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해야 했던 3가지 질문
*장강명 작가님의 <열광 금지, 에바 로드>와 크리스티안-쇤데르비-옙센 감독님의 <Natural Disorder>를 감상 후 쓰는 에세이입니다.
*성별, 종교, 국적 등 모든 기준을 넘어 모든 사람들이 이유의 세계를 탈출하기를 빕니다.
이 글은 감정적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내가 마주해야 했던 질문들은 항상 나를 슬프게 했다. 그렇기에 이 글을 적기 위해선 나의 가장 큰 슬픔과 분노들을 마주해야만 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괴롭혀 왔던 질문들이며 여전히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한 질문들이며 이야기할 때마다 눈물 흘리며 분노하고 마는 질문들이다. '난 왜 여자로 태어났는가?', '내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3가지 질문이 내가 답해야 했던 어쩌면 아직까지 답하지 못한 질문들이다.
첫 번째 질문은 '난 왜 여자로 태어났는가?'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난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었다. 이런 물음을 가지게 된 건 순전히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때문이다. 이 둘은 전형적인 옛날 사람으로 내가 여자이기에 태어난 순간부터 나를 탐탁지 않아 했다. 엄마는 두 사람의 행동에 분노했지만 아빠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어렸기에 무엇이 차별인지도 몰랐지만 그 두 사람이 나를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과 외할머니가 나를 바라보던 따뜻한 시선은 분명 달랐다. 나는 잘못이 없음에도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앞에서 죄스러운 기분을 느껴야 했다. 남동생이 태어난 이후 더욱 선명한 차별에 아파해야 했다. 명절을 쇠고 돌아온 날 밤이면, 항상 이불 속에 들어가 왜 여자로 태어났는지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었다. 그 사람들 집에 가면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아이, 비정상적인 아이였다.
물론 부모님은 내게 충분한 사랑을 주셨다. 하지만 조부모의 계속된 차별과 아파하는 딸을 보면서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 아빠, 숨만 쉬어도 사랑받는 남동생을 보면서 '내가 여자로 태어난 게 잘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성교육 시간에 수정된 정자가 어떤 성염색체를 가졌느냐에 따라 성별이 결정됨을 배운 이후에는 엄청난 허탈감을 느꼈다. 슬프게도 내가 여자로 태어난 것은 나의 의지도 나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저 운의 문제였을 뿐이다. '난 왜 여자로 태어났는가?'에 대한 답은 '이유는 없다'였다. 하지만 여자로 태어난 이상 여자이기에 겪어야 했던 슬픔은 나의 몫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여자인 내가 슬펐다. 그렇기에 나는 여자인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다. 여기서 두 번째 질문이 시작된다. 친할머니, 친할아버지는 물론이고 심지어 자신에게조차 사랑받지 못하는 '나'는 왜 태어났는가? 내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나는 여자인 동시에 학생이었기에 가장 편하고 쉬운 답은 공부를 잘하는 것이었다. 좋은 성적은 나의 가치였고, 내 노력의 결과였으며, 내가 세상에 존재해도 된다는 허가였다. 결국 좋은 성적은 내 존재 이유에 대한 증명이었다. 이러한 증명에도 친할머니, 친할아버지는 '여자가 공부해서 뭐 하게'라는 말을 뱉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부모님은 내 성적에 열광했으니 말이다.
성적표에 찍히는 전교 1등이 너무 당연해졌을 때 즈음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은 내가 공부를 못했어도 지금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했을까? 부모님은 나이기에 나를 사랑하는 걸까, 공부를 잘하는 나를 사랑하는 걸까? 어느 순간 존재의 이유인 좋은 성적이 '나라는 존재'를 압도해 버린 것은 아닐까? 공부를 잘하지 않는 나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존재의 이유'가 '존재'를 압도해 버린다면 더 이상 그 존재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게 아닐까?
그제야 나는 존재의 이유를 물었던 질문 자체가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존재의 이유를 알고자 했던 그 순간부터, 나는 이유 없이는 정당화되지 않는 '나'를 마주해야 했다. 이유 없이 정당화되지 않는 자아는 결국 이유 없이는 제대로 서 있을 수 조차 없는 자아일 뿐이다. 결국 나는 존재 이유를 물었던 그 순간부터 그럴듯한 답을 위해 내 존재를 부정하고 그럴듯한 이유를 골라 그 이유에 기생했을 뿐이다.
오랜 기생 생활 끝에 나는 존재의 이유에 매달리고 끌려 다니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 이후 내 세상은 바뀌었다. 더 이상 존재의 이유에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다. 그저 존재하기에 존재하고 싶었고, 사랑받기에 사랑받고 싶었다. 가치 있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아무 이유 없이 그저 나의 존재 그 자체로 충만하기를 바랐다. 이유는 필요 없다. 아니 이유는 없다. 내가 여자인 것에, 내 존재에, 내가 부모님으로부터 받는 사랑에 이유는 없다. 그저 내가 여자이기에 나는 여자고, 내가 존재하기에 나는 존재한다. 부모님은 내가 나이기에 나를 사랑한다. 그렇기에 친할아버지, 친할머니가 나를 싫어했던 것 역시 이유는 없다. 그들은 그냥 나를 싫어했을 뿐이다. 내가 여자였기에 나를 싫어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이유가 있어서 나를 싫어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냥 그런 사람이기에 나를 싫어했을 뿐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무엇이 '나'인지도 몰랐지만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손녀, 그리고 누군가의 여자는 되고 싶지 않았다. 최초의 성장이었다.
그리고 최초의 투쟁이기도 했다. 친할아버지, 친할머니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욕심 많은 년'이란 고함과 함께 중단됐다. 그들과의 관계는 그냥 그렇게 끝났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 때문에 더 이상 아파하지 않기로 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투쟁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오히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투쟁은 너무 힘들었다. 부모님과는 서로에게 아플 수밖에 없는 기나긴 대화를 나눴다. 내가 나이기에 나를 사랑하는 것인지 내가 공부를 잘해서와 같은 어떤 이유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것인지 물었다. 부모님은 나를 만난 이후로 왜 나를 사랑하는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 질문 자체가 부모님에게는 큰 상처였다.
오랜 대화 끝에 가족이라는 관계가 서로를 사랑하게 된 계기였을 수는 있지만 지금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이유가 가족이기 때문은 아니라 결론 내렸다. 나는 엄마, 아빠를 나의 부모라서가 아니라 엄마, 아빠라는 사람 자체를 사랑한다. 부모님 역시 어떤 이유가 있어서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이기에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여전히 내가 누구인지, 부모님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가족으로 묶인 것이 아닌 각자가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개인들로 서로를 느낀다. 어떠한 이유도 없이 말이다.
첫 번째 성장 이후, 몇 년간 삶에 대한 질문이 없었다. 그저 이유들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에 행복했고 그걸로 충분한 것 같았다. <Natural Disorder>에는 '다른 인생을 꿈꿔 봤어요? 지금과 다른 인생 말이에요.'라는 질문을 받은 뇌성마비인 야코브가 슬픈 웃음을 짓다가 '네, 가끔은요.'이라고 답하는 장면이 있다. 야코브가 받았던 질문을 내게 던져보았다. 물론 다른 인생을 꿈꿔봤다. 하지만 지금도 내가 다른 인생을 꿈꾸는지는 대답하기 어려웠다. 이유의 세계에서 탈출한 뒤로 어떻게 살 것인지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유의 세계로부터의 탈출은 끝이 아니었다. 흔히들 말하는 또 다른 시작이었을 뿐이다.
성장이란 별 게 아니다. 첫 번째 성장 이후 스스로가 많이 바뀌었다 생각하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좀 더 기 세진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성장은 생명과학에서의 진화와 비슷한다. 사람들은 흔히 진화란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변화는 좋은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진화에는 방향성 따위 없다. 그저 집단적 수준의 유전자 풀(pool) 변화로 정의될 뿐이다. 진화의 결과가 생존에 유리할지 아닐지는 시시각각 변하는 잔인한 자연에 의해 결정될 뿐이다. 우리는 운 좋게도 살아남은 생명들만 볼 수 있기에 진화란 좋은 것이라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진화 결과 수많은 종들이 지구에서 사라졌다. 성장도 그럴지 모른다. 지금의 내가 성장이라 생각한 것이 '미래의 나'의 기준에서는 성장이 아닐 수도 있다. 결국 성장은 변화의 하나이고 변화에 의해 바뀐 나는 이전과 다른 기준으로 그 변화를 판단할 것이다. 결국, 성장이란 내가 겪어왔던 수많은 변화들 중 지금의 내가 생각하기에 나를 살아있게 하는 것들이다.
그렇기에 다채롭고 과감하게 살고 싶다. 지금의 내가 겪고 있는 혹은 겪게 될 변화들이 성장인지 아닌지 지금의 난 모른다. 성장은 성장한 이후의 '내'가 판단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계속해서 경험하고 변하고자 한다. 별 일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성장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박종현이 스탬프 랠리를 완주했다고 그의 형편이 극적으로 좋아지진 않았던 것처럼, 야코브가 연극을 한 편 올렸다고 뇌성마비인으로서 그가 겪어야 하는 어려움이 없어진 것도 아닌 것처럼 말이다. 바뀐 것은 바뀌지 않은 세계를 바라보는 박종현과 야코브의 시선일 뿐이다. 그렇기에 이유의 세계에서 탈출한 내가 다양한 시선을 가지기를 바란다. 끝없이 변해 나중에는 이유의 세계를 슬픈 마음으로만 바라보지 않았으면 한다. 이유가 없는 세계를 마냥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지만도 않았으면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을 살고 싶다. 이유는 없다. 그냥 그렇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