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파스 드래곤,3화-용의 시간

요르문간드는 남극으로

by 루파고

용들의 무덤 속.

세상이 정한 시간의 개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

파파는 한참만에 세 번째 걸음을 옮겼다.

그의 심안에 용들의 역사가 그려지고 있었다.

절벽 바깥에서 죽음을 앞둔 용.

그들의 조상들이 남긴 역사의 무덤으로 향하는 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인간 세상에서는 무덤이겠지만 그들에게만 적용되는 시간의 세상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파파는 용들의 무덤 속에서 그들 역사를 찬찬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용들의 무덤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결코 무덤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푸라고는 폭풍우 속에서 보았던 용들의 역사를 이곳에서 복습할 수 있었다.

어느 역사서에도 없었고,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용들만의 세상.

어쩌면 용들은 그들만의 세상을 꿈꿔왔는지도 모른다.

좁아터진 지구가 아닌 더 큰 세상으로 떠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푸라고, 이제 나가자.]


파파는 네 번째 발걸음을 옮기지 않고 돌아섰다.

푸라고는 용들의 세상에 홀려 더 많은 것을 알기를 원했지만 파파의 뜻을 따랐다.


푸라고는 용들의 역사를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백 미터는 족히 넘을 동굴 속.

적어도 천 마리가 넘는 용들이 영원히 잠들어 있었다.

아니, 다음 세계로 넘어갔다.

다시 돌아올 순 없을까? 푸라고는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용들이 남긴 유물 같은 것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어둡고 침침하며 엄숙하고 지중했다.

전혀 꾸며진 바가 없었고 용들의 표정은 우주처럼 편안해 보였다.

모두 눈을 감고 있었으며 서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남은 공간은 생명을 다한 다음 용의 자리가 될 것이다.

그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용이 있었다.

어딘가에 꼭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붉은용이었다.

인간들은 성경의 요한묵시록에 붉은용을 그려 놓았다.

인간이 문자라는 것을 만들어낸 건 붉은용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도 수천 년이 흐른 뒤였다.

파파는 그의 과제 목록에서 붉은용을 삭제했다.

파파와 푸라고가 해야 할 일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앞으로 닥칠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힘이 부족해졌다는 걸 의미했다.


동굴을 본 후, 파파와 푸라고는 이 세상이 역사와 역사 사이를 오가는 관문처럼 느껴졌다.

시간이라는 개념에 새로이 눈을 뜬 것이다.

이곳에 다시 돌아오게 될 기회가 있을까?

그땐 어떤 용이 영원의 잠에 들어있을지 궁금했다.


"푸아아~"


파파는 깊고도 깊은숨을 내쉬었다.

뭔가 다른 깨우침이 있었던 것이다.

푸라고의 머릿속엔 그저 용들의 역사만 가득했다.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고 전혀 그렇지 않기도 했다.


"이젠 어쩌실 건가요? 저 용들 중 대부분은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녀석들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과업이 무슨 의미가 있긴 한 걸까요?"


푸라고는 기억 속에 빙빙 도는 용들의 역사 때문에 정체성이 혼란스러웠다.


"푸라고, 또 우리 과업에 대해 의심하는 있는 겐가? 나는 말일세,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네. 푸른 불이 일어나던 그날, 나는 결심했어. 다시는 같은 일이 벌어지게 두지 않겠다고 말이야. 그리고 보게나. 이제 우리 둘 외에 누가 또 있는가 말일세."


파파의 말에 푸라고는 먼바다를 내다보며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죠. 우리가 해야죠. 우리 아니면 누가 해내겠습니까? 그런데 파파, 요르 저 녀석은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과연 남극까지 따라올 수 있을까요? 곧 죽을 거라며 여기서 세월을 빈둥거리는 녀석에게 무슨 미래가 있겠습니까? 게다가 같이 떠난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중간에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어휴! 생각만으로도 벌써 끔찍하네요."


"그래, 물어보자고. 요르의 의지에 달린 것 아닌가 싶어. 어쨌거나 남극까지만 가면 되니까 말이야."


"또 그러십니다. 하여튼 말씀은 정말 쉽게 하신다니까요."


푸라고가 투덜거리자 파파는 듣기도 싫다는 듯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푸라고는 푸우, 한숨을 쉬고 파파를 따라 뛰었다.



*



"분명히 그 안에 뭔가 있을 거라니까요."


푸라고는 파파에게 용들의 무덤을 제대로 확인해야 한다며 재차 설득하고 있었다.

파파는 아직 때가 이르다며 푸라고의 주장을 눌렀다.

푸라고는 용의 무덤에서 자신이 봤던 그들의 역사를 제대로 짚어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언젠가 책에서 용들의 시간에 관련된 글을 기억해 냈다.

용의 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면 우주의 시간도 조종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파파 역시 그 책을 알고 있었다.

그의 기억은 푸라고보다 명확히 정리되어 있었다.

용들의 역사서는 푸라고가 태어나기 전에 사라지고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했다.

그가 보았던 용들의 역사는 호기심을 누를 수 없게 했다.


"푸라고, 내가 하나 알려주겠네. 용의 무덤은 이제 그곳에 있지 않아. 용의 시간은 용의 공간과 같아. 우리가 그곳에 갈 수 있었던 건 요르 덕분이었을 거야. 녀석은 자신의 남은 생명을 포기하려다 우리를 돕기로 마음을 돌렸어. 마침내 용의 무덤으로 가는 길이 열리려던 순간이었다고 하더군. 우리가 나타나서 방해를 한 거지. 요르는 꺼져가는 생명에 다시 불을 지폈다네. 녀석에게 그런 의지가 없었다면 어떻게 그 넓은 바다를 건넜겠어."


푸라고는 파파의 설명을 이해했다.

용들의 무덤 속에 그들이 찾고자 했던 것들이 존재하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요르문간드가 벌떡 일어나 바다로 뛰어들었다.

곧 죽을 것처럼 피곤해 보이던 요르문간드가 돌변한 것이다.


요르문간드는 파파와 푸라고를 등에 태우고 바다를 헤엄쳤다.

바다의 모든 생명체가 자취를 감추었다.

바다에서만큼은 요르문간드 이상의 함을 가진 존재는 없다.

시 서펜트를 잡아 가두기 전까지는 그랬다.

요르문간드와 시 서펜트는 서로의 영역을 존중했다.

그들의 영역에는 언제나 먹을 것이 풍부했다.

하늘이나 대지보다 자유로웠다.

어떤 적의 공격에 있어서도 안전했다.

파파는 시 서펜트보다 요르문간드를 훨씬 높게 평가했다.

삶은 경험이라 했던가?

푸라고는 토르가 요르문간드를 성장시켜 놓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요르문간드는 남극까지 쉬지 않고 헤엄쳤다.

요르문간드의 몸이 너무 길어 세상을 한 바퀴를 돌아 자기 꼬리를 물 수 있을 정도라는 소문이 있었다.

푸라고는 그런 전설이 돌았던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요르문간드는 세계 뱀이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남극까지 거의 하루 정도 남겼을 무렵 파파가 다음 목표를 발견했다.

구름을 따라 몸을 숨기며 흘러가던 와이번의 그림자를 목격한 것이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게 있었다.

분명 와이번스는 잉글랜드나 유럽에 있어야 했다.

영역을 벗어나지 않던 녀석이 그 먼 남아메리카 대륙 끝까지 날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이제 절반 정도 남은 건가?'

푸라고는 파파의 혼잣말을 들었다.


'절반 같은 소리 하시네요. 계획에도 없던 녀석이나 발굴하지 마시지요. 제발.'


푸라고가 푸념을 늘어놓았다.

파파는 알려지지 않은 기록을 틈만 나면 모으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유럽에는 용 사냥꾼을 자처하는 인간들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창과 칼로 용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무모한 용기를 탑재하고 있었다.

용을 잡겠다는 허무맹랑한 자들을 기사라 칭하며 높은 대우를 해주는 듯했다.

푸라고는 그들을 비웃었지만 파파는 인간에게 그런 용기마저 없었다면 지구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거라고 했다.


남극까지 삼 일도 걸리지 않았다.

요르문간드는 삼일 밤낮을 쉬지 않고 헤엄쳤다.

그는 파파가 알려준 빙하 사이 긴 크레바스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다.

한동안 그곳에서 파파를 기다리면 긴 잠을 잘 것이다.


몇 년 전에 남극에 끌어다 놓았던 범선은 빙판 위에 기울어진 채로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지만 얼음이 너무 두껍게 얼어서 깨질 것 같지도 않았다.

범선을 빼낸다 해도 문제였다.

바다에는 대형 유빙이 떠다니고 있어서 항해를 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했다.

유난히 추운 겨울인 모양이었다.

파파는 푸라고에게 육지로 돌아갈 아이디어를 요구했다.

푸라고는 그저 한숨만 나왔다.

온통 눈과 얼음만 가득한 곳에서 새로운 탈 것을 만들라니.


"유빙 타고 나가시게요?"


푸라고가 툴툴거렸다.


며칠 후 푸라고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지하 깊은 얼음동굴 속으로 들어갔던 푸라고는 한참 만에 용의 이빨 두 개를 꺼내왔다.

푸라고의 몸은 시뻘겋게 달궈진 상태였다.

바닥에 용의 이빨을 던져두자 눈과 얼음이 녹으며 흙이 드러났다.

불과 일 초도 걸리지 않았다.

푸라고는 씩 웃으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 얼음동굴로 들어가더니 몇 번을 들락날락했다.

흙 위에는 용의 분신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이거면 못 만들 게 없겠네."


푸라고는 용의 분신들을 조합하며 뭔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푸라고의 작업이 끝나기까지 어디서도 파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시 서펜트_<나무위키에서>

바다를 뜻하는 'sea'와 뱀을 뜻하는 'serpent'의 합성어다. 거대한 바다뱀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수많은 바다괴물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괴물. 시 드래곤이라고도 하며 수룡에 속한 용이라 볼 수 있다. 오리엔트 지방과 유럽의 용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 중 하나로 사실 대개 거슬러 올라가면 신적 존재인 점도 그렇고 동양용과 포악성 빈도 정도를 빼면 큰 차이는 없다. 레비아탄과 스킬라, 케투스, 요르문간드 때에 따라서 티아마트 등이 시 서펜트 해당하는 존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큰바다뱀이라고 번역한다. 실존하는 동물의 이름 탓에 격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는지 매직 더 개더링 한글판에서는 이무기라고 번역한다.

그리스인 지리학자 스트라보(Strabo)는 동부 지중해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커다란 바다뱀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했다.

"30미터 길이의 커다란 용의 시체를 많은 사람들이 보았다. 용의 턱은 말을 탄 남자 한 명을 통째로 삼킬 만큼 컸으며, 용의 시체의 처음과 끝에 선 기마병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할 정도로 덩치가 컸다."


와이번_<나무위키에서>

본래 프랑스 설화에 나오는 날개 달린 뱀 비브르가 영국에 넘어가 변형된 것으로, 이름도 프랑스어의 'Vouivre'가 'Wivere', 'Wivre' 등 영어로 발음하기 쉽도록 변화시켜 가던 끝에 'Wyvern'으로 굳어진 것이다. 주로 영국의 문장에서 자주 보이며, 와이번 문장은 '강한 적의'를 의미하기 때문에 전쟁 혹은 군대를 과시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많이 사용되었다.

과거에 묘사되는 와이번의 모습은 한쌍의 날개와 끝이 화살촉 혹은 다이아몬드 형상을 한 긴 꼬리, 독이 있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 이후에 묘사된 와이번도 이러한 특징으로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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