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바이크 시즌3:사랑시> 10화-게스트

네이번 연재 중, 본격 자전거 로맨스 소설

by 루파고

바쁜 일정이 지나고 보니 벌써 가을은 저만치 떠나가고 있었다. 모처럼 라이딩을 나섰지만 몸서리가 쳐지는 싸늘한 기온 때문에 도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자전거라는 녀석의 매력은 그 어떤 것도 누를 수 없었다. 어차피 운동하는 거 재밌게 하는 게 낫겠단 생각에 헬스도 그만둔 상태였다. 다리가 뻐근해서 불편하던 것도 이젠 꽤 익숙해져 라이딩 다음날 걷는 것도 어색하지 않았다.

역시 잠실선착장 구석자리로 향했다. 어쩌다 보니 그 자리가 그녀들만의 비밀의 약속 장소 같은 게 되어버린 곳이다. 오십 미터 거리에 익숙한 복장의 여성 라이더 세 명이 보였다. 오승희, 김민경 그리고 한세아였다. 멀리서 실루엣만 봐도 누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이번에도 이우정은 늦을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녀들 옆에 익숙하지 않은 한 명의 남자가 보였다. 혹시나 싶었지만 백인찬은 아니었다. 키가 짜리 몽땅하고 왜소한 게 그녀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비대칭의 조합이었다. 뭇 라이더들과는 달리 패션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은 모습이었다. 구멍이 많은 하계용 흰색 헬맷에 늘어나서 쫙 달라붙지도 않는 두꺼운 춘추계용 고동색 져지는 노티가 났다. 자전거는 기함급 최고급 기종이지만 남의 것을 빌려다 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조합이 부드럽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살이라곤 헬맷과 고글 사이 드러난 부위뿐이었다.

"별하 왔구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 선배님!"

그들 앞에 자전거를 멈춘 이별하는 깜짝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가 너희들 팀이 있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 그런데 이렇게 초대를 다 해주니 얼마나 영광이었는지 모른다. 이 날이 언젠간 올 줄 알았지. 이렇게 늘씬한 미녀들과 라이딩하는 것만 해도 감개가 무량한데 게다가 대가수님과 함께라니 이 얼마나 큰 행복이겠니?"

임창완의 말엔 어떤 가식도 느껴지지 않았다. 언제나 같은 느낌에 같은 생각, 중도를 걷는 편안함으로 대중의 사랑을 한껏 받는 원로 가수 다웠다.

"무슨 과찬의 말씀이세요. 부끄럽게요. 선배님이야 말로 진정한 대가수 이시죠. 저도 언젠간 선배님과 라이딩할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늘은 정말 놀랐어요. 미리 말씀이라도 해 주시지."

이별하는 임창완을 살며시 끌어안았다. 왠지 아빠와 딸 같은 편한 모습이었다.

"부끄럽게 왜 이러니? 흐흐"

임창완의 목소리엔 말 그대로 수줍음이 묻어있었다.

"부끄럽긴요. 대선배님을 모신 것만 해도 영광인 걸요."

그녀 뒤에서 한 명의 라이더가 느린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오셨네요."

백인찬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별하는 자기도 모르게 한세아를 돌아보았다. 고글 속에 눈빛이 가려져 있었지만 마스크 뒤로 알 듯 모를 듯한 미소가 살짝 드리워져 있었다.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었지만 백인찬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성적으로는 한세아에게 양보했으니 미련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본능적으로 마음은 움직였던 것이다. 심장은 전에 없이 뛰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심장을 이렇게까지 발작하게 만든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이별하는 어쩌면 자신이 스스로 통제의 끈을 놓고 자기 최면을 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대가수님 또 뵙습니다. 앞으로 자주 뵙겠네요."

그들 앞에 도착한 백인찬이 자전거에서 내리며 말했다. 그리곤 임창완에게 고개를 돌리더니 황급히 쪼로로 자리을 옮겼다.

"선배님. 웬 일로~"

백인찬의 목소리엔 놀라움이 그대로 묻어났다.

"에이그~ 니 눈엔 미인들만 보였냐? 하긴 내가 너였어도 그랬을 거지만."

임창완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우리도 오랜만이다. 야~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미국에 공부하러 갔다고 들었는데 언제 들어온 거야? 학위는 그만둔 거 아니지?"

임창완이 20센티 이상 차이가 나는 백인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백인찬은 얼른 마스크를 목 아래로 내리고 고글도 벗었다.

"선배님. 벌써 몇 년인데요. 8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공부하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벌써 그렇게 됐나? 어쩜 세상은 나만 늙는 것 같다니까~ 넌 왜 점점 더 멋있어지는 거냐?"

"오빠! 오빠도 충분히 멋지거든요. 이제 인차니 좀 그만 놔줘요. 쟤들 인찬이에게서 눈을 못 떼고 있잖아요. 내가 이래서 짝 없는 애들한테 남자 소개를 못 시켜주겠다니까."

오승희가 임창완의 팔을 끌었다. 이별하는 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 얼굴이 붉어졌지만 마스크로 가려진 덕분에 누구도 알아볼 수는 없었다. 한세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뭐가 어째서요!"

한세아가 소리쳤다.

"그나저나 우정이는 오늘도 늦는 거야? 내가 애들을 맡아줄 수도 없고. 정말!"

오승희는 관심 없다는 듯 한세아의 말을 무시하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투덜거렸지만 완벽주의자로서의 성격일 뿐 감정 같은 건 없었다. 한세아와 이별하는 백인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사람 더. 김민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글 뒤로 가려진 김민경의 눈빛은 복제라도 하려는 듯 백인찬의 온몸을 구석구석 스캔하고 있었다.

"승희야, 그런데 말이다. 이런 자리였으면 미리 언질이라도 해주지 그랬어. 전설로만 알았던 너희들 팩에 내가 끼게 될 줄 알았으면 제대로 갖춰 입고 나왔을 거 아니냐? 나만 후줄근하게 이게 뭐냐? 인찬이는 떡대가 저러니 아무거나 걸쳐도 멋진 놈이고, 너희들이야 쭉쭉빵빵하니 이미 여신들로 정평이 나 있는데 난 이게 뭐냐? 아저씨 마냥."

"아저씨 맞거든요. 그런데 오빠한테 괜찮은 옷이 있긴 해요? 멋지게 입고 다니는 걸 본 적이 없어서... 히히~"

오승희의 놀리는 듯한 말투였다.

"이런! 이미지 쇄신을 해야겠군. 내가 옷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고 제대로 입고 나오려고 하면 마누라가 눈치를 줘서 그래. 하여튼 이놈의 인기는 어쩔 수가 없어. 이 나이 먹고도 다른 여자 눈길 끌까 봐 멋지게 입고 나가는 꼴을 못 보니 말이야. 너희들이 나의 고충을 알기나 하냐?"

"어차피 다 가리고 타는데 누가 오빠를 알아본다고 그래요?"

오승희의 말에 임창완이 입을 쯧쯧거렸다.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인터넷도 좀 들여다보고 그래라. 너희들은 꼭 기사에 나와야만 소식을 아냐?"

"무슨?"

오승희는 물론 모두들 임창완의 입에 집중했다.

"몰랐어?"

"......"

"감감무소식이구나. 너희들! 한강에 여신들이 떴다고 온 동호회에 소문이 났다더라. 대체 정체는 무엇이며 어디에 살며 직업은 무엇이며 다들 궁금해서 난리가 났던데."

"그런 게 어디에 올라와 있어요? 대체 우리에게 무슨 관심이 생겨서들 그러는 거죠?"

"참내! 니들이 그렇게 입고 달리는데 눈이 안 돌아갈 남자가 어디 있기나 하겠니? 안 그러냐? 인찬아?"

임창완이 백인찬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렇긴 하죠. 미국에서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특히 흰색 복장으로 다섯 분이 라이딩을 하신다면. 게다가 소문에 들리는 것처럼 고수들이라면 더욱 눈길을 끌겠죠."

"거봐!"

"오빠, 우리에 대해 뭐라고 나와요? 얘들이 노출되면 피곤할 것 같아서 그렇게 보안에 신경을 쓰고 다녔는데 말이에요."

"그거야 모르지. 아직 너희들이 누군지 알려지진 않았는데 모르긴 해도 나하고 라이딩하면 들통날 가능성이 높을 걸!"

"왜요?"

한세아가 끼어들었다.

"왜긴 왜야. 창완 오빠가 자덕이라는 건 대한민국 라이더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게다가 딱 봐라. 너희들도 저 차림만으로도 알아본 것처럼 저 오빠는 아무리 가리고 다녀도 티가 팍팍 나요."

오승희가 질책하듯 말하자 모두들 피식거리며 웃고 말았다. 잠실 아파트 쪽 통로에서 익숙한 복장의 여자가 자전거를 타고 달려오는 게 보였다. 라이딩하는 모습에 언제나처럼 급한 마음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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