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파스 드래곤, 25화-나미비아의 서리무

by 루파고

오전에는 그런대로 걸을 만했지만 정오가 가까워지면서 정수리로 쏟아지는 열기와 바닥에서 차고 오르는 열기가 힘들게 했다. 생수는 이제한 통밖에 남지 않았다. 아껴 마신다고 신경을 썼지만 물통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왕파파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서 목구멍 안으로 넣었지만 기별도 가지 않았다.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다던 표현이 어떤 느낌인지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GPS 상으로는 그들 발아래가 길이지만 길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이런 길을 바른 길이라고 믿은 채 달려왔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길을 만난 후 도시가 있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 게 벌써 다섯 시간이 넘었지만 지나가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이러다가는 해가 질 때까지 사람 한 명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왕파파는 점점 걱정이 차지하는 공간이 넓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떨쳐낼 수 없었다. 김혜미 역시 더위에 지쳐 체력도 떨어지는 듯했다. 어릴 때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려도 지치지 않았던 그들이었지만 지금의 김혜미에게서 어릴 적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흘러내린 땀은 강한 햇빛 때문에 금세 말라버리고 없었다. 머리카락은 모래처럼 푸석거렸다. 햇빛이 강해지자 둘 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강한 태양은 자외선 차단 렌즈조차 뚫어버릴 듯했다. 더 이상 걷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주변 어디에도 그늘이 질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멀리 보였던 나무도 가까이서 보면 앙상한 나뭇가지만 간신히 걸려 있어 그늘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왕파파는 수시로 스마트폰 GPS를 살폈지만 이동 거리가 있다고도 할 수 없었다. 넓디넓은 사막 위에 점도 찍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미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생명체라고는 보이지도 않았다. 나미비아 사막을 찾는 수많은 관광객들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배터리 얼마나 있어?"

왕파파가 물었다.

"내 몸의 배터리를 말하는 거야?"

"큭..."

김혜미의 말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니! 스마트폰 말이야."

"새벽에 꺼놨어. 신호도 안 잡히는데 배터리 닳게 뭐한다고 켜놓겠어."

"다행이다. 이러다 사막에서 죽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죽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응?"

왕파파는 이런 상황에 농담을 툭툭 던지는 김혜미의 여유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기 봐~"

왕파파는 김혜미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리 흙먼지가 일고 있었다. 모래폭풍인가 싶었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산적 같은 건 아닐까?"

"사막에 무슨 산적이냐? 사막에 있는 도둑은 사적인가?"

왕파파의 말에 김혜미가 썰렁한 농담을 던졌다.

"더위 먹었냐?"

"더위보다는 다리가 아파."

왕파파는 등에 맸던 배낭을 벗어 모래 위에 앉기 좋게 두고 김혜미를 끌어다 앉혔다. 그리고는 흙먼지를 일으키는 존재가 이동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예상이 맞다면 지도 위의 길을 달리는 차량일 가능성이 짙다. 느리지만 흙먼지는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



<누명을 쓰고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느낀 마법사가 인간 마을로 숨어들었다. 그를 찾기 위해 기나긴 수색이 이어졌지만 왕국이 소멸되기 전까지 누구도 그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가 가져간 마법서는 단 한 권뿐인 책인데 내용을 기억하는 사람은 전부 소멸되고 없다. 오래전 파파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다. 너무 오래된 전설 같은 이야기라 파파 역시 책의 내용은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들이 잃어버린 왕국의 마법을 계승해왔을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마침 이런 곳에서 그들을 만나게 될 줄이야. 천 년 가까이 그들의 흔적을 찾아왔던 나의 노력은 결실을 얻은 셈이다. 그들은 우리 왕국의 핏줄을 잇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누구도 왕국 사람은 아니다. 파파의 예견 중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그들이 존재한다면 우리의 마법을 전승하고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그들 중 마법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 아들이 우리 왕족의 피를 물려받았다면 마법사가 될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나의 희망이 거의 꺼져버리고 말았다. 역시 이종 간의 결합으로는 혈연을 이을 수 없다는 선조들의 말씀은 틀림이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을 만나서 아들에 대한 기대를 접게 되긴 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소득이 있었다. 용의 흔적을 찾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언제 닥쳐올지 명확하게 지정할 수는 없지만 그 시간이 매우 임박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걸 안다는 건 내가 생명을 얻으며 발생한 숙명이었음이 분명하다. 하나스! 그들이 신이라 여기고 모신다는 존재는 다름 아닌 왕국의 마법사 하나스였고 그들 종족은 스스로 하나스라 불렀다. 그들이 신물로 여긴다는 마법서를 받았지만 나의 능력으로는 표지조차 열어볼 수 없었다. 대체 어떤 결계의 마법으로 봉인된 것일까? 마법서의 내용은 그동안 갈구했던 궁금증 해소에 결정적인 도움이 될 거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전설로는 하나스가 숨겨둔 열쇠가 있다고는 하나 열쇠가 어디에 숨겨졌는지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그들은 하나의 종족을 구성하고 전 세계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중 극히 일부는 꾸준히 용의 흔적을 발굴하는데 인생을 바쳤으며 그동안 내가 수집했던 자료만큼이나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최근에 좇던 용은 아프리카 대륙에 있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용의 자취를 좇는 것에 그쳤다. 용에 대적할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곧장 나미비아로 향했다. 파파가 기록해 두었던 용의 족보에도 존재하지 않는 녀석이 그곳에 있다는 말에 가슴이 뛰었다. 쉽지는 않았지만 긴 결투 끝에 녀석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런데 녀석은 다른 용과 달랐다. 수억 년의 세월 동안 진화를 거듭한 녀석은 둔갑술에 능했다. 바위가 되기도 했고 나무가 되기도 했다. 기운을 감추는 능력도 가졌고 불과 물을 함께 쓸 수 있었다. 마법을 익히지 못했다면 그 자리에서 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미비아의 용은 서리무다. 녀석 역시 남극에서 잠시 잠들어 있는 것에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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