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바이크 시즌3:사랑시> 11화-나무

본격 자전거 로맨스소설

by 루파고

언제나처럼 이우정이 합류하자 짧은 농담이 흘렀다. 그런데 이번에는 임창완과 이우정의 생각지 못한 교감 때문에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오래전 이야기 되어버렸지만 앞길 창창했던 이우정의 실력을 높이 사고 눈여겨보았던 임창완과 그녀의 짧지만 깊은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우습게도 라이딩 코스는 하트코스를 반시계 방향으로 도는 걸로 수정되고 말았다. 촌스럽지만 오늘 만남을 기억하자는 취지였다.

선두는 백인찬이 맡았고 바로 뒤는 한세아가 붙었다. 이별하의 눈엔 백인찬의 뒷자리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로 보였다. 임창완은 맨 후미에 달리고 바로 앞엔 오승희가 달렸다. 두 사람은 거칠게 달라지 않고 멀찌감치 떨어져 달렸다. 가끔 오승희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곤 했기에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달리는 건 알 수 있었다.

안양천 합수부를 지나도록 멈추는 일은 없었다. 좀 힘들어도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곳에서 쉬는 게 다들 마음이 편했다. 유명인이라는 건 아무래도 피곤한 일이었다. 과천 시내도 그냥 쉬지 않고 달려 지나치고 안양의 한적한 광장에 도착해서야 백인찬의 정지 수신호를 볼 수 있었다. 빨리 달리지는 않았지만 이별하는 힘을 거의 소진한 상태였다. 여차하면 낙오할 것만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억지로 참은 것이다. 자전거의 매력 중엔 그런 고비를 넘어서는 통쾌함 같은 게 있긴 했다. 해냈다는 묘한 성취감은 어떻게 보면 인생과 같았다. 등산을 다니는 사람들이 산을 인생에 비유하곤 한다는데 이별하에게는 자전거도 못지않다고 생각했다.

"어쩜 이렇게 한적한 곳이 다 있대? 인차니가 좋은 곳 찾았네."

자전거에서 내린 오승희가 프레임에 걸터앉았다. 살짝 다리를 벌려 자전거를 빗각으로 기대앉은 모습은 아마추어 라이더라기보다는 수준 높은 프로 라이더처럼 보였다. 몸매 좋고 맵시 나는 한세아, 이별하, 김민경, 이우정이 어디 가도 눈에 띈다 할 지라도 오랜 기간 라이딩으로 다져진 체격과 자전거와 일체가 된 듯한 자연스러운 자세에는 누구도 쉽기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었다.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자전거를 접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보는 사람마저 부끄럽게 만드는 쫄쫄이조차 그녀에겐 평상복만큼이나 어울려 보였다. 오랜 라이딩 경력이 몸에 배어 일상처럼 된 것이었다. 옆에 같은 자세로 자전거에 걸터앉은 임창완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록 라이딩 패션이 어색하다 싶었지만 쫄쫄이 위로 드러난 다부진 체격이 건강함을 대신 표현하고 있었다. 이우정은 무슨 내용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인도 경계석 위에 앉아 손에 든 고글을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며 누군가와 전화 통화에 집중한 채였다. 한세아는 백인찬 옆에 서서 뭔지는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며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고글과 마스크를 벗은 채 눈빛을 교환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별하는 김민경이 뭐라고 말을 건네는 것도 모른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 내 말 듣고 있는 거예요?"

이별하는 김민경이 어깨를 툭 치며 소리를 지르자 정신이 돌아왔다.

"아, 미안... 요즘 깊이 생각하는 게 좀 있어서."

그녀는 재빨리 시선을 회수하고 말을 둘러댔다.

"뭐라고 그랬지?"

"아뇨. 요즘 바쁜데 라이딩할 시간이 있냐고 물었어요."

김민경의 목소리엔 뭔가 의심쩍은 듯한 느낌이 묻어 있었다.

"혹시 인찬 오빠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아니, 무슨..."

"에이~ 아닌 것 같은데요. 저쪽에서 시선을 못 떼던데요."

"아냐. 그냥 보기 좋아서 그래. 세아가 저렇게 좋아하는 건 처음 본 것 같아서. 지금까지 남자들에게 시선을 주는 건 처음 봤거든."

"저도 세아 언니에게 얘기 들었어요. 살면서 관심이 가는 남자는 처음이래요. 언니 선물인데 빼앗은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자기도 어쩔 수 없다고 그러던데요.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고 말이에요."

"그렇지. 그래야지. 그럼~"

이별하는 다시 백인찬과 한세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쁜 한 쌍이 분명했다. 그런데 김민경이 전해준 말처럼 어쩌면 자신도 백인찬을 놓치면 평생 후회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억지로 스스로를 떼어내려 노력했다. 어차피 한세아에게 양보한 남자다. 후회 같은 건 하면 안 된다. 마음은 이미 조금은 그에게 흘러가버린 건 알고 있었지만 이성은 꾹꾹 누르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거나 연결된 관계를 끊어버리기엔 너무 멀리 온 것도 알고 있었다. 이별하의 머릿속엔 두 남녀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백인찬은 그녀들이 그토록 원하던 존재였다. 부족한 일 퍼센트를 적확하게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임창완도 시간이 허락하는 한 함께 라이딩하기로 약속했다. 라이딩 자체는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안정감이 있었다. 이별하의 마음은 편치 않았지만.

라이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엔 한세아가 이별하를 따라붙지 않았다. 평소와는 다른 패턴이었다.

어쩌면 이별하는 한세아가 알몸을 품어주는 걸 즐겨왔는지도 모른다. 이젠 자신의 알몸 대신 백인찬의 알몸을 품어줄 한세아를 생각하니 소외감, 이질감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급작스럽게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고독 같은 건 거의 느껴본 적 없는 그녀였다.


샤워를 마치고 알몸으로 소파에 몸을 던진 이별하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옷장으로 향했다. 서랍을 연 그녀는 레이스가 없는 스포틱 한 속옷을 꺼내 주섬주섬 걸치기 시작했다. 자덕 라인이 선명해지기 시작한 하얀 피부 위로 회색 속옷이 앙증맞게 자리 잡았다. 그리곤 짧은 단발머리를 뒤로 묶으며 지신의 몸을 훑었다. 분명히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팬과 대중이 아닌 특정된 누군가에게 보여줄 자신의 몸에 관심이 생겼다는 걸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다. 한참 동안 자기 모습을 둘러보던 그녀는 테이블 위에 대충 던져두었던 조준흠의 노트를 집어 들었다. 어제 읽었던 시가 생각난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생각을 읽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시를 거듭 세 번이나 읽은 후에야 종이를 넘겼다.



<나무>


나무는 제 고독과 제 슬픔을

굳이 탓하지도 않고,

때가 되면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저를 이루었던

잎사귀 전부를 버린다

사계절 따라 서로 다른 휘파람을 빚어 불며

누가 지켜보는 것도 아닌데 나무는

세상 시름에 못 견뎌하는

그 누군가를

제 그늘 밑에서 쉬어가게 하고,

또 그 많은 곤충들의

초조한 삶을

품어 키워주는 안식처가 된다

그리하여, 나 이 세상 나무 밑을

무심코 지날 때면,

꿈은 나도 모르는 사이

싱그러움을 발화하고,

신선하고 깨끗한 공기는

무거운 생각들을

더없이 가볍게 해 주었다

내가 나보다 더 무거운

눈물방울들을 매달고 슬퍼

세상의 강 앞에

무릎 꿇고 통곡할 때에도 나무는

저의 높다란 키를 흔들어

나를 아는 체했고,

마침내는

뙤약볕의 절망 속에

길을 잃고 헤매던 자를

제 품 안으로 불러들여

머물게 하며

새삼 아낌없이 주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었다



이별하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알고 흠칫 놀랐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고독함도 아니고 소외감도 아니었다. 존재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듯했고 방금 전까지의 이별하는 자신이 아닌 것만 같았다. 왠지 세상의 모든 걸 읽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스마트폰의 1번 버튼을 눌렀다. '엄마'라는 그리웠던 단어가 화면에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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