어 몇 바퀴나 뱅뱅 돌았다.

나무로 된 다리 하나를 건너야 하는데 미처 그걸 못 본 것이다.

동명대 뒤로 돌아 나가면 다시 차량이 다니는 도로와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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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일주도로 옆에서 보이는 너븐승이4.3기념관이다.

언젠가 가보리라 생각했지만 1월 1일에는 운영치 않았다.

다음 기회로 미루고 다시 발길을 돌렸다.

한참 언덕을 올라갔나 싶었는데 다시 내리막길이다.

자전거의 매력은 업힐 후 신나는 다운힐이다.

북촌 골목길 사이로 느린 다운힐을 즐기고 나니 다시 바다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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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동네인데 나중에 여기로 이사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조용하고 아담한 동네요.

낚시도 잘 되고. ^^

이제부터 서우봉으로 오르는 긴 업힐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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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옆으로 길게 펼쳐진 오르막길.

초반에는 경사가 그리 세지 않은데 올라가면 갈수록 경사가 급해진다.

산책을 나온 노부부를 제치고 열심히 페달을 밟아 올라가니 기상관측소 같은 것이 보인다.

여기까지는 차로 와본 적이 있는 곳이다.

서우봉을 언제 올라가 보나 했더니 드디어 한번 가보게 되는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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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는 비포장도로다.

경사는 더 급해지더니 등성이에 올라서면서 재미난 임도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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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우봉이 망오름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하지만 눈길은 망오름 정상이라는 단어를 피하고 있었다.

더 올라가면 좋으련만 해가 지기 전에 19코스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변명 아닌 변명으로 핸들을 꺾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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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길을 내려가는데 아뿔싸!

이런 엄청난 광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제주라면 곳곳에 안 가본 곳이 거의 없다고 자부하던 나인데 이런 비경을 모르고 있었다는 걸 알고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자전거를 벤치 뒤에 세우고 앞쪽으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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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는 제대로 담아낼 수 없는 함덕 서우봉의 비경이다.

날씨가 좀 더 좋았다면 좀 더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을.

저 아래 토지는 지인 소유인데 개발이 불가하다고 투덜거렸던 기억이 있는데 절대 개발허가를 내주면 안 되는 땅이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미안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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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더라니 고도를 조금 낮춰도 멋진 광경이 펼쳐졌다.

그래도 하산하기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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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우봉 아래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는 흑염소들이 보였다.

아름다움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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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가 꽤 되는 다운힐을 내려가는데 패러글라이딩을 마치고 내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런데 이해가 잘 안 되는 것이 패러글라이딩 치고는 덩치가 너무 큰데 대체 무얼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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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해안으로 예쁘게 조성된 도로를 타고 함덕을 벗어나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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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을 꼽으라면 바로 델문도 카페의 주인이다.

이제는 허가를 내려고 해도 못 낼 곳인데 가장 금싸라기 같은 곳에 자리 잡은 명소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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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덕을 벗어나 작은 포구 하나를 지나 다시 소롯길로 접어들었다.

밭 사잇길로 잠시 달리자 다시 바다로 이어지는 도로를 만났는데 가두리 낚시터 하나가 보였다.

차를 타고 다니면서 보긴 했던 것 같은데 별 관심이 없어서 그냥 지나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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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으로 바닷가 길이 나 있었다.

신흥리 바닷가에서 서우봉 일출도 찍고 그랬는데 왜 이 곳은 기억에 없는 걸까 싶었는데 처음 가보는 길이다.

환상자전거길을 돌면서도 가급적 바닷가 길로 다녔는데 왜 처음인가 싶었다.

예상외로 예쁜 구석이 있는 길이다.


해가 지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코스는 거의 끝이 나 있었다.

발길을 재촉할 이유는 거의 없지만 빨리 끝장은 보고 싶은 마음에 있는 힘껏 페달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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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 컷 남기고 달려가는데 오늘의 종착지가 근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해안도로를 만난 것이다.

또 미친 듯이 달리는데 이것 참, 또 올레길을 놓치고 만 것이다.

도로 위를 달리는 승용차들과 속도를 맞추며 댄싱을 치다 보니 너무 멀리 가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차들을 전부 보내고 반대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상한 건물이 하나 보였다.

건물이 좀 묘하게 생겼다 싶었는데 잘 보니 등대였다.

주변 돌담과 밭과 멀리 보이는 오름이 멋지게 중첩되어 보였다.

제주의 흔한 아름다움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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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올레길 19코스의 종착지, 제주항일기념관이다.

무려 두 바퀴나 빙빙 돌았지만 스탬프 찍는 곳은 어딘지 찾을 수 없었다.

사진 한 장으로 마무리하고 GARMIN 520 GPS를 오프 했다.


이로서 하루에 올레길 세 코스를 종주했다.

코스 이탈을 방지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아주 짧게 이탈한 구간이 있긴 했다.

코스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걱정됐다.

버스에 실어주지 않으면 어쩌지?

나는 카카오지도를 열어 버스시간을 확인한 후 버스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6시가 되지 않아 퇴근시간까지는 시간이 남아있었다.

버스회사 직원은 기사님의 재량에 달렸다며 본인은 확답을 줄 수 없다고 친절하게 답변해 주었다.

쓸데없는 염려증이 번지기 시작했다.

기사님이 거부하면 어쩌지?

고민하며 버스시간을 확인하니 약 2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었다.

나는 스트라바 정리하는 것은 버스를 기다리며 하기로 하고 정류장으로 향했다.

불과 백여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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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정류장 안에 자전거를 세워 두고 벤치에 앉았는데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졌다.

궁둥이가 따뜻한 거다.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벤치에 열선이 깔려서 온기가 전해지는데 이렇게 기쁠 수가. ^^

나는 차가워진 손을 엉덩이 밑에 깔고 소소한 행복함에 도취되고 있었다.

버스도착시간을 알려주는 안내판에서 10분 남짓 남았던 101번 버스가 사라지고 40여분 더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가 다시 2분 후 도착한다고 나오는 통에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벤치 덕분에 추위쯤은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제주시 관계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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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 19번 코스는 약 17km 정도 된다.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올레길은 여자 혼자 다니면 위험할 것 같다.

하지만 사람이 많이 다니는 올레길은 없을 것 같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라도 잡고 같이 가는 게 낫지 싶다.

그 사람이 더 무서울 수 있다고?

에라, 그럼 나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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