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석의 아름다운 나의 鬼神(문학동네, 1999)에 대한 서평
평점: 5/5
한줄평: 현실이 얼마나 무위한가 알려주는 비극적 환상, 한국 문학에서 본 적 없었던 시도에 감사하며 늦게 발견한 내가 한스럽다.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책을 읽고 서평을 읽으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무위(無爲):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이루지 못하는 것
<아름다운 나의 鬼神>은 서울의 민둥산에 자리 잡은 무허가 판자촌이 재개발로 헐리면서 그곳의 가난한 주민들이 겪어야 했던 폭력적 현실을 다루는 소설이다. 판자촌을 배경으로 무당인 당골네를 좋아하는 소년의 이야기, 부모를 죽인 존속 살해범으로 억울하게 재판을 받는 '한정수'의 이야기, 사람이 살지 않던 민둥산에 들어와 힘겹게 자식 둘을 키운 염소 할매 이야기, 헌터 신드롬(몸에 털이 나며 손가락, 발가락이 굽는 병으로 일반적으로 20살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며 언어장애를 동반한다.)이라는 유전병을 가진 솔개의 이야기가 판자촌을 배경으로 긴밀하게 짜 맞추어 전개된다.
소설은 지독하리만큼 현실적으로 극빈층의 삶을 묘사한다. 소년이 흠모하던 무당 당골네가 마을을 헐며 들이닥치는 삽차에 뛰어들어 죽는 장면은 판자촌이라는 세계가 결국 바스러질 것이란 걸 보여준다. 매일 술만 마시고 계집질만 반복하는 아버지와 '위확장'이라는 병에 걸려 병적으로 식탐 부리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한정수는, 부모가 자식을 지키기는커녕 잡아먹는 현실을 여러 차례 목도한다. 막내 섭섭이는 장마철 구더기 떼에 의해, 강도질에 내몰린 장남은 경찰이 쏜 총에 죽었지만 한정수의 부모는 자식들의 죽음을 봉투에 싸인 일반쓰레기 취급한다. 극빈층의 삶이란 그저 입에 들어가는 것만 중요할 뿐 이토록 비인간적이란 걸 여과 없이 보여준다.
이 소설은 무서울 정도로 현실적인 비극 곳곳에 비현실적인 환상 소재를 녹였다는 점에서 새롭다. 당골네의 딸인 귀연이는 선생님이 '네 손 네 발 다 들고 서있어'라고 소리치자 정말 '네 손과 네 발'을 다 들고 벌을 선다. 헌터 신드롬에 걸린 솔개는 가출한 누나와 사랑하는 정이를 찾기 위해 혼의 날개를 꺼내 날아서 전국을 뒤진다. 비극적 현실과 아름다운 환상이 단단히 결합된 채 전개되기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록 비극적인 현실은 환상처럼, 아름다운 환상은 비극적인 현실처럼 느껴진다.
현실과 환상의 결합은 이 소설이 20세기 말엽 극빈층의 비극적인 삶을 단순히 고발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게 한다. 작가는 자신의 언어적 재능으로 환상보다 무위한 현실로부터 판자촌 주민들을 환상 세계로 도피시킨다. 그렇다 때로는 현실이 환상보다 무위하다. '세상이 아무리 넓다 한들 이 늙은 몸뚱이 눕힐 방 하나 없는 세상이 과연 넓은 세상이란 말이냐'라고 말하는 염소 할매에게 현실은 무위하다. 한정수의 부모는 싸우다 서로를 죽이고 죽였을 뿐이나, 존속 살해 혐의로 재판에 선 한정수에게 광적으로 질문을 퍼붓는 기자들이 현실이라 믿는 현실은 한정수에게 무위 그 자체이다. 작가는 각 이야기의 끝에서 그들의 죽음을 암시하며 염소할매는 신선의 세계로, 한정수는 'planet X'라는 견우와 직녀의 고향으로, 솔개는 유도(幽都)라는 영혼의 고향으로 보낸다. 현실적 이야기에 익숙한 우리에게 이런 결말은 꽤나 당황스럽다. 누구보다 현실적인 비극을 다루는 작가는 왜 환상적 소재를 차용하고 인물들을 환상적 세계로 도피시켰을까?
소설 쓰기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작업이다. 창조된 세계에서 작가는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고, 나아가서는 우리 삶의 깊이와 넓이를 가늠케 한다.1) 실제 세계의 합리적 설명이 거부되는 환상의 세계로 우리의 실질적인 삶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합리적이라 믿어지는 현실은 때론 환상마저 한 수 접고 들어갈 정도로 비현실적인 비극이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최인석 작가는 이점을 알고 있기에 현실과 환상이 기묘하게 결합된 세계를 창조했다.
작가는 무허가 판자촌 사람들의 꺾이기만 하는 소망과 차가운 현실 앞에 훼손되는 인간성을 복권하고자 환상을 도입한다. 마지막 이야기인 '내 사랑 나의 암놈'에서 작가의 의도가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주인공 솔개는 장애인이 아니다. 구질구질하고 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구하러 태어난 천제(天帝)의 솔개이다. 이것은 헌터 증후군이라는 병이 아니다. 천제의 동료인 솔개로 돌아가는 과정으로서 털이 나고 손과 발이 새의 발톱처럼 굽는 것뿐이다. 슬프게도 과학, 논리, 법에 근거한 합리주의로는 이들을 구할 방법이 없기에 작가는 환상의 힘을 빌린다. 현대 사회에서 철저히 무시당하는 소외된 인간들의 인간성을 작가는 이렇게나마 지켜주고 싶었던 것 같다.
소설을 잘 읽지 않는 시대이다. 유용한 것이 인정받는 시대에 아무런 정보 전달도 하지 않는 글인 소설은 그야말로 무용하다. 작가라는 직업은 무허가 판자촌 사람들을 위해 무엇도 실질적으로 해줄 수 없다. 그저 현실과 환상을 매끄럽고 아름답게 연결할 뿐이다. 누군가는 '현실과 환상을 아름답게 연결한다 해서 무허가 판자촌 사람들의 삶은 바뀌지 않는다. 쓸모없는 도움이며 적선이다.' 라며 비판할지 모른다. 맞는 말이다. 이 소설은 결코 실질적 대안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환상 말고는 이 극빈층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작가의 빈곤한 처지가 오히려 현실을 더욱 효과적으로 고발한다.
분명 무용한 소설이다. 환상 소설인 주제에 등장인물의 삶은 하나 같이 현실적으로 끝난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현실에 잡아먹히는 내내 단 한순간도 인간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던 인물들이 환상적인 이상향으로 도피하는 죽음의 순간에만 비로소 인간답게 다루어진다는 점이다. 이 점이 현실과 환상이 결합된 이 소설의 의의이다. 밟혀 죽어가는 훼손당한 인간을, 인간성을 잃어버린 인간을, 현실에선 도저히 다시 인간답게 해 줄 방법이 없기에 환상 속 세계로 이들을 도피시켜 시적으로 이들의 몰락을 아름답게 묘사한다. 무용한 글을 쓰는 작가가 이들을 보호할 실질적 방법은 고작 이것이다. 그리고 이 자체가 세상의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하는 이들을 도울 방법이 환상 밖에 없었다는 작가의 안타까운 외침이다. '이제는 환멸과 친구가 되는 수밖에 없겠다.'라던 작가의 말이 소설을 읽고 나니 더욱 사무친다.
<작가의 말> 중 일부
이제는 환멸과 친구가 되는 수밖에 없겠다. 구겨진 넥타이라도 매고, 봉두난발이 된 머리칼에는 물을 묻혀 빗질이라도 하고, 새로운 친구를 맞아들여야겠다.
안녕, 환멸이여. 어서 와 내 식탁에 앉아서 술을 받으라. 나의 친구여.
작가 덕분에 환멸이란 새 친구가 내 식탁에도 찾아온 듯하다.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다.
1)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장강령(문학평론가, 서울대 영문과 교수)의 <아름다운 나의 鬼神> 해설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