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주 태아의 하루

27주~30주의 기록

by 이상우

우리 재하가 어느덧 30주의 태아가 되었다.

이제 어엿한 중견 태아라 할 수 있겠다.

군대로 비유해본다면 상말(상병 끝부분) 정도 될 것이다.

이때쯤 되면 우리 용사들은 군 생활에 자신감이 붙는다.

할 만큼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우리 때는 안 그랬는데....'를 되뇌며 군기가 빠진 부대 상황을 늘 근심하며 지낸다.

뿐만 아니라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후임을 적극적으로 계도하고 신체 접촉도 거침없이 시도하는 때이다.(어디까지나 내 경험이다. 지금은 전화기 쓰느라 서로 관심이 적어졌다고 들었다. 다행한 일이다.)

우리 재하도 엄마 뱃속 생활에 이제 자신감이 붙었는지 애비애미가 어떤 상황인지 신경 쓰지 않고 자기 세상처럼 당당하게 살고 있다.


재하는 아침 6~7시쯤 한 번 깨는 것 같다.

보통 그 시간에 아내는 약을 하나 먹곤 한다.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아내의 입에 알약 하나를 넣어드리는 게 내 역할이다.

대견하게도 물은 눈 감고 혼자 잘 마신다.

이 주체적인 모습에 매일 아내에게 반한다.

여하간 아내는 약을 먹고 나면 잠에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자기야...재하가 발로 차..."



KakaoTalk_20190721_113131176.jpg 있을 만큼 있었다고!!(재하의 귀여운 다리)


아내는 이제 배가 많이 나와서 똑바로 눕거나 엎드려 있지 못하고 비스듬히 누워서 잘 때가 많다.

하지만 옷은 임부복을 새로 사지 않고 처녀적 입던 웃옷을 늘 입고 있다.

이게 더 편해서 그렇다고 한다.

옛 옷들을 조강지처마냥 애지중지하는 것은 좋지만 당연히 임산부에게 맞을 리 없다.

바로 서 있어도 배꼽티가 되는 마당에 뒹굴뒹굴 구르며 자다 보면 옷이 절로 말려 올라간다.

의도치 않은 비키니 패션으로 자게 되는 것이다.

어깨만 살짝 가린 모습이 꼭 곰돌이 푸를 보는 느낌이었다.

몇 년 전 갔던 중국에선 이렇게 다니시던 장년 남성들이 많았다.

베이징 시가 얼마 전에 이 비키니 패션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미관상의 이유로 금지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는 옥의 이 과감한 도발을 단속할 수도 없고, 보면 이불이나 덮어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어쨌든 아내에게 약을 먹이고 공격적인 배를 무심히 바라보다 보면 표면이 올록볼록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된다.

아내의 말처럼 우리 딸이 잠깐 일어난 것이다.



비키니.jpg 이분이랑 대충 비슷한 모습....

이 모습을 보고 출근하면 훈훈한 가정의 일상이겠지만 요새는 나도 같이 휴직을 하는 바람에 다시 함께 잠이 든다.

아내는 10시쯤 깨고 나는 그보다는 일찍 눈을 뜬다.

그때 되면 재하는 뭐가 불만인지 뱃속을 발로 뻥뻥 찬다.

아마 배고프다고 뭐 좀 먹자는 뜻인 것 같다.


나는 재하가 뱃속에서 움직이는 형태를 통상 세 가지 정도로 분류했다.

첫 번째, 발로 뻥뻥 찬다.

이것은 배가 고플 때, 단 것을 요구할 때, 맛있는 것 좀 먹자고 할 때, 엄마한테 그만 좀 움직이라고 할 때와 같이 무엇을 요구할 때의 모습이다.

두 번째, 발이나 손을 사용하여 연속적으로 다다다~ 친다.

이것은 단 것이 충분히 공급됐을 때 기분 좋음을 표시한다.

또한 앞으로도 열심히 단 것을 먹으라며 엄마를 격려할 때 쓰기도 한다.

세 번째, 꼬물꼬물 움직인다.

이것은 자기 혼자 잘 놀 때, 예를 들어 탯줄 꼬기나 손가락 빨기, 숨쉬기 같은 것을 할 때의 느낌 같다.

애교적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아무 의미 없이 움직이는 것이겠지만 나도 이 기회에 세심한 아빠놀이 좀 해보고 있다.


우리는 아침에 시리얼에 우유를 먹는다.

우리 배가 부르면 재하 배도 빵빵해졌을 텐데 가만히 있는다.

아까 말한 세 가지 표현 외에 하나 더 있는데 그건 분명히 발로 찰 타이밍인데 가만있는 것이다.

이 자기표현 확실하고 자기 입맛에 맛난 것만 먹고 싶어 하는 고집쟁이 태아가 가만있는다는 것은 분명히 불만이 있다는 거라는 걸 잘 알 수 있었다.

이럴 때 아내는 슬쩍 내 눈치를 보며 혼잣말을 한다.

"재하가 아이스크림 먹고 싶은가 보네..."

나는 자기가 먹고 싶은 거 아니냐고 대꾸하고 싶지만 재하가 콩콩거리며 잔 주먹질을 하는 걸 보고 싶어서 모르는 척 대꾸한다.

"그런가 봐. 얼른 먹어."

사실 나도 애기가 좋다고 발 구르는 것을 한번 더 보겠다고 집 냉동실에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을 쌓아놓았다.



하겐다즈.jpg 이 분 덕분에 우리 아내가 먹고 사심....


재하는 아이스크림이 들어가니 기분이 너무 좋은지 요동을 쳤다.

손, 발, 머리까지 사용해서 온 배를 돌아다니며 움직였다.

이렇게 과격한 세리머니라니.... 분명 재하 성격은 지 엄마를 닮았을 거다.

수영선수를 시켜야 하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기분 좋게 원하는 것을 먹고 재하는 잠이 든다.

이 시간에 우리는 각자 해야 할 일을 했다.

옥은 자기 취미 생활을 했는데, 내용은 희한했다.

락스에 휴지를 묻혀서 곰팡이 제거하기.

화장실에 줄눈 바르고 커터 칼로 모양내기.

옷 버린다면서 수십 벌 꺼내 놓고 두 벌 버리기.

베갯잇과 침대 시트를 돌아가며 빨기 등등 생산성은 별로 없는데 몸은 좀 힘든 일이었다.

이런 걸 하도 열심히 하길래 내가 못하게 했더니 내가 낮잠 자는 시간에 몰래몰래 했다.

어느 날은 뜨거운 프라이팬 내용물을 손으로 뒤집는 차력쇼도 하는 것이었다.

소리도 냈다.

"얍!"

어이가 없었다.

위험불감증인 아내가 경각심을 좀 느끼라고 이제부터 걸리면 혼내줄 거라고 했다.

그랬더니 "어떻게 혼낼 건데? 이힝이힝" 하며 비웃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위 사안들이 적발될 때마다 내 머리카락을 뽑겠다고 했다.

아내는 그제서야 울면서 미안하다고 하지 않겠다고 했다.

물론 그녀는 지키지 않았다.

나도 귀한 머리카락이 아까워서 뽑지 않았다.


재하는 오후 5시쯤 깨어난다.

"night is coming!!" 을 외치며 일어난다.

신생아들은 20시간을 넘게 잔다는데 우리 딸은 이때부터 자정이 넘어서까지 쉬지 않고 움직인다.

얘는 왜 안 자는 걸까.


종전에는 저녁때 퇴근하고 돌아와 아내의 배에 손을 대면 재하는 조신하게 살살 움직이곤 했다.

아내는 그럴 때마다 아까는 그렇게 과격하게 뛰었으면서 아빠 앞에서 지지배가 이미지 관리한다고 어이없다고 했다.

그럴 땐 손을 치웠다가 다시 조용히 얹으면 이제 재하는 아빠가 간 줄 알고 또 아이스크림 내놓으라며 쾅쾅 차고는 했다.

하지만 이제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는 지 이미지 관리 따위는 집어치우고 본색을 드러냈다.

무조건 오후 5시부터는 재하의 플레이 타임이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자상한 아빠가 되어야 했기에 재하에게 이런저런 말도 시키고 책도 읽어주었다.

내가 주로 재하에게 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1) 재하가 자정이 다 되어서도 자지 않고 뛰고 있을 때

"재하야... 아빠 엄마도 자야지~ 우리 재하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아기가 되자..."

2) 재하가 아이스크림 내놓으라며 발을 10초 간격으로 쿵쿵 찰 때

"재하야... 아이스크림을 과도하게 먹으면 성인병의 원인이 되고 각종 암의 원인이 될 수 있다..."

3) 아내의 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불현듯 나를 닮을지 모른다는 불안한 느낌이 들 때

"재하야... 제발 외할아버지 닮자... 그게 안되면 엄마라도 닮자... 아빠 닮으면 너 공부 열심히 해야 돼~"


동화책도 열심히 읽어줬는데 재하는 별 반응이 없었다.

노부부가 소를 열심히 키우든, 고아가 잃어버린 부모를 찾든 재하는 소가 닭을 보듯이 아무 대답도 안 했다.

그래서 게시판 등등을 뒤져 막장 사연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시댁에서 해 준 것도 없는데 시어머니가 큰집 제사까지 가자고 해요..."

"아내 몰래 주식하다 3천만 원쯤 잃었는데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요?"

"남자친구가 있긴 하지만 제가 좀 예뻐서 선 자리도 자주 들어오는데 그냥 시집갈까요?"

"남자가 사회생활하다 보면 연락 좀 안 할 수 있지 뭘 그렇게 난리일까요?" 등등...

아주 효과가 좋았다.

손과 발을 마구 굴렀다.

아이스크림과 맞먹는 반응이었다.

아내의 배에 살포시 얹은 내 손을 통해 우리 딸의 "빨리 더... 더... 더 센 거 얘기해줘"라는 환청이 들려왔다.

아내도 같이 맞장구치며 열을 냈다.

우리 가족의 공통적 관심사를 마침내 찾아냈다.

나중에 재하가 크면 옹기종기 모여서 '사랑과 전쟁'을 열심히 보면 될 것 같다.

아무튼 나는 더 자극적인 사연을 찾기 위해 오늘도 인터넷을 뒤지고 있다.


재하는 하루하루 즐겁게 이러면서 지낸다.

혹시 재하가 나중에 커서 자기가 언제 그랬냐고 시치미를 뗄까 봐 미리미리 기록으로 남겨둔다.


작가의 이전글모녀의 식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