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미는 고민할 것도 없이 옥스퍼드에 지원서를 넣었다.
왕파파가 옥스퍼드에 지원하며 제출한 논문은 김혜미와 공동저자였다.
지원 서류 등도 왕파파의 것을 토대로 해서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따로 있었다.
가족들, 특히 아빠를 설득하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김혜미의 고집을 꺾는 걸 포기했다.
기어 다닐 때부터 함께 했던 두 사람은 친형제 이상이었다.
하지만 김혜미의 부모는 그들 관계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왕파파 아빠의 존재가 항상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외출이 잦았던 그는 몇 달씩 들어오지 않는 일이 많았다.
게다가 왕파파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더군다나 누구도 그의 직업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딱히 하는 일이 없음에도 먹고사는 걱정 없이 사는 게 의심스러웠다.
반면, 왕파파의 엄마는 말수도 없고 조용했다.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누구도 그녀의 속을 알지 못했다.
정체도, 신분도, 출신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다행인 건 성격이 모나지 않아서 딱히 부딪치는 일이 없었던 게 의심을 가중시켰다.
오히려 바른 됨됨이가 그들을 신뢰하지 못하게 했다.
왕파파는 흠잡을 곳 없이 바르게 자랐다.
김혜미의 부모는 그래서 항상 불안했다.
부모들은 김혜미가 서울대에 합격한 날에 돼서야 왕파파에 대한 왠지 모를 불안함을 지울 수 있었다.
물론 딸의 학업에 왕파파의 영향이 컸다는 것은 인정했다.
옥스퍼드로 가겠다는 선언에 거의 기절할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휴학계는 이미 제출한 상황이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보다 더욱 황당한 건 왕파파와 함께 떠나겠다는 말 때문이었다.
며칠 동안 마을이 시끄러울 정도로 심한 고성이 오갔다.
결국 김혜미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결론 났다.
그들의 딸이 왕파파의 여자가 될 거라는 불안함을 떨쳐내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될 거라는 걸 의심해 본 적은 없었다.
옥스퍼드에서는 아직 답신이 없었다.
왕파파와 김혜미는 영국으로 떠날 날만 기다렸다.
시골 마을이라 봄이 코 앞인데 겨울 기운이 더 강했다.
두 사람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다시 살폈다.
아무리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았다.
기존의 글과 달리 새로 생긴 페이지는 내용이 변했다.
마치 누군가 글을 썼다가 지우거나 수정하는 것만 같았다.
어떠한 펜으로도 자국 하나 남기지 못하는 그 페이지가 누군가에 의해 기록되는 중이다.
"혹시 이 방에 귀신이 있는 건 아닐까? 우리 눈에는 안 보이는 귀신같은 존재. 어쩌면 이 책은 귀신들이 써낸 책인지도 몰라."
김혜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머리칼에서 상큼한 사과향이 퍼졌다.
"사과향이네..."
왕파파가 혼잣말했다.
"좀 바꿔봤어. 어때? 좋지?"
"글쎄, 난 그냥 원래 니 냄새가 좋았는데."
김혜미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난 꾸미지 않은 네가 더 좋다는 말이었어. 넌 그냥 그대로가 더 예쁘거든."
김혜미는 마음을 들킬까 싶어 대꾸하지 않았지만 표정엔 그대로 다 드러나 있었다.
"이 사람이 정말 아저씨라면 우리가 믿고 있었던 진실 혹은 사실이 거짓이라고 생각해야 돼. 진짜라고 알고 있던 사실이 원래는 가짜였고, 가짜 같은 게 진짜인 거지. 아저씨는 아마 사천 살 정도 되신 건가 싶어.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웃기잖아. 안 믿을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고, 정말 환장할 노릇이네."
김혜미는 수시로 감탄사를 흘려냈다.
"난 사실이라고 생각해. 아빠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그런데 말이야,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말고 들어 봐. 알았지?"
김혜미의 말에 왕파파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줌마는 너를 스물다섯 살에 낳으셨잖아. 대체 아저씨는 몇 살에 아줌마랑 결혼하신 거지? 너 혹시 아빠의 옛날이야기 같은 거 들은 거 없어? 엄마에게서도 말이야."
"정말 이상하긴 해. 아빠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아. 그냥 우리 아빠였고, 좋은 분이었고, 잘 놀아주셨고, 갑자기 떠나신 것 외에는 말이야. 엄마도 아빠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으셨어. 왜 그러셨는지 말씀은 안 하셨지만 아빠를 떠올리면 괴로워서 그러셨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아빠 이야기를 가급적 꺼내지 않았거든. 넌 아직도 푸라고가 우리 아빠라는 걸 믿지 않겠지만 난 확신이 있어. 그리고 아빠는 살아계셔. 아빠는 어디선가 이 글을 쓰고 계신 거야. 분명해."
"그래, 네 말이 맞을 것 같기는 해. 계속 바뀌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는 영국보다 남극으로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이게 전부 사실이라면 남극 어딘가 용들이 있을 거 아니냐고."
김혜미는 아직도 책의 내용을 반신반의했다.
왕파파와 함께 용을 주제로 논문까지 썼지만 현실과 비현실적인 내용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푸라고가 왕파파의 아빠라는 것도 억지 같았다.
하지만 마법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책을 두고 본다면 모든 게 사실이라는 말에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김혜미는 긴 한숨을 쉬었다.
왕파파 역시 김혜미와 비슷한 논리적 문제로 고민해 왔다.
그래서 더욱 푸라고가 아빠일 거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궁금한 게 생겼어."
"뭔데?"
왕파파는 책 속에 집중한 채 물었다.
최근에 바뀐 내용을 다시 살피는 중이었다.
"왜 하필 영국이야? 우리 조사에 따르면 유럽 본토로 가는 게 맞지 않아?"
"물론 용에 대한 유적이나 전설을 찾아가려면 유럽 본토가 맞겠지. 하지만 문헌이나 기록은 영국에 제일 많잖아. 난 거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지금까지 우리가 찾아왔던 것들은 기껏해야 인터넷이나 소설에서 본 게 전부였잖아. 영국에 가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자료들이 엄청나게 많을 거야."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그 많은 책을 언제 다 읽어 보려고? 너무 무모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무모?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앉아서 아빠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려야겠지. 네 맘이 변했다면 나 혼자 가도 돼. 난 아빠를 찾는다거나, 책의 내용을 밝히려 한다거나 하는 목적만은 아냐. 이건 내가 꿈꿔왔던 학술적인 연구가 될 거라고 생각해. 고고학에서도 다루지 않았던 용에 대한 것들 말이야."
왕파파가 책에서 시선을 떼고 김혜미를 보았다.
"고고학에 용이 있긴 해?"
김혜미 웃었다.
"알 수 없지. 언제는 공룡이 있다고 믿었겠어? 나는 용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
갑자기 김혜미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기 봐!"
왕파파는 김혜미의 손가락을 좇았다.
종이에서 빛을 발하며 새로운 글자가 쓰이고 있었다.
아주 빠르게 기록되다가 잠시 멈추기도 했으며 썼다가 다시 지워지기도 했다.
종이 위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왕파파는 김혜미의 손을 잡았다.
김혜미는 따스한 왕파파의 손에서 땀이 스며 나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왕파파는 새로 쓰인 글을 소리 내어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