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철살인, 설리를 죽였다
소설 <차도살인>의 마지막 부분 중 일부
차도살인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우리가 잘 아는 『36계』에서 24계다. 직역하자면 『빌려온 칼로 사람을 죽인다』는 뜻이다. 조금 부드럽게 풀면 다른 사람의 힘을 빌어 공격한다는 의미가 된다.
‘길을 빌려 괵나라를 친다.’
작은 나라의 어려움을 틈타 이를 정벌하는 책략이다.
예로써 괵은 춘추시대의 한 작은 나라의 이름이다. 큰 나라인 진이 작은 나라인 우나라에게 길을 빌려 괵나라를 공격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원나라마저 멸망시킨 사실에서 유래되었다.
<네이버 포털사이트에서 차도살인으로 검색한 내용이다>
병법으로 치자면 우수한 전략, 전술임에는 확실한 방법이다. 나는 이번 윤채아씨의 사건에서 두 가지 형태의 살인을 보았다. 위에 풀이한 차도살인과 그 원인이 되었던 촌철살인이다. 이 두 살인에 대해 사건의 발단부터 더듬어 보려 한다. 세상의 어떤 살인도 정당화될 수는 없다. 오떤 살인이 더 나쁜지를 두고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나는 이 사건이 있을 즈음에 <연금술사>라는 소설로 유명한 파울로 코엘료의 <불륜>을 읽고 있었다. 소설 안에서 한 마디의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윤채아는 구속된 상태다. 언제 판결이 날 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자백에 의하면 그녀는 차도살인을 실현했다. 그렇지만 자살한 피의자들에게 살인을 지시한 적은 없다. 이것을 두고 현재의 법으로 어떤 식의 결론을 내릴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여기서 놓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살해당한 이들은 윤채아는 물론 자신을 살해한 피의자에게 촌철살인을 선행한 사실이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피의자의 영혼을 살해했다. 여기서 차도살인과 촌철살인 중 무엇이 더 나쁜 행위냐를 두고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된다. 그보다 먼저 자신을 되새기며 우리의 머리를 일깨울 필요가 있다.
나는 이번 사건들을 통해 세상에 일침을 놓고 싶다. 파울로 코엘료가 말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이란 누구를 말하는 걸까? 그게 당신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해서도 안된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도덕에 기준을 두고 보면 선과 악이 명확히 구분 지어질까? 내가 보기에는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당신은 약자가 꼭 선하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그런 고정관념이 바른 것이라고 한다면 약자의 폭력이 정당하다고 볼 수 있을까? 법은 정의의 편인가? 약자의 편인가?
아인슈타인이 그랬다.
『정신이상이란 같은 행동을 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누군가에게 불합리하고 불행한 짓을 하고 있으면서도 지금 이 세상이 평화롭고 행복하고 자유롭고 희망이 넘치는 세상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 우리야 말로 정신이상자다. 우리는 윤채아를 욕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2년 전 그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한민국이라는 곳에서 영혼을 살해당했었다. 그녀의 영혼은 이미 죽고 없다. 그녀가 구속되던 날, 나는 보았다. 그녀가 그토록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세상은 영혼이 죽어버린 그녀의 육신만 구속해 놓은 것이다.
나는 욕먹을 각오를 하고 내 잣대로 그녀를 재 보련다. 선후의 문제를 떠나 윤채아 역시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누가 그녀를 용서해야 하는지 그 주체를 파악할 수 없을 뿐이다. 피의자들은 그들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살해한 피해자들을 살인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윤채아는 그들의 공범이라고 할 수도 있다. 법률의 제도 안에서는 그녀를 더 이상 구속하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말 대로 이미 죽은 영혼이 더 이상 무엇을 후회하고 깨우치겠는가? 그녀의 영혼에게 어떤 것도 요구할 수 없을 거다.
그런 생각이 든다. 영혼을 죽이는 행위와 육신을 죽이는 행위 중 어떤 것이 더 나쁜 걸까? 이번 사건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다. 누군가는 답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게 당신이 될 지도 모른다. 당신이 무심코 던진 농담 한 마디에 그 누군가는 상처받았을 수 있다. 상대방이 시름하는 동안 당신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
당신은 정의롭고 착하고 여린 사람이다. 혹시 또 모르겠다. 어쩌면 인터넷이라는 곳에서 가면을 쓰고 누군가를 공격하기 전까지는 그랬을 것이다. 당신은 그저 시간 죽이기로 장난 삼아 던진 말(글)이 사랑스러운 국민배우 윤채아를 지금의 모습으로 바꿔 버렸을 수 있다. 당신의 악성 댓글은 그저 심심풀이였을지 모르지만 고통받고 있던 그녀에게 죽음보다 더 큰 아픔을 주었을 거다.
사람들이 악성 댓글을 다는 이유가 뭘까? 당신은 우연히, 그것도 아주 우연히 그랬겠지만 누군가 달아 놓은 악성 댓글이 올바른 정보라고 오인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댓글을 달고 있었을 것이다. 잘 모르는 이야기였던 것이 어느새 아주 잘 아는 진실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야기꾼에 의해서 말이다. 가공된 이야기는 누가 봐도 진실이라고 느낄 정도로 논리적으로 재구성 된다. 없던 사실도 진실이 되곤 한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거침없이 부풀려지고 변형된다.
그 누구도 그토록 친절했던 당신에게 인터넷 속에서는 조금은 악해져도 된다고 등 떠밀지 않았다. 표현은 자유지만 불필요한 말은 자제해야 한다. 당신이 키보드로 두드려 댄 한 줄의 글은 흉기 그 자체다. 상대방은 당신의 스트레스 해소 대상이 아니다. 지금 이 글에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 당신은 윤채아를 비난할 자격이 없다.
오래전 사업을 하다 부도위기에 처했던 친구에게서 들은 말이 있다.
누구는 그에게 “사업이 망하고 있는데 어쩌냐?”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네가 정말 추락하는구나~”라며 위로했단다.
그는 내게 말했다.
“왜 친구들은 내게 ‘어둠 속을 항해하느라 힘들지’같은 표현을 하지 않는 걸까?”
라고 말이다.
당신에게 시인이 되라고 주문하는 것이 아니다. 뭔가 던지기 전에 한번쯤은 생각해 볼 기회가 있다. 지금 나는 적어도 한번쯤은 더 생각하고 내놓을 수 있는 글이란 놈을 두고 이야기하고 있다. 왜 한번 더 생각해보지 않는 걸까? 생각해볼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다.
우리는 생각이 머리에서 입까지 가감 없이 전달되는 유아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지금 당장 로그인하라. 자신의 지난 댓글들을 보라.
지금 누군가 당신을 죽이려 할 지도 모른다.
상대는 당신의 글 한 줄에 하나밖에 없는 영혼을 살해당했을 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