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우 Sep 07. 2020

저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역사 속의 자기소개

쓰기 쉬운 글이 어디 있겠냐마는 가장 어려운 종류는 자기소개서가 아닐까 싶다. 반성문보다 어렵다. 도무지 글의 성격을 종잡을 수 없다. 객관적이지도 주관적이지도 않고, 계량과 관념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일단 간택을 받으려면 자극적으로 써야 한다. 그러면서 수치를 들어가며 자기 자랑을 해야 한다. 용비어천가를 스스로 불러야 한다는 말이다. 다만 육룡이 나르긴 나르되, 겸손하고 건방지지 않으며 호감을 줌과 동시에 눈에 띄게 날라야 한다. 총체적 난국이다. 니가 한번 써보라 하고 싶다. 솔직히 지원동기가 어디 있나. 입시생은 성적 맞춰 쓰는 거고, 취업준비생은 목구멍에 풀칠하려고 하는 거 아닌가. 물론 소수의 신념 가진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부류가 못되어서 사실과 ‘뻥’ 사이에서 늘 갈등했다. 글이라는 건 신기해서 거짓을 말하면 반드시 티가 나게 되어 있다. 그러니 읽는 사람이 진실로 느껴지게 하려면 자기 자신부터 먼저 속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자소서’는 정말 쉽지 않은 ‘문학 장르’이다. 



한 취업포털 사이트(커리어)에서 조사에 따르면 자기소개서에서 호감을 주는 문장 1위는 ‘(이 회사·직무)에 지원하기 위해 ~준비를 했습니다’이고 ‘책임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했지만~을 통해 극복했습니다’,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긍정적으로~’가 줄을 이었다. 비호감 1위는 예상 가능한 ‘엄격하신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이고 그 외에 ‘뽑아만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귀사, 귀사, 귀사가 반복되는 문장’이라고 한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작성한 창작물을 범주화시킬 수 있다는 건, 다 내용이 거기서 거기라는 의미도 될 것이다. 덧붙여 다른 조사(사람인)에서는 구직자들이 76.4%가 자소설을 작성한 경험이 있다고도 했다. 여기에 맞서 채용 담당자들도 자기소개서를 평균 6.7분 읽는다고 하니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자기를 알리는 딱히 다른 방법이 없으니 유명한 옛 분들도 종종 자기소개서를 쓰셨다. 이번에는 자기소개서 주요 항목에 맞추어 그 이야기를 한 번 해볼까 한다.     




▶당신의 성장 배경을 말해보시오


저 헤겔은 1770년 8월 27일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습니다...(중략)
아버지와 어머니는 저를 학문적으로 교육하는데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 헤겔의 자기소개서 중에서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1770~1831)



어디서 많이 보던 문장이다. ‘엄격’과 ‘자상’까지 들어갔으면 완벽했겠지만 그렇지 못해서 아쉽다. 이때 헤겔은 예나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었고, 같은 학교에 정교수로 취직하기 위해서 이 자기소개서를 썼다(1805년). 예나 대학 정교수이자 그의 친구였던 셸링과 대문호 괴테의 추천에도 불구하고, 비호감 1위 문장을 이력서에 써서인지 급여가 없는 원외교수라는 죽도 밥도 아닌 직위로 채용된다. 실망했었겠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열심히 살면서 우리가 아는 대철학자가 된다. 


헤겔이 취직하고 싶어했던 예나대학교


헤겔은 역사가 발전한다고 믿었다. 당연히 수많은 반동들이 있을 테니 일직선으로 나아가지는 않고 ‘즉자-대자-즉자대자’의 변증법적 방법(正-反-合)으로 진보한다고 했다. 이런 움직임에 원동력을 제공하는 것이 ‘절대정신(absoluter Geist)’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 자연, 사회가 합치됨을 추구하는 이성이다. 이렇게 역사가 절대정신을 통하여 최후의 단계에 도달하면 더 이상 변화가 없는 역사의 종말이 온다고 말했다. 궁극적으로 헤겔은 세상의 원리를 통합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천하의 헤겔도 자기소개서에 엄마아빠 찾게 되는 것이 현실이니 인사담당자들도 조금은 부모 이야기에 너그러워졌으면 좋겠다.      



▶당신을 한 마디로 표현해보시오


나는 디오니소스 신의 최후 제자이자 전수자다
(선악의 저편, 박찬국 역, 아카넷, p.413) - 니체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



디오니소스(Dionysos, 두 번 태어난 자)는 부활의 신화를 가진 신이다. 이야기에 따르면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의 수많은 혼외자식 중 하나였다. 제우스의 본처 헤라는 화가 나서 거인족들에게 디오니소스를 넘겨 버린다. 거인족들은 디오니소스를 잡아먹는다. 그러나 이를 알아챈 제우스가 거인족들을 죽이고 아들을 다시 살렸다는 것이다. 이렇듯 디오니소스는 죽음과 삶을 넘나들었던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 인지 양가적 개념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성과 광기, 현실과 꿈, 실존과 허구와 같은 정반대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시대의 밑바닥에 있던 하층민들은 디오니소스 축제 때 극한의 쾌락을 갈구했다. 이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느끼며 힘든 현실을 받아들이려 한 것이다. 이 축제 때는 노래(oide)를 부르며 염소(tragos)를 제물로 바쳤다. 곡 제목은 ‘염소의 노래(tragodia)’였고 오늘날 ‘비극(tragedy)’의 어원이 되었다.



디오니소스



니체에게 디오니소스는 불균형적인 세계를 바로잡는 열쇠였다. 그는 「비극의 탄생」에서 아폴론적 세계와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비교했다. 아폴론은 이성과 합리성을 상징했다. 디오니소스는 본능과 충동을 나타냈다. 언뜻 보기에 아폴론의 세계가 나은 것도 같다. 이를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 18세기 서구를 지배하던 계몽주의였다. 하지만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통하여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갈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인간은 서로를 죽이고 착취하며 타락하고 있었다. 니체는 이런 모습을 비판하며 고대에 잃어버린 디오니소스적 요소를 되살려 인간에게 창조성과 욕구를 부여하고 양자의 균형을 이루고자 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뛰어넘는 인간, 흔히 ‘초인’으로 번역되는 ‘위버멘쉬(Übermensch)’가 되고자 한 것이다. 니체는 몸이 아플 때도 질병 덕분에 자신이 해방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기오 브란데스에게 보낸 편지). 다만 과하게 사람의 한계에 도전했던 때문이었을까. 결국 정신병을 비롯한 병증을 이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고 만다.     



▶당신의 지원 동기는 무엇입니까



나에게 인도인 사회와 묶은 사랑의 무명실이 끊을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간디자서전, 박홍규 역, 문예출판사, p.305) - 간디


마하트마 간디(1869~1948)


인도의 국부 마하트마 간디(1869~1948)가 1929년 출판한 간디자서전의 한 구절이다. 자신이 인도 독립운동에 왜 뛰어들었는지 문장 하나로 설명하고 있다. 간디는 인도 서부의 항구 포르반다르에서 바이샤(평민) 계급의 아들로 태어났다. 영국 유학 시절 많은 차별을 겪으며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이주 인도인들의 권리 향상에 힘쓰며 이름이 알려진다. 영국군으로도 활동했던 간디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로 귀국한다. 자신의 신념을 아힘사(Ahimsa, 비폭력), 아파리그라하(Aparigraha, 무소유), 브라흐마차리야(brahmacariya, 금욕)를 기반으로 한 사티아그라하(Satyagraha, 진리추구)로 표현하며, 비폭력 비협조를 기반으로 한 인도 독립운동에 나선다. 이후 간디는 30여 년을 민중의 지도자로 지내며 마침내 인도 독립을 쟁취한다. 그러나 1948년 인도-파키스탄의 분리 갈등의 여파로 한 과격분자에게 암살당하며 최후를 맞는다.


이슬람 지도자 무함마드 진나와 간디


간디에게 인도 독립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 정규 교육을 받고, 변호사 자격도 있으며, 훈장 여러 개를 가진 전쟁영웅이었다. 비록 차별도 여러 번 겪었지만 편히 살고 싶다면 얼마든지 살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추구했던 것은 인도인들이 행복을 찾는 것이었다. 여러 시행착오와 차별 경험 끝에 간디는 인도의 독립이 인도인들에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도인들의 행복을 위해 인도 독립운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업적의 이면에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구석들이 다소 있다. 제2가 세계대전 전쟁 중에 다른 지도자들과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무조건적인 인도 독립을 주장한다든가, 불가촉천민의 분리 투표를 막기 위해 갑자기 단식을 하는 행위 등이다. 나체의 젊은 여인들과 잠을 자며 자신의 금욕을 증명하려 한다든가, 흑인에 대한 차별, 카스트와 같은 힌두교 체제의 고수 등도 비판받을 수 있다. 이런 부정적인 모습이 있음에도 간디가 ‘불세출의 혁명가’라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는 의지가 담긴 비폭력도 충분히 강할 수 있다는 모습을 인도인들과 세계에 보여주었다. 계급과 종족, 종교로 분열되어 있던 인도를 모을 수 있는 구심체였다. 간디가 나이 먹고도 사람들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행동을 꽤 많이 하기는 했지만 그것 또한 정치가의 기본 소양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람이 완전무결할 수는 당연히 없는 것이기에 간디는 마하트마(Mahatma, 위대한 영혼)이라 불려 마땅하다. 


     

▶당신의 장점을 설명해보시오


나는 대포와 박격포, 가벼운 포를 만들 수 있습니다(중략)...
만일 저의 말에 의심이 간다면 제가 직접 시범을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1482년 밀라노의 공작 스포르차에게 보낸 자기소개서)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



화가며 작가이고 공학자이며 의사이자 건축가기도 하면서, 수학·물리학·철학·해부학·역사학 모두에 뛰어났고, 악기도 잘 다루고 요리도 잘했으며 키 크고 잘생기고 노래도 잘했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심지어 검술에도 뛰어나서 싸움도 잘했다고 하니 질투도 나지 않고 어디서 저런 사람이 나왔나 그저 신기하기만 할 뿐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52년 피렌체 공화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화가 길드의 일원으로 일하다 1482년 밀라노 공국의 루도비코 스포르차에게 이력서를 하나 낸다. 여기에서 자신은 대포와 각종 공학 기구, 건물과 조각을 할 수 있다고 10항에 걸쳐 설명하고 있다. 한 무명 화가의 패기가 공작 마음에 들었는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밀라노에 취업을 해서 「암굴의 성모」,「최후의 만찬」 등을 그려낸다. 이를 통해 ‘스푸마토(Sfumato)’라 불리는 윤곽을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고 색과 색의 경계를 번져내듯 부드럽게 그려내는 특유의 기법을 발전시킨다. 그는 이 기법을 “어둠 속에서는 경계를 구분할 수 없다.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그리고 싶지 않다면 또렷한 윤곽선은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언급한다. 이후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 등에서 일하며 「모나리자」와 같은 걸작을 남기기도 한다. 다만 생각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작품을 많이 남기지는 못했다. 너무 만능이었던 게 문제였는지 하나의 작품에 끈기 있게 매달리지도 않았다. 이런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고 혹자는 ADHD가 아니었나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밀라노 공작에게 보낸 이력서


이러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살았던 15세기의 이탈리아는 수많은 도시국가들로 쪼개져 있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476) 후 서유럽의 중심축은 세속권력을 상징하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종교의 지배자 로마 교황이었다. 이 둘은 거의 샤를마뉴가 황제에 등극한 서기 800년 이래 거의 700여 년을 경쟁하며 다툰다. 둘의 완충지대 역할을 한 것이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국가들이다. 베네치아, 제노바, 밀라노, 피렌체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양자 사이에 줄다리기를 하는 한편 동방과의 무역을 통하여 부를 증대시키며 번영한다. 다만 15세기 후반에 들어 중앙집권국가 정비를 끝낸 프랑스와 스페인이 이탈리아로 뛰어들면서 도시국가들의 운명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된다. 고대 로마제국의 영광을 계승하고 싶은 욕구 때문인지 자기 동네에서 잘 나가는 군주들은 꼭 이탈리아 쪽으로 진출하려 했다. 이 상황에서 영주들은 생존과 과시를 위해 많은 인재들을 필요로 했다. 


다빈치의 편지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밀라노의 공작에게 보내진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는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The Prince)」이 있다. 군주론도 따지고 보면 일종의 자기소개서이다. 자신이 보기에 현재의 문제는 이러이러하므로 자신이 가진 능력과 방안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내용을 피렌체를 지배하던 메디치 가문에 헌상한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당신이 생각하는 본사의 문제와 그 해결방법은 무엇입니까”와 같은 질문에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15~16세기 이탈리아의 인재들이 일할 곳을 찾아다니며 적극적으로 자신을 홍보하는 모습은 춘추전국 시대의 제자백가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두 시대의 개인사업자들은 한 곳에만 충성하지 않고 자기 유리한 곳으로 여기저기 이직하고 다닌 것도 비슷하다. 아무튼 다빈치의 저 문장은 지금 써도 인사담당자들이 극찬할 자신감의 표현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 말을 써도 될 만큼 실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함부로 쓸 수 없다. 필자도 언젠가 나의 장점을 설명할 때 “글을 잘 씁니다”를 쓰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다. 지금은 “글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가 최대의 표현이지만 말이다.   

  



「동물농장」의 작가 조지 오웰은 스페인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자서전을 비판하며 “좋은 자서전은 자신의 불명예를 드러낼 수 있어야 믿을 수 있다.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삶들을 들여다보면 그저 계속 발렸던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Autobiography is only to be trusted when it reveals something disgraceful. A man who gives a good account of himself is probably lying, since any life when viewed from the inside is simply a series of defeats)라고 말했다. 자기소개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진솔한 자기소개란 자신의 단점도 드러내야 함에도 그런 거 잘못 썼다가는 긍정적이지 못한 패배주의자로 몰릴 수도 있으니 어려운 일이다. 진실되고 능력 있는 사람보다 겉보기에만 그럴싸하고 예쁜 말만 늘어놓는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더 잘 뽑히는 경향은 안타깝기도 하다. 자기소개서가 아닌 자소설이 만연하게 된 행태는 어쩌면 선발자들이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대입 수시 시즌이 다가온다. 수험생들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입시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속이 편치 못할 것이다. 어린 친구들이 불안한 마음을 담아 자기소개서를 한 글자 한 글자 새길 것을 생각하니 내 가슴 한편도 아리다. 부디 모두의 앞날에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취업을 위해 묵묵히 땀을 흘리고 있을 준비생들에게도 응원을 보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