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 년 넘게 용의 흔적들이 종적을 감췄다.
마치 증발한 것처럼 말이다.
아시아 대륙 끝에 산다는 이무기를 찾는 건 사실상 포기했다.
영토가 좁아서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인간들의 문헌에서도 오백 년 정도의 공백이 있었다.
용들의 무덤에도 이무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분명히 어딘가엔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날 용들의 무덤에서의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죽지는 않았을 거다.
대체 어디에 숨은 걸까?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긴 잠에 든 걸까?
파파는 이무기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했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이무기에게 어떤 힘이 있기에 중요한 존재라고 했을까?
아무튼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전부 해본 것 같다.
파파라면 어떻게 했을까?
마침 한국 문헌에서 용들의 흔적을 발견했다.
왕국의 책에서도 본 적이 없었던 녀석이다.
지금의 인간들은 용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당대의 과학적이 현재 수준 있었다면 인간들은 용들의 흔적을 파고들었을 것이다.
한국 문헌에 소개된 용들 중 허구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용들이 있었다.
사해용왕이라고 불리는 녀석들이다.
오랜 기간을 두고 인간들의 문헌을 연구한 끝에 이무기의 자리를 대체할 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전당군이다.
하지만 모습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전당군은 중국의 소설인 류의전(柳毅傳)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인간들이 뭐라고 부르던 상관없지만 압도적인 크기로 보아 좁은 영토에서 살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전당군은 중국을 선택한 것 같다.
언제부터 중국에 자리를 잡았는지는 알 수 없다.
재밌는 건 한때 인간들과 교류도 있었다는 것이다.
흔치 않은 일이다.
전당군은 중국에서 신 대접을 받았다.
심지어 인간들의 전쟁에도 관여했다.
성격이 괴팍하고 포악한 녀석이라고 알려져 있다.
화가 나서 인간들을 몰살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인간들이야 그렇다 치고, 다른 용들까지 물어 죽이곤 했다.
영국에서 봤던 크립티드 생각이 났다.
지구가 용들이 살기엔 작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동족까지 죽여가며 영토 분쟁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세월이 이렇게 지나고 보니 용이나 인간이나 거기서 거기다.
어쨌든 그거야 확인해 볼 필요는 있지만 어쩌면 전당군은 이무기보다 다루기 힘들 것 같다.
그래도 어쩌겠나. 찾을 수만 있다면 이무기가 됐든 전당군이 됐든 상관없다.
대화가 통화지 않거나 내 힘으로 대적할 수 없다면...
아, 더 이상은 상상하지 말아야지.
한국을 떠나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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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 두었던 응용의 왼쪽 날개 사라져 두 달 만에 찾아냈다.
아무리 인간들이 해괴한 것들을 수집하는 것을 좋아한다지만...
날개를 어떻게 떼어갔는지 인간들 표현대로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인간의 눈에 응용의 날개가 생명체의 것이라고 보였을 리는 없다.
대체 그걸 어떤 목적으로 가져갔는지 알 수도 없지만 어떻게 가져갔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인간들의 기술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이제는 스마트폰 하나로 어디서든 생각을 전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을 들고도 사용할 수 없는 나의 이 답답함을 누가 알까?
<사적인 내용 삭제>
아무튼, 응용의 한쪽 날개는 대기업 회장의 비밀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보안체계를 뚫고 들어가서 날개를 회수하기까지 쉽지 않았다.
인간들이 보는 첩보영화 한 편이라고 해야 할까?
인간의 기술에 마법이 통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인간의 눈을 속이는 건 간단한 마법이지만 매우 유용했다.
앞으로 인간 기술에 대적하기 위해서는 난도 높은 마법만 사용해야 한다.
들어갈 때도 문제였지만 나오는 게 더 어려웠다.
날개를 들고나가려면 보안 장치를 부수고 나오는 방법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오랜만에 페론의 능력을 사용해야 했다.
인간들을 상대로 파괴적인 힘을 사용면 결국 나를 노출시킬 수밖에 없다.
고민스러웠다.
파파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중국에서 전당군을 찾아다닌 지도 벌써 십이 년이 넘었다.
인간들처럼 기억이란 게 흐릿해지거나 하면 좋을 텐데.
요즘 들어 인간들의 뇌구조가 부럽다.
어떻게 지난 세월의 기억들을 망각할 수 있는 걸까?
나는 이렇듯 선명하기만 한데.
삼천 년 전 일도 방금 일어난 일처럼 기억하는 건 무조건 좋은 일이 아닌 거다.
나처럼 혼자 남은 존재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거다.
기억은 계속 쌓여만 가는데 어떤 식으로든 인연이 됐던 인간들은 세상 속에서 지워져 간다.
<사적인 내용 삭제>
전당군을 찾기 위해 중국에 안 가본 곳은 없다.
대체 그 많은 용들이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궁금했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인간들의 고대 문서 쪼가리를 찾았다.
중국인들이 비밀로 묶어 두었다는 피라미드 안에서 말이다.
용들에 대해 그렇게까지 상세하게 기록된 문헌을 본 적이 없었다.
피라미드는 누가 만들었을까?
과연 인간들의 흔적일까?
피라미드 구석구석까지 다 뒤졌을 인간들이 어떻게 그걸 놓쳤는지는 몰라도 내게는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게 행운인지 불행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전당군이 용들을 물어 죽였다는 전설은 실재했던 사건이다.
녀석은 인간들의 신이 되겠다며 중국 각 지역을 찾아다니며 용들에게 싸움을 걸었다고 한다.
여기서 흥미 있는 걸 찾을 수 있었다.
전당군이 이무기에게 싸움을 걸었다는 기록이다.
문헌 상으로는 고조선이라 부르는 옛 조선인 것 같다.
싸움은 몇 달에 걸쳐 이어졌다.
흑비가 내리기도 했고 파란 비가 내리기도 했다.
엉켜 싸우느라 산에 떨어져 화산이 터졌다는 기록도 있었다.
아마 백두산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백두산 화산을 기록한 문헌에도 흑비가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들이 싸우는 동안 내린 비로 인해 대홍수가 났다.
그 영향으로 지형도 바뀌었다.
전당군과 이무기는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싸움을 마쳤다.
그 후로 전당군은 한반도를 탐내지 않았다.
이무기가 죽었다는 기록은 역시 없었다.
중국의 수많은 용들이 전당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문헌 상 기록일 뿐이지만 중국의 용들 중 살아남은 건 오로지 전당군뿐이다.
사실상 녀석이 중국을 지배했다고 볼 수 있다.
이상한 건 전당군은 다른 용들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기도 전에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역시 죽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봤지만 용들의 무덤 안에서 본 기억은 없다.
용들의 무덤을 본 게 벌써 천 칠백 년이 넘었다.
전당군이 사라진 시점과 오백 년 이상의 기간이 있으니 그 사이에 죽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쩌면 전당군과 이무기의 싸움이 한 번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인간의 기록에 따르면 946년 10월에서 12월 사이에 백두산에 역사적으로 가장 큰 분화가 있었다.
가설일 뿐이지만 시점 상으로는 딱 맞아떨어진다.
희망이 사라지자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종잡을 수가 없다.
나도 이제 늙은 것 같다.
그때 파파의 심정이 이랬을까?
파파 곁에는 나라도 있었는데...
몽골 지역으로 향하던 중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인간의 흔적이 없는 절벽 아래 동굴을 찾아 들어가 며칠 밤낮을 끙끙 앓았다.
아파본 적이 있었던가?
파란 불이 일어나던 날의 기억이 살아나 송곳처럼 푹푹 찔렀다.
몸이 아픈 건지 마음이 아픈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눈을 뜨니 밤이었다.
앓으며 꿨던 꿈들을 더듬었다.
어릴 때 보았던 책들을 뒤적이는 모습이 떠올랐다.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난 아버지의 마법책을 후루룩 넘기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었다.
후루룩 넘어가던 책의 내용이 다 보이는 것이다.
아주 천천히 혹은 빠르게 볼 수 있었다.
마치 인간들이 개발한 동영상 재생기처럼 말이다.
내게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가 뭘까?
아픈 후에 몸에 변화가 생긴 걸까?
마법서 한 권을 모두 익혔다.
진작에 볼 수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어렵게 돌아다닐 필요가 없었을 것을.
갑자기 파파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멀리 해가 뜨는 모습이 보였다.
운명의 장난인가?
내가 잠들었던 동굴은 용의 입 속이었다.
용은 돌이 되어 있었다.
그 위로 흙이 쌓이고 먼지가 쌓였다.
누가 어디서 가져다 쌓았는지 알 수 없는 엄청난 양의 돌이 그 위에 또 쌓였다.
용의 입에서 나와 살펴보니 전당군이라는 걸 확신했다.
전당군을 찾겠다고 중국을 쑤시고 다녔던 시간이 아까웠다.
진녕현 영장주에 용이 태골 하던 곳이라는 문헌이 있었다.
직접 찾아가 본 후 설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실제 용이 태골 하는 곳에 대한 기록을 더는 찾을 수 없어서 포기했던 것이다.
주취안에서 돌이 되어버린 전당군을 찾다니...
대체 어떤 힘이 나를 이 동굴로 끌고 온 것일까?
중국의 문헌에 보면 용을 키우는 부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권룡이라는 성씨를 가진 중국인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룡이라는 성씨를 가진 부족이 그 후임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기록이 맞다면 전당군은 잠들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전당군이 한번 잠들면 천 년에서 수천 년간 잠을 잔다고 하니...
기록에는 없었지만 권룡이나 어룡의 인간들이 잠이 든 전당군 위에 돌을 쌓아 녀석을 보호하려 했던 것이 분명하다.
언제 깨어날지 알 수 없는 잠이 들었다면 당분간은 쓸모없는 전당군.
하지만 내게 마법서를 선물한 거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