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파스 드래곤, 10화-같이 갈래? 영국!

by 루파고

왕파파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휴학계를 냈다.

대학에 가게 된 것도, 꼭 남들 하는 것처럼만 살아달라는 엄마의 유언 때문이었다.

검정고시를 볼 생각이었던 거다.

담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파파는 고고학을 고집했다.

세상에 공부처럼 쉬운 건 없다던 왕파파는 당연하다는 듯이 서울대에 합격했다.

군수는 시골에서 천재가 났다며 온 동네에 현수막을 걸었다.

하지만 그는 입학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휴학을 결정한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던 학문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던 거다.

이 세상엔 그가 바라던 학문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파파는 꿈을 버릴 수 없었다.

용의 존재를 밝혀내고 싶었다.


"야! 왕파파!"


뒤쪽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목소리.


'또 냄새 맡은 건 아니겠지?'


왕파파는 걸음 속도를 높였다.

중학교에 진학한 후로는 김혜미가 그를 추월할 수 없었다.

그 후로는 그들의 추격전이 멈추고 말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김혜미가 왕파파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의 대화는 그렇게 시작됐다.


"이젠 대학생인데 성인답게 살면 되겠니? 안 되겠니?"


김혜미가 왕파파의 두 볼을 쭉 잡아 늘렸다.


"이젠 대학생인데 너도 나한테 이러면 되겠니? 안 되겠니?"


왕파파가 김혜미의 두 손을 떼어내며 목소리를 흉내 냈다.


"너 휴학했다며?"


"어떻게 알았어? 누가 그래? 정말 귀신이 따로 없구나. 그래서? 너도 휴학하려고?"


왕파파가 김혜미를 살짝 밀치고 걸음을 옮겼다.


"나도 너처럼 당당하고 싶어. 하지만 그랬다간 아빠한테 맞아 죽는 수가 있지. 우리 아빠 성격 알잖아."


잠시 고민하는 듯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휴학이야? 군대 가려고요? 외로워서 그래? 내가 있잖아. 내가 놀아주면 되잖아.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죽기 살기로 공부한 줄은 알기나 해?"


김혜미는 따다다 입을 쉬지 않았다.


"하긴, 니 머리로 공부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냐?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서울대 합격한 거 자체가 미스터리야. 미스터리."


"좋아 죽네. 짜식! 내가 대학까지 따라갈 수 있을 줄은 몰랐지?"


"턱걸이해서 가는 농대?"


"어쭈? 아직 잘 모르나 본데, 농업을 무시하면 안 돼. 세계는 농업의 신혁명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인공지능이 농업을 관리하는 시대야. 왜 그러셔?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뭔 줄 알기나 해?"


"글쎄, 나?"


"웃기시네. 난 시골에서 태어나서 자란 게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럽고 행복해. 인류의 식량을 걱정하는 엄마 같은 마음. 얼마나 멋지냐? 너도 언젠가는 내가 개발한 슈퍼푸드를 먹게 될 거고. 그럼 맨날 내 생각날 거고."


김혜미의 속사포 같은 입놀림에 왕파파는 피식 웃고 말았다.

김혜미가 스스럼없이 왕파파의 팔에 손을 끼어 넣었다.


"이제는 이러지 말자. 동네에서 말 나와. 너네 아버지 보시면 기절하신다."


왕파파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미친! 우리가 이러고 다닌 게 뭐 하루 이틀이냐? 동네에서 못 본 사람은 일도 없을 거다. 뭐라 하라면 하라지. 어쨌든 난 너하고 결혼할 거니까."


"적당히 좀 하시지. 나하고 평생을 붙어 다녔으면서도 지겹지도 않냐? 어휴! 난 너 얼굴만 보면 달달 외운 교과서 같아서 흥미도 안 간다고."


"원래 익숙한 게 제일 좋은 거라잖아. 그나저나 휴학은 왜 한 거야? 진짜 설마 나 버리고 군대 가려는 건 아니지?"


김혜미가 왕파파의 옆구리를 푹푹 찔러댔다.


"군대는 아니고, 음~ 뭐 비슷한 거라고 할 수도 있지."


"군대랑 비슷한 거?"


김혜미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동그란 뿔테 안경이 콧등 위로 솟는 듯했다.

185센티의 왕파파는 10센티 이상 작은 김혜미를 내려다보았다.

투명한 립스틱을 바른 김혜미의 입술이 반짝반짝 빛을 냈다.


"너 드디어 여자가 되기로 했구나? 안 하던 짓 하면 너네 집 개가 놀란다."


"미친, 우리 집에 개가 어딨냐?"


"아무튼, 아무튼, 예쁘다고."


기분이 좋은 김혜미가 작정하고 왕파파의 팔에 매달렸다.

언제나 같은 행동이었지만 왕파파는 이번만큼은 기분이 묘했다.


"빨리 알려줘. 진짜 하려는 게 뭐야? 정말 용을 찾으러 떠나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왕파파가 걸음을 멈췄다.

김혜미는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나 영국 가려고.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선 안 될 것 같아. 너무 미개해. 용에 대한 자료라고는 그냥 벽화나 신화뿐이야. 옥스퍼드에는 지원서 넣어놨어. 우리가 쓴 논문으로."


왕파파의 말에는 진중함이 배어 있었다.


"너도 알고 있듯이 그 책은 절대로 사람이 만든 게 아니야. 그렇다면 용에 관한 전설은 실화일 가능성이 높아. 그리고 사실 너에게 숨기고 있었던 게 있어."


"뭐? 우리 사이에 비밀 같은 게 있을 수 있었어?"


김혜미가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왕파파는 김혜미의 두 어깨에 살며시 두 손을 올렸다.


"개미야, 잘 들어. 너에게 비밀로 하려던 건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말아 줘. 서울대 합격 소식을 들었던 그날이었어. 우리 헤어지고 나서 집에 갔는데 내 방에 불이 켜져 있더라고. 난 아빠가 돌아오신 줄 알고 뛰어 들어갔어. 방문 사이로 빛이 새어 나왔어. 하지만 아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어. 빛의 원천은 전등이 아니었어. 그게 뭐였는지 알면 내가 왜 결심하게 됐는지 알게 될 거야."


"뭔데 그래, 호기심 자극하지 말고 빨리 말해봐."


김혜미의 눈동자에 빛이 났다.


"우리 책에서 빛이 나고 있었어. 얼마나 강렬한지... 신기했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말이야. 그 빛은 따뜻하면서도 가벼웠어. 빛에서 무게와 깊이 같은 게 느껴졌었어. 왠지 기억에 없던 건데 알 것도 같은 편안함 같은 것도 있었어. 시간이 흐르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공중에 떠 있는 기분도 들더라고. 얼마나 그렇게 있었는지 몰라. 빛이 사그라들면서 잠에서 번뜩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어. 마치 책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온 것만 같았어. 기억 속에 있던 책의 내용들이 선명해졌다면 이해가 될까? 그러더니 빛이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줄어들었어. 빛이 사라지기 전에 책을 집어 들었어. 그런데 묘하게도 빛을 내는 페이지가 있더라고. 그 페이지를 펼쳤는데 전혀 본 적 없던 내용이 있었어. 우리가 봤던 마지막 페이지 다음에 새로운 기록이 생긴 거야."


왕파파는 말을 멈추고 김혜미의 표정을 살폈다.

이미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빨리!"


김혜미가 재촉했다.


"아빠는 살아있었어."


"정말? 그걸 어떻게 알아? 그리고 그 책하고 너네 아빠가 무슨 상관인데. 그 빛은..."


김혜미는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왠지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싹트고 있었다.


"아빠의 이야기였어. 몇 페이지부터 아빠의 이야기였는지 알 수 없지만 말이야. 내 느낌에는 푸라고라는 사람이 아빠 같아."


"그건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잖아. 판타지 소설 속에난 나올 만한 이야긴데 그걸 어떻게 믿어? 그럼 우리는 판타지 소설 속에 있는 거야? 믿고 싶지만 믿어지지 않아. 믿을 수도 없고."


"그럼 그 책을 어떻게 설명할 건데? 너도 이제는 그 문자를 읽을 수 있잖아. 알다시피 세계 어디에도 그런 언어나 문자는 존재하지 않아. 그걸 현실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어? 언젠가 책에 콜라를 쏟은 거 기억하지?"


왕파파의 질문에 김혜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젖지도 않고, 뭐가 묻지도 않고, 찢어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종이에 뭘 쓸 수도 없어. 때도 안 타고, 표지도 이상하고. 아무튼 이상한 책이긴 하지."


"말 잘했다. 바로 그거야. 그날 표지가 움직였어. 내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보석의 위치도 바뀐 게 분명해."


김혜미는 이 만화 같은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나머지 페이지에는 어떻게 쓰여 있었는데? 안 되겠다. 집에 가서 내가 직접 확인해야겠다. 빨리 가자."


김혜미가 왕파파의 팔을 끌고 가려고 했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김혜미가 왕파파의 표정을 살폈다.


"왜 그래?"


"그건 안 보는 게 낫겠어."


"왜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이건 내가 풀어야 할 일이라는 걸 알게 됐어. 아빠는 내가 파파의 과업을 이어가라는 의미에서 같은 이름을 지어주신 것 같아. 넌 책 내용을 믿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게 진실이라고 생각해. 지금 지구인의 과학으로는 절대 풀 수도 없고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난 그 책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 세상을 믿어."


"진짜 결정했구나?"


왕파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없잖아. 아빠는 돌아오지 않고, 엄마와의 약속은 지켰어. 난 이젠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될 것 같아."


"그럼 나는? 나는 뭔데? 그런 걸 어떻게 나하고는 상의도 없이 결정할 수 있어?"


김혜미의 눈동자가 금세 발갛게 물들더니 이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개미야, 같이 갈래?"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파파스 드래곤, 9화-용의 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