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동안의 고독>은 5대에 걸친 부엔디나 집안의 번영과 쇠락을 다루는 계도(系圖) 소설이다. 부엔디나 집안 사람들은 가상의 마을인 마콘도를 설립해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살았다. 하지만 집시가 등장하며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고, 있는지도 몰랐던 정부에 의해 오랜 내전을 겪고, 대형 바나나 공장이 설립되며 자본주의 물결이 휩쓰는 동안 에덴 동산 같던 마콘도는 황폐해져버렸다. 굴곡진 역사를 온몸으로 소화해내면서도 부엔디나 집안 사람들은 저주라도 걸린 마냥 끊임 없이 근친상간을 반복한다. 결국 근친상간으로 돼지 꼬리 달린 아이가 태어나며 부엔디나 집안과 마콘도는 현자 멜키아데스가 양피지 문서에 예언했던 대로 개미들에 먹혀 지구상에서 사라진다.
분명 5대에 걸친 부엔디나 집안 사람들의 이야기지만 조상의 이름을 물려받은 아르카디오들, 에우렐리아노들, 레메디오스들에 의해 역사는 반복된다. 아우렐리아노 호세가 고모인 아마란타와 나누었던 끈적한 욕망이 후세에 아우렐리아노와 아마란타 우르슬라 사이에서 재현된다. 아르카디오들은 하나 같이 색욕에 빠져 허우적 거린다. 또한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집시들의 신문물에 빠져 무익한 연구만 반복하다 미쳐버렸듯이 아우렐리아노들은 저마다의 무익한 일에 골몰한다.
처음에는 낄낄거리며 즐겼던 그들의 좌충우돌이 거듭 반복되는 걸 보다보면 어느 순간 등골이 서늘해진다. '세월은 흐르게 마련'이라던 우르슬라 이구아란과 '그렇긴 하지, 하지만 별로 흐르지도 않아'라 대답한 아우렐리아노 대령의 대화가 떠오른다. 그리고 이 대화마저도 호세 아르카르디오 세군도와 우르슬라 이구아란에 의해 재현된다. 이러한 재현성을 통해 G. 마르케스는 유전 공학이니 인공지능이니 지껄이지만 결국 인류의 역사는 부엔디나 집안의 역사처럼 단 한 번도 흐른 적 없이 자폐(자기폐쇄)적인 순환에 갖혀있을 뿐이다라며 경고하는 듯하다. 세월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원을 그리며 빙빙 돌고 있다는 우르슬라 이구아란의 생각처럼 말이다.
마콘도 마을을 정신적으로 타락시키며 결국에는 황폐하게 만든 여러 사건들의 진행 과정을 보고 있자면 이러한 생각은 더욱 공고해진다. 외래 문물의 유입으로 인한 급격한 발전, 이념 대립으로 인한 오랜 내전, 대형 바나나 공장에서 핍박받던 노동자들의 쟁의는 콜롬비아의 기구한 역사를 상징하나 이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소름돋게 비슷할 정도이다. 기구하다 생각했던 대한민국의 역사는 별로 특별할게 없다는 듯 콜롬비아에서 재현되었으며 지금도 온갖 모습으로 반복되고 있다.
이 소설의 가장 무서운 점은 반복되는 지저분한 역사를 부엔디나 사람들은 결코 깨닫지 못한 채 몰락한다는 점이다. 130살 넘게 산 우르슬라 이구아란과 필라르 테르네라만이 죽음에 다다라 더 이상 무엇도 할 수 없는 신체가 되었을 때 집안의 자폐적 역사를 어렴풋 느낀다. 어쩌면 인류도 인류의 자폐적 순환을 눈치 채지 못한 채 서서히 몰락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폐적 순환을 벗어나기 위해 역사를 공부하며 인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이런 희망찬 생각을 하는 순간 G.마르케스는 기록된 역사는 마냥 진실이 아니며 그 당시 권력을 장악한 지배 계급의 조작에 불가하다며 조롱한다. 대형 바나나 농장의 열악한 노동 환경에 항의하던 3000명의 노동자가 정부에 의해 잔인하게 학살되었지만, 홀로 겨우 살아남은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신문과 교과서에 실린 말을 근거로 아우렐리아노 세군도가 미쳤다고 여길 뿐이었다. 이 장면을 통해 작가는 필자의 희망찬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는지 잔인하게 깨닫게 한다. 그리고 권력에 의해 역사는 지금도 여전히 다시 쓰이고 있다.
자폐적 인류에 대한 G. 마르케스의 조롱은 소설 마지막에 절정에 다다른다. 그토록 즐겁고 차갑게 부엔디나 집안과 마콘도를 조롱하던 작가는 돌연 '문학이라는 것이 사람들을 우롱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장난감 일지도 모른다'며 밑밥을 깐다. 마지막 아우렐리아노가 부엔디나 집안의 모든 일이 현자 멜키아데스 양피지에 적혀있다는 걸 해독하며 이야기가 끝날 때 그가 깔아뒀던 밑밥은 독자를 신랄하게 비웃는다. 너가 읽은 이 이야기는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소설 속 양피지에 기록된 예언서라며 소설 속 소설이라며 깔깔거리며 웃는다. 자신이 만들어 낸 우롱을 위한 장난감을 열심히 읽어댄 독자들을 희롱한다. 희롱된 독자는 단순히 독자가 아니라 자신이 예언서 속 일부임을 종말에 다다라서야 깨닫는 소설 속 마지막 아우렐리아노로 전락된다.
작가는 멜키아데스 양피지의 처음이자 마지막 독자였던 아우렐리아노가 집안의 자폐적 순환을 종말의 순간 양피지를 읽으며 겨우 눈치챘듯 인류는 결코 인류의 자폐적 순환을 깨닫지 못할 것이라며 비웃는다. 이 소설을 통해 G.마르케스는 인류는 반복되는 비극을 매번 그 누구에게도 이해 받지 못한 채 고독 속에 말라 죽어갈 것이라 예언한다. 날아다니는 양탄자나 100살 넘게 사는 사람, 금을 만드는 연금술 등의 환상적 요소들을 소설 속에 집어넣은 이유는 분명 조롱에 열받은 독자들이 자신에게 화를 낼 때 '이것은 환상 소설일 뿐인데 왜들 그리 열을 내십니까?'라고 우리를 또 놀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G.마르케스는 '소설의 종말' 이 고해진 시대에 이 소설을 출판하면서 자폐적 인류가 부엔디나 집안 사람들처럼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인류 종말 직전에 읽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인류는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주었다. 적어도 1982년 그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을 때는 많은 이들이 그의 책을 읽고 인류의 자폐적 순환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 때 소설 속 현자 멜키아데스는 어떤 표정이었을지 궁금하다. 그는 이 또한 고여있는 시간의 흐름일 뿐이라 생각했을까? G. 마르케스가 130살까지 살아서 또 다른 소설을 써주었더라면 인류의 자폐적 순환이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향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우리는 고독에 빠진 줄도 모른 채 고독 속에 끊임없이 허우적 될 운명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