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을 기다리는 동안 있었던 일들
31주 ~ 34주의 기록
1.
나는 어쩌다 리모컨을 쥐게 되면 늘 ‘태조 왕건’을 틀어놓곤 했다.
요새는 케이블 채널 두 개에서 ‘태조 왕건’을 해주는 것 같았다.
덕분에 후삼국 초기와 후기의 상황을 동시에 알 수 있어서 좋아하며 돌려가면서 봤다.
아내는 또 왕건이냐 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한 채널에서 다시 ‘해신’을 방영해주는 것이었다.
그걸 또 보고 있으니 아내가 역정을 냈다.
“자기 왕건 몇 번쯤 봤어?”
“한 세 번쯤?”
“세 번은 무슨. 서른 번쯤 되겠다.”
솔직히 스무 번 정도 봤다.
서른 번은 과장이다.
“아 그런데 해신은 몇 번 안 봤어. 좀 신선해서 틀어놓은 거야.”
“도대체 최수종이랑 무슨 관계야?”
아내는 리모컨을 내놓으라 했다.
어쩔 수 없이 순순히 내놓았다.
그리고 옥은 ‘기막힌 이야기 – 실제 상황’을 틀었다.
부부끼리 맞바람을 피우는 회차였다.
할 말은 많았지만 하지는 않았다.
지속 가능한 가정의 평화는 중요하니까.
이게 훨씬 건전하다
2.
내 사랑하는 친구 홍영기한테 어느 날 전화가 왔다.
“너 필요한 거 없냐?”
“나? 많아. 왕좌의 게임 전집을 갖고 싶어.”
“시끄럽고. 아기용품 필요한 거 말해봐.”
“내 걸 사줘. 걔는 벌써 별별 거 많아. 나보다 옷도 많을걸.”
“아 됐고 빨리 말해. 나도 와이프가 시켰어. 알아오라고. 아니면 아무거나 간다.”
그러면서 젖병 소독기나 분유 중탕기를 예로 들었다.
옥에게 물어보니 일단 재하 나오고 상황을 보자는 거였다.
영기에게 ‘우리 아내가 아직 필요한 것 없대’라고 말했더니 반응이 신기했다.
“햐... 우리 와이프가 그렇게 말할 거라고 했는데 한 톨도 안 틀리게 말하냐.”
“응?”
“너 제수씨가 완모(완전 모유 수유)할 거라고 했지?”
“어떻게 알았어?”
“처음에는 다들 그렇게 말한대. 그러고 니가 좀 있으면 밤새 울면서 젖병을 삶고 있을 거라고도 했지.”
“헐.... 아무튼 짬은 무시 못 하겠다.”
“그냥 현찰로 줄게. 그건 그렇고 넌 이제 끝났어. 당해봐라 이제 크크크크크.”
“우리 재하는 안 그래. 착할 거야.”
“한 번 보자고 어디. 넌 이제 곧 성악설을 믿게 될 거다.”
이 분(순자)이 성악설을 말씀하셨다는데...아들 좀 키워보셨나...
3.
코엑스에서 열리는 베이비페어를 갔다.
남들 해보는 거 다 해봐야 하는 우리 옥이 안 갈 리 없었다.
두 달 전부터 리스트도 작성해 놓았다.
가보니 사람이 무척 많았다.
저 출산 시대라는데 눈에 보이는 건 아이와 임산부뿐이었다.
아 짐을 든 아빠들도 있었다.
유모차 교통사고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었다.
나도 두어 번 치일 뻔했다.
“들고 갈 수 있을 만큼만 살 거지?”
“아니다. 적어놓은 것만 살 거다!!”
아내는 자기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앞만 보는 경주마 같은 여자라고 했다.
하지만 막상 행사장에 들어가니 아내의 눈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베이비’가 붙으면 다 사야 할 것 같았는데 재하 엄마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미 아기용품의 신도가 되어 있었다.
아내는 걷지 못하는 아이에게 신발과 이 없는 아이에게 칫솔을 사주려고 했다.
눈만 돌아가지 않았다.
발은 앞으로 가지만 고개는 360도 회전을 하고 있었다.
사탄의 인형에서 처키가 저리 머리를 돌렸던 것 같은데.
다른 여성분들도 비슷해 보였다.
그래서 유모차 사고가 나는 거였구나.
준비는 열심히 하고 있는데 말이지....
번외.
큰 처형께서 유럽 여행을 다녀오시면서 재하 줄 젤리캣 애착 인형을 사 올 거라고 하셨다.
그 동네에는 우리나라에서 팔지 않는 사이즈가 있다나 뭐라나.
진심 재하로 태어나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도 애착 노트북을 갖고 싶다고 옥에게 말했다가 씹혔다.
나도 잘 안고 잘 수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