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파파!"
뒤쪽에서 부르는 소리에 앞서 가던 남자아이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체구가 작은 아이다.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에 윤기가 흐른다.
하얀 피부는 단정하다 못해 여자아이라 해도 믿을 것 같다.
동그란 눈에 맑은 눈동자는 깊다 못해 빠져들 지경이다.
앞뒤짱구의 머리가 깨나 총명해 보인다.
바람에 날린 머리칼 사이로 이마의 깊은 흉터 같은 것이 드러났다.
나이는 기껏 해야 열 살 정도로 보이지만 기풍이 예사롭지 않다.
'으이구~ 또 시작이네.'
아이는 득달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뒤따라오던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는 걸 느낀 것이다.
하지만 발자국 소리는 멀어질 것 같지 않았다.
누렇게 익은 벼가 늘어진 논 사이로 두 아이가 앞 서거니 뒤 서거니 뛰었다.
얼마 되지 않아 뒤를 쫓던 따르던 아이가 남자아이를 따라잡았다.
숨이 차서 헉헉거리는 남자아이와는 달리 뒤따라 온 아이는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왜! 내가 그렇게 싫어?"
아이가 소리쳤다.
여자아이였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에는 검은색 실핀이 흘러내려 양쪽에 간신히 걸려 있었다.
여자아이는 머리에서 실핀을 뜯어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바가지 모양의 헤어스타일이었다.
남자아이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또 그런다. 넌 나를 너무 몰라. 내가 얼마나 예쁜지 알아? 넌 왜 내 사랑을 안 받아주는 거야? 나한테 고백하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여자아이가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눈도 작고, 코도 작고, 입도 작은 얼굴이다.
얼굴도 조막 만한데 비율이 맞지 않게 키는 껑충하게 컸다.
남자아이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였다.
"너 못 생겼어. 착각하지 마."
남자아이는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여자아이 어깨를 두드렸다.
"왕파파, 내가 너 모르게 얼마나 챙겨줬는지 알아, 몰라? 내가 아니었으면 엄청 얻어터지고 다녔을 거야. "
여자 아이는 남자아이에게 뭔가 확인을 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건 인정해. 하지만 그건 내가 약해서 그런 게 아니고 내가 싸우는 걸 싫어해서 그런 거야. 착각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알았어. 그나저나 오늘은 그 책에서 뭘 찾아냈어?"
"글쎄, 그건 날 잡으면 알려줄게."
남자아이가 또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여자아이에게 추월을 당하고 말았다.
이젠 상황이 바뀌어 남자아이가 여자아이 뒤를 따라 달렸다.
*
책상 앞에 두 아이가 의자를 나란히 놓고 앉았다.
조명 아래에는 두꺼운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아이들 팔뚝의 두 배 정도 되어 보였다.
얇은 재질의 종이로 된 책은 오천 페이지는 족히 넘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영어도 한글도 아닌 문자가 적혀 있었다.
남자아이 외엔 그 누구도 읽을 수 없다.
게다가 그 책의 존재를 아는 건 오직 두 아이와 남자아이의 엄마뿐이다.
남자아이는 어느 날 기묘한 꿈을 꾼 후 갑자기 그 문자를 이해했다.
그날 이후 책에 쓰인 문자가 전 세계 어떤 문자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왕파파. 이번에 알게 된 게 뭔지 빨리 알려줘. 책에 대체 뭐라고 쓰여 있었던 거야?"
여자아이가 보채자 남자아이는 책갈피를 꽂아 둔 페이지를 열었다.
책의 중간쯤 되는 페이지였다.
그 안에는 세 개의 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림이라고 하기엔 너무 세밀하게 그려져 있어 사진이나 다름없었다.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용의 그림이다.
그림이라고 하기엔 사진보다 선명하지만 사실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판타지 영화 속에서나 존재할 수 있는 배경이었다.
여자아이는 언제나처럼 삽화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남자아이의 설명이 없으면 단 한 줄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용들이 사람들을 죽이고 뜯어먹었어. 어떻게 해."
"이 용 두 마리는 왜 싸우고 있는 거지? 비슷하게 생겼는데."
"저 사람은 용을 타고 어딜 가는 걸까?"
여자아이는 삽화 세 개를 번갈아 보며 질문을 던졌다.
벌써 오 년 넘게 거의 매일처럼 반복된 일이었다.
그렇게 읽은 책이지만 이제 겨우 절반에 이르렀다.
책은 두껍기만 했지 후반부의 대부분은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