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슈타인 가아더의 이야기 파는 남자(이레, 2005)에 대한 서평
평점: 5/5 (지나친 팬심으로 정확한 평가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5/5!)
두줄평: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와 '작가'라는 직업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하는 소설이며, ChatGPT가 소설을 창작하는 현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05년에 이 작품을 쓴 작가님, 당신은 역시 나의 최애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책을 읽고 서평을 읽으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이야기 파는 남자>는 소재가 없어 글을 쓰지 못하는 작가와 지망생들에게 플롯을 파는 페테르에 대한 이야기이다. 페테르는 머릿속 기억이 현실 기억인지 상상 기억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상상력이 풍부했다. 그의 뇌는 숨 쉬 듯 새롭고 창의적인 플롯들을 항상 뽑아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생계를 위해 플롯들을 비싼 값에 팔면서도 페테르는 자신의 소설을 쓰는 데는 무관심했다. 비단 소설뿐만 아니라 그는 현실을 마치 상상처럼 무심하게 다뤘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마리아'와 마리아와 자신의 딸인 '골디'의 정확한 이름조차 몰랐고, 결국 그들은 페테르를 떠났다. 페테르가 판 다수의 플롯이 베스트셀러가 되며 그는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다. 하지만 출판 업계가 그의 비밀스러운 사업을 눈치채기 시작하고, 플롯 구매 사실을 들킬까 두려웠던 작가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다. 페테르는 플롯 공장인 자신을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그제야 자신의 삶을 소설로 쓰기 시작한다.
구매한 플롯으로 소설을 썼다면 그 소설은 작가의 것일까? 대답하기 어렵다. 플롯이 곧 소설은 아니기에 플롯만 제공한 사람을 작가로 인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구매한 플롯으로 소설을 쓴 사람도 작가로 인정할 수 없다. 반면, 구매한 플롯으로 영화를 제작했다면 그 영화는 당연히 감독의 작품이다. 감독이 이야기를 직접 쓰든 어디서 구매해 오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영화감독이 반드시 이야기꾼일 필요는 없다. 영화화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시각화할 수 있는 감독의 기술, 그 자체가 감독의 예술이다.
하지만 작가는 단순히 주어진 줄거리를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소설로 만드는 기술자가 아니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통해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건져내야 하며 그 이야기에 몰입해 줄거리가 진행되는 동안 등장인물의 삶에도 한 껏 빠져들어야 한다. 아름다운 표현과 구성으로 독자가 소설이란 하나의 세계를 보다 깊게 체험하도록 해야 하며, 그 체험을 통해 자신이 말하고 싶은 단 한 줄의 주제를 독자들이 직접 깨닫도록 해야 한다. 이렇듯 소설은 단순한 줄거리가 아니다. 플롯 자체가 이미 작가의 삶의 결실이며, 플롯을 소설로 바꾸는 작업 역시 작가의 삶이 반영된다. 이 과정을 거쳐야 글은 문학이란 예술이 된다.
페테르가 말했듯 '글이 삶의 결실이지, 삶이 글의 결실은 아니다.' 그렇기에 페테르는 소설을 쓸 수 없었다. 현실과 상상이 다를 바 없는 그에게 소설로 엮을만한 삶의 결실은 당연히 없었다. 그에게 있어 플롯이란 거미가 실을 뽑아내듯 몸에서 당연히 흘러나오는 것이었고, 이 재능으로 세상을 그저 쉽게 살았을 뿐이다. 삶을 쉽게만 살아낸 그는 결국 상상도 못 한 방식으로 대가를 치른다. 하지만 페테르가 소설을 쓸 수 없었던 이유가 그 자신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페테르는 소설 쓰기를 일종의 허영이라 생각했다. 글 쓸 거리도 없으면서 작가의 삶을 원해 그에게 플롯을 사가는 '작가'들은 허영 그 자체였다. 아마 진심을 다해 자신의 삶을 문학에 바치는 작가를 단 한 명이라도 사귈 수 있었더라면, 페테르는 좀 더 일찍 자신의 삶을 살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소설 쓰기는 허영일뿐이라는 페테르의 비판은 2023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 똑같은 플롯의 환생/이세계/먼치킨 물의 웹소설과 웹툰뿐만 아니라 브런치/네이버 블로그/티스토리 등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글들이 넘쳐난다. 우리는 쉽게 작가가 될 수 있는 축복받은 시대를 살고 있다. 그치만 이 축복받은 시대에 한 달에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는 독자들이 넘쳐난다. 많은 사람들이 작가는 될 수 있지만 독자는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기에 삶이 담기지 않은 단순한 글자의 나열들이 넘쳐난다. 현실보다 SNS의 영향력이 더 큰 허영의 시대에 걸맞게 인스타 속 갬성 사진마냥 갬성 글들이 세상에 넘쳐난다. 하지만 아무 문제없다. 어차피 독자들도 글에서 작가의 삶을 기대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살아내지 못한 이야기 장사꾼 페테르를 통해 작가는 독자에게 '너는 너의 삶을 잘 살아내고 있는지?'를 계속해서 물어본다. 우리는 과연 삶을 살고 있는 게 맞을까? 우리는 단단한 땅을 밟으며 땅의 거친 굴곡을 느끼며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 걸까? 하지만 현실을 산다는 건 토 나올 정도로 힘든 일이기에 우리는 쉬운 삶을 바란다. 하지만 쉬운 삶이라는 것 자체가 비루한 판타지이다. <나니아 연대기> 같은 멋진 판타지가 아니라 소설 속 한 문장도 될 수 없는 밋밋하고 반복되는 판타지일 뿐이다. 고단한 현실 때문에 가끔은 비루한 판타지나마 바랄 수 있겠으나 페테르의 말처럼 '누구나 자신이 머물러야 할 현실에서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 소설은 이런 주제 의식을 제외하고도 그냥 재밌는 책이다. 다양한 플롯에 익숙해져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는 없는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이 그저 오만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페테르의 삶 자체도 흥미롭지만 페테르가 파는 플롯들 역시 새롭기 그지없다. 이 한 권의 책에서만 이미 내가 본 적도 없는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21세기의 셰익스피어로 평가받는 천재 극작가 마틴 맥도나는 자신의 희곡 <필로우맨>에서 "이야기꾼의 유일한 의무는 지금껏 세상에 없었던 이야기를 창조해 내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지어 낼 재능이 없는 저능아들이나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만을 쓰죠."라고 말한다. 하지만 마틴 맥도나도 이 책을 읽는다면 자기보다 한 수 위의 이야기꾼이 있다는 걸 인정하며, 자신이 셰익스피어와 같은 나라 출신인 걸 감사하게 생각할 것이다. 요슈타인 가아더가 노르웨이가 아니라 영국에서 태어났더라면 그가 바로 21세기의 셰익스피어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꾼이 아닌 재능 없는 저능아인 나는 자전적인 이야기만이라도 글로 남기기 위해 좀 더 삶을 깊게 그리고 힘들게 살아내야겠다. 그런 삶이 쌓이다 보면 재능 없는 나도 언젠간 문학이란 예술을 할 수 있겠지. 어쩌면 이 역시 비루한 판타지일지도 모르겠다. 현실을 위해 얼른 출근이나 해야겠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작가님, 당신 덕분에 저는 단단한 땅에 두 발을 디딘 채 무겁고 차가운 현실을 살아낼 수 있었고, 그 속에서 기적도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정말 많은 빚을 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