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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파고 Feb 22. 2019

12. 한라산 1100고지 MTB 업힐

제주시에서 서귀포시 방향

올해 여름휴가는 제주로 결정했다.

제주는 이제 별다른 감흥이 사라진 지 오래다.
바다는 그냥 바다고 한라산은 그냥 산이다.
최근 자전거에 빠진 이후로 제주도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도보여행을 했을 때와는 다른 매력이 자전거에 있었다.
7월 뙤약볕 아래 하루 만에 제주도 자전거 일주를 마친 것도 나름 즐거운 추억이 됐지만
1100고지 업힐은 새로운 목표 설정의 대상이 됐다.
서울에서 남산 업힐에 이어 하노이 코스, 남북 코스까지 업힐의 묘한 매력에 빠져드는 시점에
1100고지 업힐을 알게 된 것이 제주에 가고픈 생각을 하게 만든 것이다.
이번 여름휴가 대상지가 제주도가 된 결정적인 이유도 그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휴가는 그냥 다른 데로 가고 며칠 제주에 다녀오는 정도로 끝냈을지도 모르겠다.

암튼 이번 휴가 때는 1100고지를 점령하려는 군인의 비장한 마음이 내게 있었다.
자전거 두 달 탄 초보에게 있어 다른 업힐 구간도 억지로 올라가는 마당에 1100고지라니......

나는 우선 차를 몰아 1100고지를 향했다.
산록도로를 타고 5.16도로를 이용해 1100고지까지.
중문에서 1100고지까지 오르는 구간을 검토했었다.
예전에도 차로 오르기에도 버거운 구간이었는데 자전거를 타고 올라간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두고
운전을 하니 경사도가 장난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내가 이 코스를 오를 수 있을까?
거리는 무려 10km.
북악 코스가 기껏 2.8km였는데 그거 넘어가다 숨 넘어가는 줄 알았건만.
무려 세 배 정도 되는 1100고지 업힐을 과연?
벌써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하느냐 마느냐.


여기가 중문 방향 1100고지 업힐 출발 지점이다.
도로변에 차를 세워두고 엄청난 고민을 시작했다.
출발지점부터 업힐이다.
도움닫기 같은 건 아예 없다.
오래전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던 라이더를 본 적이 있었다.
페달을 밟는 회전수에 비하면 오르는 거리는 암담해 보였었다.
내가 지금 그걸 하려는 거다.


1100고지를 향했다.
언덕은 끝이 없다.
경사는 가끔씩 숨이 막히게 일어선다.
이걸 과연 자전거로 올라갈 수 있단 말인가?
죽겠다 싶었다.


1100고지에 올랐다.
차로 가도 오래 걸리는 이 거리를 자전거로 가겠다니 내가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하다.


제주가 낳은 대한민국의 산악인 고상돈 기념공원이 있다.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고상돈 씨는 우리나라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산악인이다.


1100고지 휴게소다.

이렇게 해서 제주시 방향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코스 역시 어렵다.
내 계획은 이랬다.
새벽에 해뜨기 전에 자전거를 차에 싣고 코스 초입에 차를 버리고 자전거를 타고 오르는 거다.
해가 뜨면 땡볕에 쪄 죽을 게 뻔하니 최대한 시원할 때 마쳐야 하는 거다.
두 시간이면 올라갈 수 있을까?
별의별 고민을 다 했던 것 같다.
이런저런 고민 중에 사이보그 형님이 그러신다.
"제주시에서 올라가는 게 훨씬 편할 거다."
과연 그럴까?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유경험자의 말씀을 들어야지.


다음날인 7월 30일 새벽 3시 50분.
알람은 4시에 맞춰 두었지만 10분 전에 눈을 뜨고야 말았다.
긴장을 했던 것일까?
전날 냉동실에 얼려 둔 물통을 꺼내 케이지에 달고 자전거를 차에 실었다.
랜턴은 없다.
서울서 가져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 어머니 MTB를 타고 오르는 거다.
사이즈가 맞을 리가 없다.
다리가 다 펴지지 않는다. ㅋㅋ
노란색 INFIZA 탈레스 X3
알 게 뭐냐.
어차피 이걸로 당일 종주도 했는데......

평화로를 타고 산록도로를 타고 제주시 1100고지 업힐 코스 입구에 도착하니 5시 정도 됐다.
차를 대충 던져두고 자전거를 꺼냈다.
아직 동이 트려면 멀었다.
빛보다는 어둠이 더 강하다.

5시 10분경 주변을 두 컷 촬영했다.


너무 어둡다.
일방통행으로 된 길로 자전거를 접어들고 스트라바를 작동시켰다.
5시 16분 출발이다.

미친 듯이 밟는다.
어머니 자전거는 역시 익숙지 않다.
240km를 함께 했음에도......
업힐이 처음부터 고바우다.
이런 걸 왜 하는 걸까?
엄청 후회했다.
허벅지가 터지려고 한다.
아뿔싸.
업힐 한 구간을 올리고 경사가 약간 죽은 곳에서 알게 됐다.
앞 기어를 중간에 넣고 밟은 거다.
한 칸만 더 내리면 더 쉽게 올라가는 건데.
정말 미쳤다.
초반부터 힘을 엄청 빼고 만 거다. ㅠㅠ
이런 어설픈 라이더라니. ㅠㅠ
그래. 난 아직 자전거 탄 지 두 달도 안 된 초보니까 그럴 수 있어. 멍청한 놈.

다시 또 고바우가 눈 앞에 보였다.
아~
한숨이 푹 나온다.
이를 꽉 악물고 페달을 밟았다.


뛰용~
코너를 돌며 앞 뒤로 사진 한 방씩 찍었다.
고바우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미친.
또 죽자고 페달을 밟았다.
기어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다.
페달질을 아무리 해도 앞으로 나가는 속도가 더디다.
차라리 걷는 게 빠르겠다 싶었다.


업힐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초소 같은 거 지나 우회전을 했는데 끝도 보이지 않는 업힐 구간.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구간이 업힐 최대 경사구간 같다.
여기서 처음으로 물을 마셨다.
공기는 아직 선선했다.
나를 제치고 지나간 차는 딱 한 대 있었다.
몇 시인지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느낌은 삼십 분은 오른 것 같지만 그건 체감일 뿐이니까.
더운 날씨였다면 벌써 쓰러졌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새벽에 나오길 잘했지.


업힐의 끝이 보인다.
이제 경사가 죽고 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젠 숨 좀 쉴 수 있을 것 같다.

여길 지나니 어리목 입구였는데 사진을 못 찍었다.
너무 힘들어서 사진 생각도 못했다.
아무튼 마구 달렸다.
거기서부터는 잠깐 평지였고 기분이 죽였다.
살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아. 그런데. 경사가 죽더니 내리막길이다.

안 돼!!!!  어떻게 올라온 건데. 내리막길 싫어~


내리막길이 싫기는 처음이었다.
허무하게도 내리막길은 하염없다.
미치기 일보 직전이다.
한라산이 미친 거 아닌가?
왜 이런......


숲이 우거진 도로의 코너를 돌아서니 확 트인 구간이 나왔다.
아쉽지만 여기서 자전거를 세우고 사진을 촬영했다.
이 구간은 찍어 두어야 할 것 같아서다.
저 앞으로 지옥문이 보인다.
업힐이 시작되고 있고 저 지옥문을 들어서면 얼마나 업힐이 시작될지 걱정이 앞섰다.


미친 듯이 업힐이 이어졌다.
물 마실 힘도 없다.
업힐은 굽이굽이 계속됐다.
얼마나 밟았을까.
업힐은 경사를 죽이기 시작하더니 울렁울렁 평지스럽다.
이런 경사는 평지나 다름없지.
자전거 바퀴는 또 바람이 많이 빠졌다.
ㅋㅋ
또 이렇다.
좀 챙겨 넣었어야 하는데.
하지만 어차피 다 올라왔다.
2주 전에 넣은 바람이 여태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리란 생각이 잘못된 거지.
아무튼......
그런데 1100고지 2km 남았다는 저 표지만.
사랑스럽다.
고작 2km다.
경사는 죽어간다.
내 기억엔 여기서부터 1100고지까지는 경사가 급하지 않다.


좌측으로 한라산이 보인다.
늪지 공원 입구도 보인다.



드디어 1100고지 주차장이다.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나 혼자다. ㅋㅋ
고상돈 기념공원도 조용하다.
차도 없고 사람도 없다.


 휴게소 역시 문을 닫았다.
물통 안엔 물이 절반 이상 남았다.
이런 업힐을 하면서 물도 마실 여유가 없었다니.
아무튼 어찌 됐건 올라왔다.
딱 한 번 쉬고 올라온 거다.
사진 찍으려 잠시 정차한 두 번은 쉰 게 아니니까.
그것도 평지나 다름없는 곳에서.



이 녀석 고생이 많다.
그냥 어머니 태우고 다니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을 텐데.
어쩌다 제주도로 팔려 와서 이 고생이냐. ㅋㅋ



다시 한라산을 바라본다.
구름이 가득하다.
한라산 정기를 좀 받아주고 가려했건만.
마음 같아서는 아스팔트에 드러눕고 싶었지만 그건 참기로 했다.
갑자기 차가 들어와서 밟고 지나가지 않을까 하는 소심한 마음에. ㅋㅋ
지금까지 차는 4대 봤다.
모두 나를 제치고 갔다.
당연한 건가? ㅋㅋ
창문 열고 손이라도 흔들어 주지. 정이 없어. 사람들이.

다시 제주시 방향으로 내려가는데 가민을 다시 켜지 않았다.
다운힐도 재밌는데......
그런데 잠시 후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를 맞으며 달리는 기분도 나쁘지는 않았다.
막판에는 렌터카 한 대가 나를 제치더니 속도도 내지 못하고 앞을 막았다.
어휴. 그 인간만 아니면 더 재밌게 다운힐을 즐겼을 건데.


원래 자리로 돌아오니 차는 그대로 잘 있었다.
차에 도로 자전거를 싣고 빗속을 뚫고 달렸다.
집에 가서 아침밥 먹어야 되니까.



차에 비가 들이친다.


평화로를 타려다 보니 아침 제주가 상쾌하다.
사진으로 담아내니 약간 아쉽다.
SLR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데 이 정도로 만족!


새별오름이다.
역시 언제 봐도 밋밋하다. ㅋㅋ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표 맛난 아침밥이 기다리고 있었다.
뭘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배가 고팠나 보다.
거의 밥을 마셨다고 봐야겠지.


54분 걸렸네.
총 거리 8.9km
평속 9.9km/h

평속이 너무 웃긴다. ㅋㅋ

난 다음날 서귀포 중문에서도 올라보기로 했다.
하지만 하지 못했다.
피곤해서 일어났다가 다시 자 버렸다. ㅋㅋ
그건 다음 기회에.
2주 후에 다시 시도해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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