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진화하는 딸
재하가 날마다 달라진다. 지구 자전은 못 느끼겠어도 딸이 점점 진화하고 있는 것은 느껴진다. 이제 어엿한 호모 사피엔스 티가 나기 시작한다.
우리 재하는 주 양육자가 넷이 있다.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지는 엄마가 있고, 충성된 몸종이자 아주 만만한 아빠도 있고, 자기를 끔찍이 예뻐하는 이모 둘이 있다. 재하는 호령호령을 거듭하며 늘 이 상황을 즐기고 당당했다. 혹 재하의 지능 계발이 시작되면 조금은 고마워하는 척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감사와 머리 발달은 별 상관이 없었다. 삐치기를 먼저 시작했다. 도대체 삐치기는 어디서 배워왔을까. 한 번은 큰 이모가 잠이든 재하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간 적이 있었다. 재하는 이틀 후에 이모를 보고 계속 삐쳐서 두 시간 동안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댔다. 그 이후부터 큰 이모는 귀가하기 전 20분 동안 재하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재하 이모 두 밤 자고 올 거야 두 밤~ 하나, 둘 할 때 그 두 밤.”
빵 살 9개월이 알아들을 리 없겠지만 신기하게도 그렇게 인사를 하고 나면 토라지지 않는다. 아빠한테도 예외는 없다. 어느 날 재하는 나에게 안아달라고 아기 가두리를 팡팡 쳐댔다. 나는 배가 아파 ‘잠깐만~’을 외친 후 화장실을 다녀왔다. 그랬더니 바로 삐쳤다. 한 삼십 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비행기를 태우고 온갖 재롱을 부리고 나서야 재하는 마음을 풀었다. 엄마는 언제나 예외다. 옆에 딸내미를 내버려 둔 채 내내 전화기를 갖고 혼자 놀아도 그저 재하는 엄마를 보며 웃는다. 이걸 보면 기억도 하고 판단도 하기 시작했다는 건데... 역시 성악설이 맞는 것 같다.
신체능력도 많이 성장해간다. 어느 날 앉더니, 배밀이를 하더니, 천천히 기고, 빠르게 기고, 잡고 일어서고, 소파나 탁자를 잡고 옆으로 한 걸음 두 걸음 발을 옮긴다. 요새는 가끔 놓아보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는 물론 어린 왕자처럼 스르르 옆으로 넘어진다. 원래 슬슬 배밀이를 하다가 마이쮸 같은 걸 보면 욕망의 눈을 하고 개구리처럼 뛰는 모습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글쓰기를 잠깐 미뤄 두고 이 일 저 일 하다 정신 차려보니 딸은 가두리 이음새를 발로 차서 열고 있었다. 심지어 벽에 매달려 점프하는 척도 했다. 아기침대에도 오르락내리락할 줄 알고 뒤로 해서 내려올 줄도 알았다. 아이의 성장 속도는 엄청났다. 육아일기를 쓰려면 부지런해야겠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체력도 많이 좋아졌다. 두어 달 전만 해도 조금 놀면 방전되어서 낮잠을 자고 그랬다. 이제 낮잠 시간은 점차 짧아지고 아예 거르고도 잘 놀면서 돌아다닌다. 아기 체력은 올라가고 어른들 체력은 떨어져 가서 점점 어른들이 낮잠이 필요해진다. 아내와 교대로 30분씩 자고 올 때도 있다. 그러다 아내가 놀아줘야 하는 타이밍에 재하가 자버리면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다.
이젠 안아 달라고만 하지도 않는다. 안고 있으면 내려가겠다고도 한다. 기어서 모험을 떠나고 싶은데 내려주고 않고 있으면 짜증을 낸다. 지금도 빚 받으러 온 것처럼 안으라고 갑질도 하지만 혼자 기는 것도 좋아하게 되었다. 혼자 기어서 무엇을 하느냐. 서랍은 다 열어보고 책도 꺼내본다. 호기심도 덩달아 많이 늘은 모양이다. 책들을 쏟아 놓고 흐뭇해하는 것이 조만간 낙서도 할 생각인 것 같다. 아내는 두꺼운 책은 재하가 뽑다가 콩 한다며 앞으로는 400페이지 이하의 가벼운 표지 책만 읽으라고 했다. 듣도 보도 못한 페이지 수 검증이라니. 양장본은 숨어서 봐야겠다. 기어갈 때는 수시로 뒤를 돌아보며 내가 뒤쫓아 오는지 확인한다. 앞만 보고 갈 때가 있는데 그건 눈앞에 핸드폰이 보일 때이다. 그럴 때는 뒤가 없다. 앞으로 앞으로만 간다.
추론 능력도 생겼는지 다른 방에 숨어 있으면 씨익 웃으며 자기가 못 찾을 줄 알았냐며 까르르 웃으며 기어 온다. 핸드폰을 몰래 하다 재하가 쳐다보면 후다닥 숨긴다. 그러면 자기를 바보로 아느냐라는 표정을 지으며 숨긴 곳으로 다가간다. 다만 찾아내서는 화면을 누르지는 못하고 입으로 물고 스마트폰의 식감을 즐긴다. 뉴스에서 봤던 휴대전화기가 변기보다 더럽다고 한 게 퍼뜩 떠올랐다. 덕분에 요새 전화기를 자주 닦는다. 내 안경에도 집착한다. 그렇게 안경알에 자기 지문을 남기고 싶어 한다. 그래서 가끔 안경을 벗고 재하를 안아준다. 그러면 또 씨익 웃으며 ‘아빠가 안경을 안 끼고 있으니 어딘가 안경이 있겠지?’ 이런 표정을 짓는다. 벗어놓은 안경은 자기가 갖고 놀아도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아주 열심히 안경을 찾아다닌다.
힘이 세지는 것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어디서 이상한 걸 배워왔는지 아기는 나름 친한 척한다며 툭툭 치는 것 같은데 많이 아프다. 뺨에 짝~짝~ 소리가 날 정도로 찰지게 손을 휘두른다. 잔매에 장사 없다는 것도 애 키우면서 알게 됐다. 싸대기를 맞다가 안경테가 날아가는 것도 일상이다. 난 철로 된 안경테를 쓰고 있는데 뿔테를 써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종종 중요부위를 맞으면 온 몸이 부르르 떨리게 아프다. 딸이 놀랠까 봐 소리도 못 지르고 이불을 먹고 참는다. 안고 있을 때도 때리길래 한 마디 했다.
“이재하!! 운전기사 폭행하면 가중처벌이야!!”
손찌검을 한참 하고 뽀뽀를 해줄 때도 있다. 눈에다가 혓바닥을 넣는 과감한 스킨십도 한다. 보다 못한 아내도 한 마디 했다.
“이재하!! 너 이거 데이트 폭력이야!!”
다행히 구타(?)는 만인이 평등하다. 안 맞은 어른이 없다. 이모들도 많이 아파했다. 큰 이모는 얼굴에 상처도 많이 났다. 둘째 이모는 재하가 다가오면 눈부터 감는다고 했다. 그 외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안으면 목을 꼬집는다. 엄마도 예외 없다. 머리를 늘 뽑는다. 그러고 보니 내 머리카락은 안 뽑았다. 우리 딸이 이렇게 사려 깊은 걸 고마워해야 하나. 웃기는 건 때려놓고 눈치를 꼭 본다.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괜찮아 아빠 괜찮아ㅜㅜ’ 하면 다시 활짝 웃는다. ‘이 정도로 약하지 않지?’라고 하며 또 거리낌 없이 손을 휘두른다. 어찌 되었건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잔병치레 한 번 안 하고 건강하게 지내준 것은 감사한 일이다.
예전에 EBS에서 방영한 한 다큐에서 아들과 딸의 차이를 봤던 적이 있었다. 그때 아들은 엄마가 울어도 장난감 가지고 열심히 놀고, 딸은 같이 울고 그랬었다. 개인적으로 남성성, 여성성 이렇게 구분하는 것 별로 안 좋아한다. 나도 속칭 남성성과 거리가 좀 있는 사람이라 성장과정에서 애로사항이 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 아이는 어떻게 반응하는지 궁금해서 아내와 실험을 한 번 해봤다. 먼저 아내가 ‘잉~~’하고 우는 척을 했다. 놀랍게도 재하는 따라 울었다. 엄마는 너무 좋아해서 그런가 싶어 나도 ‘엉엉~’하고 우는 척을 해봤다. 처음에는 이 사람이 왜 그러지란 표정이었는데 계속하니 재하가 따라 울었다. 우리 딸이 이토록 공감능력이 발달해있다니!!! 혹시 자는척하면 따라 자려나 해서 자는 척을 했더니 자기랑 장난하냐고 내 뺨을 쳤다. 나중에 신세대 이재하와 의사소통이 어려우면 어쩌나 고민이 되기도 하는데 서로 이렇게 공감할 수 있다면 별 문제없지 않을까란 생각도 한다. 아빠 너무 답답하다고 하면 나도 외칠 거다
“야, 나도 한 때는 R세대란 소리도 들었어!!”
노는 것은 많이 고차원적이 되어 간다. 예전에 한 친구가 자기 딸이 곤지곤지 잼잼을 한다고 좋아하며 자랑한 적이 있었다. 한낱 댕기머리에 불과하던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그냥 축하한다고 했다. 애아범이 된 지금 그거 한번 보겠다고 애 앞에서 수백 번 잼잼을 한다. 손에 쥐가 난다. 나름 호모 사피엔스가 되어 가는 것 같아 흐뭇하기도 하다. 손가락 장난을 하고 그러는 건 남 들도 다 하는 것 일거다. 그래도 사람이 나이를 먹어 간다는 건 평범함이 얼마나 소중한 지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딸의 꼼지락질에 늘 감사하다. 짝짜꿍도 열심히 한다. 부끄럽게 댕기머리 시절을 또 한 번 떠올리면 왜 아기들에게 각자의 개성도 없이 일괄적으로 ‘짝짜꿍’, ‘곤지곤지 죔죔’ 등을 가르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너무 똑같고 성의도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막상 육아를 해보니 클래식에는 이유가 있었다. 소근육 발달도 해주고 두뇌도 키워주면서 귀엽기까지 한 그만한 놀이도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기본에 충실하게 딸 앞에서 ‘짝짜꿍’을 외친다. 한 번 웃겨보겠다고 발로도 짝짜꿍을 한다. 문제가 있다면 재하가 내 뺨에다가 짝짜꿍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럴 줄은 몰랐다. 좀 천천히 가르칠 걸이라는 생각도 든다.
재하가 책을 좋아하는 것은 조부모님들과 이모, 삼촌이 좋아한다. 그것은 ‘이재하 천재설’의 주요 근거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 자리를 빌려 정확히 밝히면 재하는 ‘책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책을 물고 빨고 구기고 찢는 것’을 좋아한다. 진즉에 밝히지 못한 것은 다들 내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아서 그렇다.
“재하는 책을 좋아해...”
“어머, 어머 우리 재하 천재 인가 봐. 당장 전집 사줘야겠다.”
(“오늘도 내 책을 구기고 빨았어”는 분위기상 생략....)
어느 날은 내가 책을 보고 있으니 재하가 의미심장한 얼굴을 하고 기어 왔다. 갑자기 “아푸~~”하고 나를 불렀다. 감격한 애비가 딸에게 달려가서 안으려는 순간 요놈 시키는 나를 빠르게 지나쳐서 책에 침을 묻히고 물면서 좋아했다. 두꺼운 책일수록 빠는 맛이 괜찮은지 페이지가 많은 책을 볼 때 더 다가온다. 비싼 거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
나름의 놀이도 개발하는 것 같다. 구석에 물건을 던져놓고 손을 집어넣어 꺼내는 걸 종종 한다. 침대 밑, 소파 밑, 옷걸이 밑이 핫스폿이다. 물론 먼지가 많기 때문에 꺼낸 후 입으로 가기 전에 한 번 씻어 줘야 한다. 얼른 닦아서 주지 않으면 그렇게 매서운 눈을 하고 쳐다볼 수가 없다. 문 열고 닫기도 슬슬 좋아한다. 특히 냉장고 문을 선호한다. 그냥 문은 무거워서 안 열리니 홈바 같은 작은 문을 누르고 싶어 한다. 사실 재하는 시늉만 하고 내가 한 손으로는 애를 들고 한 손으로는 딸의 손을 잡아서 눌러 열게 해야 한다. 그럼 그 안에 있는 우유병을 쓰러뜨리고 콜라를 때리고 주스를 발로 차며 괴롭힌다. 1분이 지나면 전기세 나가니 빨리 닫으라고 냉장고가 신호를 주는데 그 소리를 안 들은 적이 없다.
괴롭히는 것은 음료수만이 아니고 장난감들에도 해당이 된다. 애정표현을 이상하게 배웠는지 자기가 애정 하는 장난감을 더 건드린다. 재하에게 많이 맞는 오뚝이 오리가 있다. 좀 더 어릴 때는 둘이 사투를 벌이곤 했는데, 이제는 재하가 일방적으로 때리고 있다. 아무래도 거울을 보는 것 같아 그런가 싶기도 하다. 재하가 날이 갈수록 오리를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애비를 닮아 입이 자꾸 나온다. 재하가 오리를 쥐어박고 있으면 옆에서 가만히 얘기한다.
“재하야, 아빠가 미안해. 나중에 좋은 데서 교정해줄게.”
나름 나도 계획이 있다. 딸이 나중에 연애하는 건 개인의 권리라 막을 수는 없지만 학창 시절에는 학업(?)에 방해가 되지 않게 중, 고등학교 때 교정을 해줄 생각이다. 치과 가서 말해야지. 제일 못생기고 오래가는 걸로 해주세요. 으하하. 딸아 미안하다. 연애는 대학 가서 하려무나. 아 가만 생각해보니 재하가 나를 자꾸 때리는 게 자기를 닮아서인가.
제일 특이한 것은 ‘주세요’도 했다는 점이다. 재하는 나름 욕심이 있어서 양손에 장난감을 쥐고 기어 다니기를 잘한다. 가끔 입에도 하나를 물고 세 개를 들고 다녔다. 그러는 재하에게 엄마가 ‘주세요~’를 했더니 하나 건네어 주었다. 그것도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불 들어오는 공룡이었다. 나도 달려가서 나머지 달랬더니 선선히 불 들어오는 자동차를 넘겨주었다. 물론 바로 안 돌려주냐고 눈빛 공격을 하긴 했다. 다만 어쩌다 준건지 그다음부터는 잘 안 준다. 주고 나서 후회를 많이 한 것 같았다. 아무튼 이렇게 계속 잡고 걷고 기고 책 꺼내고 문 열고 있다. 재하가 언제쯤 다시 조용히 누울까. 중학생은 되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